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임신입니다.
단단히 잘 착상됐네요.
6주 됐습니다.”
의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서른 후반의 늦은 결혼 후 습관성 유산 진단을 받았고 마흔이 훌쩍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던 시점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임신이었으나 불안이 밀려왔다. 이 나이에 낳아서 언제 키울까, 하는 막막함. 꾀 오래된 이야기다. 이 아기가 중학생이 됐다!
임신. 기쁨과 우려가 교차한 시간. 안 먹던 음식이 당기고, 평소라면 의식되지도 않았을 일상에 구토가 솟구친다. 사람들의 행태에 오물과 휴지통의 구더기가 상상되고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난다.
한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기존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지진이며 익숙한 일상에 대한 거부로 시작된다. 또한 몸이 힘들고 괴롭다. 속이 뒤틀리고, 냉장고에서 몰려나오는 냄새들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갑자기 세상이 비상식적으로 느껴지며 내 몸은 세상과 다른 차원의 우주가 된다. 그 우주 속에는 모르는 생명이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일 테다. 그 시절 임신의 기억은 내게는 아득한 고통이다. 마흔이 넘는 늦은 임신 탓도 있겠으나 아무튼 모든 것이 불편했고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좋아했던 삼겹살 굽는 냄새, 된장찌개, 김치찌개 냄새가 그토록 심기를 건드릴 줄이야! 대신 평소 먹지 않던 이상한 음식이 당겼다.
신기한 것은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 음식은 일절 입에 댈 수 없었다. 임신은 나를 다른 존재가 되게 했으며 생명의 경이로움과 잉태의 고통을 함께 알게 해 주었다. 아기를 거저 낳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
이 임신 상태의 여성은 본능적으로 지극한 이기심을 표출한다. 자신에게 온 미지의 생명을 잘 품어 온전하게 세상에 내놓는 일, 그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품이 좋은 여성이라도 이때부터 이기적으로 변한다. 먹고 싶은 것을 사 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들볶지만, 막상 음식을 보면 ‘저리 치우라’고 앙탈을 부린다.
조심조심 주위를 살피고 자기에게 최상의 것을 주려고 한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이때만은 기도한다. 눈, 코, 입, 손가락, 발가락 5개씩 제대로 된 아기를 달라고. 내 몸에 집중하고 나를 살뜰히 보살핀다. 그리고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심정이 된다. 그 이상은 인간의 영역 밖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힘 앞에서 외경심을 느끼며 마음이 순해진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착한 마음을 갖게 된다. 평소 술이나 커피, 담배를 즐겼더라도 자제하고 몸이 아파도 약 복용을 삼간다. 대체로 이런 과정을 임신한 여성은 거친다. 니체는 임신한 인간이 행하는 행위들을 신성하고 이상적인 이기심으로 본다.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기심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 안에서 생성하고 있는 것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는 무언의 믿음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행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을 느끼게 되는 그것의 신비한 가치를 높일 것임에 틀림없다” -니체, <아침놀, 552>
임신을 했을 때 여성은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많은 것을 자제한다. 분노, 미움 등 격렬한 감정을 조심한다. 내 안에 어마어마한 비밀을 품은 사람처럼 신비하고 설레는 순간을 경험한다. 벽에 예쁜 아기의 사진을 붙여놓고 혹여 액운이 낄까, 가만가만 아기의 얼굴을 상상한다. 뱃속 아기와 이야기를 나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슴 앞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다.
“모든 것은 감춰져 있고 조짐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전혀 모른다. 우리는 기대하며 준비하고자 한다. 이 경우 막이 오르기 전 관객이 갖는 것과 같은 깊은 무책임성의 순수하고 순화하는 감정이 우리 안을 지배한다. 아기는 자라나며 백일하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수중에 아기의 가치와 아기가 나올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축복을 주거나 보호하는 모든 직접적인 영향에만 의지한다.” -니체, <아침놀, 552절>
니체는 ‘인간은 이 같은 축성의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기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학문적 성취든, 인간적 성숙이든, 희망사항이든 모든 완성을 위해 임신한 상태의 삶을 살기를 주문한다. “우리의 생산 능력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도록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고 영혼을 조용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이것을 니체는 이상적인 이기심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이기심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라고 본다. 그는 이타심도, 사랑이라는 충동도, 동정도 결국 인간 감각기관의 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도덕은 부도덕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해서 이타심이나 비이기적인 사랑은 일종의 위선이며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여러 덕목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이기심이라고 비난하면서 시작된다고. 신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기독교의 이타성과 동정과 보편적인 사랑의 개념의 대척점에 니체가 있다.
니체는 자기 안에서 아이를 산출하는 이기심, 그 이기심은 신성하며 ‘모든 본질적인 완성’은 임신의 상태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아이이든, 사상이든, 예술작품이든, ‘그것을 생산하는 자의 이기심에 대해 우리는 배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모든 사람의 이익을 배려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임신한 사람들은 종종 들쭉날쭉하고 기이하게 변하는데, 누군가가 이상해질 경우 그들을 비난하지 말자고! 그들은 ‘생성하고 있는 자’이므로 존중하고 배려하자고 말한다.
임신부는 곧 아이를 낳을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임신부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도 곧 우리만의 아이를 낳을 것이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 ‘신성한 이기심’ 가운데서, ‘축성의 상태’에서, 경이로운 조짐 속에 살자. 우리만의 아이를 갖자! 나의 아이가 지금 태중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임신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