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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아름답지만, 과거의 매력은 사라졌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리뷰

by 한성

(※ 글의 특성상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때 열렬히 연극과 뮤지컬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황금기를 생각해보면 두 공연이 떠오르는데, 그중 하나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다. 넘버부터 내용까지 사랑하지 않은 게 없었고, 초연부터 앵콜, 음악회까지 열심히 보러 다녔던 극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탈덕을 하고 난 후 <어쩌면 해피엔딩>을 다시 공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탈덕은 했지만 이 공연은 봐야겠! 싶었다. 그래야 아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나 내가 다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과거의 매력이 사라져 있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포스터(출처 : 문화뉴스, http://www.mun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318)

<어쩌면 해피엔딩>은 여전히, 정말 아름다웠다. 많은 상을 휩쓸었던 만큼 여러 매력이 있지만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음악에 있다고 생각한다. 윌과 휴가 작곡 작사한 다른 뮤지컬 넘버가 그렇듯 넘버의 음과 가사는 내용과 찰떡이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에는 나까지 올리버와 클레어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흘러나오고, 반딧불이 반짝이는 장면에서는 노래도 반짝반짝거리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장면. (출처 : 플레이디비 http://www.playdb.co.kr/magazine/magazine_temp_view.asp?kindno=4&page)

이 뮤지컬에 나오는 넘버 중 나의 최애 넘버를 꼽자면 'Goodbye, My Room'과 '사랑이란'이다. 두 곡은 각각 방을 떠나는 올리버와 클레어의 솔직한 마음, 처음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음알못에 가깝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편도 아니고, 그냥 좋다/안 좋다 정도만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안녕 내방'과 '사랑이란'의 넘버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는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가사 또한 정말 아름답다.

조용한 오후
평온한 외로움을 나누던 우리 둘,
안녕 내 방 Goodbye my room

사랑이란 봄날의 꽃처럼
아주 잠시 피었다가 금세 흩어지고 마는 것


그리고 내용도. 사람보다도 더 사람다운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는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올리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기억을 지우겠다고 결심하는 클레어와 그런 클레어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운 척하는 올리버는 볼 때마다 슬프다. 상대방의 마음이 다치든 말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 로봇인 클레어와 올리버가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은 그 어떤 사람의 모습 보다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점을 꼽자면 수도 없이 지만, 이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시작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재연을 맞은 <어쩌면 해피엔딩>을 생각해보면, 안타깝게도 슬프지만 이전의 공연에서 갖고 있던 과거의 매력은 사라졌다. <어쩌면 해피엔딩>에는 따뜻함과 포근함이 있었다. 그래서, 극 중 배경이 6월임에도 불구하고 겨울 하면 생각나는 공연이기도 했다.(여기엔 초연이 겨울에 열렸던 것도 작용했다.) 그렇게 넓지 않은 무대, 그리고 관객석은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내가 마치 클레어와 올리버와 함께 하는 것만 같은 몰입도를 주기에 딱 적당했다. 더불어 아기자기한 무대 소품들과 장치들(화분, 유리병, 캐리어 등)이 따뜻함과 포근함을 더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재연은 좀 더 큰 공연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이는데, 덕분에 무대의 크기도 커졌다. 무대 소품이나 장치들도 이것저것 바뀌었는데, 오케스트라 한 명씩 들어가 있는 방이나 조금 더 커진 냉장고, 그리고 자동차를 타는 장면이 되면 자동차가 올라오기도 했고, 제임스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는 피아노가 돌아가기도 했다(!) 한 마디로 과거보다 커지고 화려해진 셈이다. 근데 그러다 보니 <어쩌면 해피엔딩> 하면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함이나 포근함, 아기자기함은 없었다. 내가 마치 올리버와 클레어가 된 것처럼 느낄 수 있었던, 반딧불 씬이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씬은 더 이상 그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장면. (출처 : 위드뉴스 http://www.withinnews.co.kr/news/view.html?section=9&category=119&item)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이 과거의 느낌을 주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어쩌면 해피엔딩>이 너무 자주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연극과 뮤지컬이 일반적인 여가생활로 자리잡지 못한 한국의 특성상, 연극 뮤지컬 장르를 지탱하는 것은 연극 뮤지컬 덕후(이하 연뮤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회전'(같은 극을 여러 번 보는 것)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덕질을 할 때는 한 공연의 전체를 다 본 덕후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재정적인 사정 때문에 연뮤덕들의 평균에 비해서는 많이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극들은 10번 이상 봤었다.(<어쩌면 해피엔딩>은 초연부터 앵콜까지 13번 정도 본 것 같다.)

이렇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작용을 하지만 그중 주요한 건 공연이 매일매일 다르다는 것이다. 공연의 현장성과 즉흥성 덕분에, 오늘의 '노선'(배우가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 예를 들어 노선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에는 하루는 순정 노선이었다가 하루는 싸패 노선이었다가 하기도 한다.)은 어제의 '노선'과는 사소하게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제 보러 갔다 하더라도 오늘 보러 가는 걸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나의 기분에 따라 내가 공연을 보고 느끼는 점도 달라지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은 내용의 특성상 배우의 '노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편이 아니다. 즉,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반복적이라 질릴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런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공연이 올라오는 텀이 길어야 한다.(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텀은 1년 반에서 2년 정도다. 공연을 거의 외울 정도로 보는 덕후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공연의 사소한 부분을 잊어갈 즈음. 그리고 공연의 분위기와 공연이 주는 감정이 그리워질 즈음.) 아니면 새롭게 공연이 올라올 때 연출이나 내용적으로 변화가 있거나. 하지만 이번 <어쩌면 해피엔딩>은 둘 다 아니었다. 앵콜이 지난 2017년 11월에 끝났지만 1년 만인 2018년 11월에 재연이 시작되었고, (앵콜-재연의 텀이 1년인 것도 짧은 편이지만, 초연-앵콜의 텀은 7개월로 더 짧았다.) 연출도 내용도 거의 바뀐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과거에 봤던 배우와 이번에 본 배우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기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장면. (출처 : 플레이디비 http://www.playdb.co.kr/magazine/magazine_temp_view.asp?kindno=4&page)

마지막으로, 배우에 대해서도 조심스럽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본 올리버 역할을 맡은 배우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었고 <어쩌면 해피엔딩>의 넘버 자체가 그의 목소리에 맞지 않는 게 느껴졌다. 클레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올리버에 비해 덜 과장되어있었고 노래도 어울렸지만, 과거 초연-앵콜 때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클레어를 맡았던 전미도 배우와 너무도 똑같았다. 예전에 봤던 공연을 다시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 데는 이 부분도 크게 작용한 것 같은데, 대사를 치는 톤도 음색도 정말 비슷했다. 음색이 비슷한 거야 배우가 갖고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대사 톤도 그리고 '노선'도 비슷한 건 너무 아쉬웠다. 내용과 넘버가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이것만 믿어서는 안 된다. 연극과 뮤지컬은 배우가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확 달라질 수 있으므로. 그리고 이런 아쉬운 부분이 연출의 선에서 조절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웠다.

아쉬운 점만 너무 많이 지적한 것 같은데, <어쩌면 해피엔딩>은 분명 좋은 극이다! 제목을 쓸 때도 앞 뒤 순서를 고민할 만큼, 아름다운 공연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연극, 뮤지컬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바로 이 공연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공연장이 꽉 차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연극, 뮤지컬 장르를 지탱하는 연뮤덕들에게 <어쩌면 해피엔딩>이 얼마나 더 매력을 가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의 생명력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제작진이 고민해볼 시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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