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니체는 글은 자기를 이긴 기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승리의 표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이 아닌 자신을 승리한 기록이어야 한다고. 즉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할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을 표시하는 것”(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152)이라고 말한다.
어떤 글이 자기를 이긴 글일까? 니체는 “그 무엇을 소화할 수 없을 경우에만 글을 쓰는 소화불량증을 앓는 작가들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독자에게조차 무의식 중에 노여움을 품은 채 불쾌한 기분을 털어놓고 폭력을 쓰려한다’고 말한다. ‘그들도 승리를 원하는데,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승리를 원한다.’고 꼬집는다.
비단 글쓰기뿐이야. 살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임을 알게 된다. 자기를 이겼다면 게임 끝이다. 삶의 벽 앞에 서더라도 자기를 이긴 자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벽은 기댈 언덕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 혹은 캔버스 화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문제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 때문에 생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한계상황에서도 자기에게 승리하는 것이 선행 과제다.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설픈 사설을 섣부르게 뱉어내고 싶은 조바심이 우리에게 완숙하지 않은 글을 쓰게 한다. 체화되지 않은 글을 니체는 경계하는 것이다. 자기를 극복한 글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요컨대 행위와 사고의 통일성의 주문이 아닐까. 니체는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윤리적 인간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적어도 자기를 이긴, 정직한 무엇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나를 승리할까? ‘적’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내 밖으로 나와야 한다.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관찰’에 대해 니체는 기막힌 말을 한다. “관찰한다는 것은 비밀에 찬 적대관계, 즉 서로 마주 바라보는 적대 관계”라고.
관찰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행위라고. 그렇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나는 그 사람을 관찰할 수 없다. 콩깍지가 씌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와 거리두기가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잘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봐도 된다. 즉 관찰한다는 것은 비밀리에 적대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나, 나를 떠난 나는 내 안의 나를 관찰한다. 그리고 승리의 힘을 비축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다원성을 인식하는 행위일 수 있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애조차도 한 인격 속에 서로 혼합될 수 없는 이원성(다원성)을 포함하고 있다’
나를 떠났던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돌아온 나는, 나를 이길 힘을 지닌 나다. 그 나가 쓴 글이 진짜다. 그런 글이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객관화시켜 나를 이긴, 내가 소화한 정직한 기록이어야 하는 것이다. 삶과 몸으로 익히고 터득한 나만이 쓸 수 있는 무엇. 어떻게 보면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나를 이기는 행위는 상처가 된다. 해서 글은 나를 이긴 기록, 상처의 기록일 수 있다.
“ A:(...) 쓴다는 것은 내게 용변을 보는 것처럼 피치 못할 일이다. 비유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내게는 역겹다. B: 그렇다면 도대체 그대는 왜 쓰는가? A: 친애하는 이여, 그대를 믿고 말하건대 지금까지 내 생각을 털어버릴 다른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B: 그렇다면 왜 생각을 털어버리고 싶어 하는가? A: 왜 그러고 싶어 하느냐고? 내가 그러고 싶어 한다고? 나는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B: 알겠네! 알았어!” -니체, <즐거운 학문, 93>
그렇다. 써야 하기 때문에 쓸 뿐이다.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서 쓸 뿐이다. 안 쓰면 죽을 것 같아서 쓰는 글. 내 안에서 익어 터져 버리기 직전의 글. 카프카가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처럼. 안 쓸 수 없어서 쓰는 글. 상처의 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상처 받을 때만 쓸 수 있다. 나를 ‘내리치는 도끼’, 그것이 현실의 것이든, 상상의 것이든 그 찍힘으로 피 흘렸을 때, 상처 난 나를 들여다보며, 내 안의 풍경에 대해 쓸 수 있다. 말하자면 사유가 침략과 상처로 발생하듯이, 그 발생한 사유를 나의 관점으로 구성해 내는 행위, 그것이 글쓰기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상처 받고 있으나 예민한 촉수로 상처를 나의 이야기로 사유해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돌파해 승리할 자신이 없는지도 모른다. 용기가 없어서 외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르게 감각할 것’을 주문한다.
상처는 사유의 선행행위라고 봐도 무방하다. 흔히 상처를 잘 받는다고 하면 나약한 인간으로 비칠 것이 두렵다. 이런 선입견이 우리의 사유를 막는다. 시선에 대한 공포, 그것은 공적 견해에 대한 순응과 열림 현상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약자나 소수자의 견해에는 잘 열리지 않는다. 글쓰기는 이런 덩치 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자잘하고 볼품없는 것들의 느낌과 안부를 묻는 시선이기도 하다.
내 문 앞에서 내게 말을 거는 작은 목소리들,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런 글, 사소한 나의 이야기는 나의 상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나를 충격에 빠트리지 않는 사건에 대해 나는 사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글을 쓸 수 없다. 삶이 나를 몰아가는 이 순간이 사유 거리들로 넘쳐난다. 상처들로 넘친다. 가장 좋은 텍스트는 나 자신이다.
상처는 나의 정체성에 지진을 일으킨다. 나의 평온한 일상을 뒤집어엎는 해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쓰려하지 않는다. 그 사건을 적극적으로 만날 힘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평온한 나를 이기고 싶지 않아서 내면 깊숙이 밀쳐둔다. 일상에서 행복해 죽겠다는 사람들은 자기의 빈자리를 숨겨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기억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조작하며 사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복한 사람은 글 쓸 필요가 없다.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 일상을 이긴 의지가 글 쓰는 행위가 될 것이다. 타고난 글재주를 이용해서 자기를 이기지 못한 글을 쓰는 행위를 니체는 경계하는 것이다.
나를 이긴 상처의 이야기. 그것은 너에게로 스며든다. 너에게로 스며든 나의 글은 너에게 머물면서 너를 위로하거나 상처를 준다.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고 다른 네가 된다. 상처는 찌질한 감정이 아니다. 승리한 이야기, 승리한 삶의 산모다.
나의 글은 은밀한 나의 흉터다. 낙서 같은 열패감. 나의 글은 내가 나를 이긴 기록이다. 내 안에서 익은 과실. 제 상처를 삭혀 꽃이 된 다른 얼굴. 그 꽃이 다른 이에게 가 새로운 꽃이 된다. 세상에 승리의 꽃들이 가득하다. 꽃들이 춤을 춘다. 상처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상처를 쓰는 순간이 바로 상처를 이긴 순간이며 나를 이긴 순간일지 모른다. 어찌 보면 모든 문학작품, 모든 철학책, 모든 과학, 모든 정치학, 모든 경제학, 모든 사회학, 모든 음악, 모든 미술, 모든 예술 작품이 상처를 이긴 기록일지 모른다. 포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승화의 기록이다.
지금 얼어 터진 당신의 상처 자루 안에서는 꽃이 피어나려고 깊은 고치의 시간을, 캄캄한 밤을 견디고 있다. 방금 꽃이 된 누군가의 흉터가 누군가의 언덕이 된다. 누군가의 일상을 흔들어 상처를 내는 ‘잔혹한’ 도끼가 된다.
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은 무서운 욕망이다. 타인에게 침범하고 간섭하고 타인의 안으로 들어가려는 떨리는 쾌락이며 나를 적대적으로 관찰하는 냉담한 시선이며 익숙하고 정든 나와 결별하는 행위이다. 나를 이기는 행위다.
나는 바란다. 글이 다리가 되기를, 작고 하찮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위무하기를.
나는 누군가와 감응하는 글을 쓰고 싶다.
이것이 나의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