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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13. 2019

천재 혹은 고통과 살기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우리는 ‘내가 천재였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부모들은 자신은 포기했지만 자식의 천재성은 열심히 탐색한다.  왜 우리는 천재가 되고 싶은가? 천재에게 보증되는 미래의 약속 때문에? 타인의 찬사와 경탄 때문에? 천재인 자신의 능력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 때문에? 여하튼 천재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나에게 천재성이란 것이 있을까? 천재의 삶이란 뭘까?    


천재, 나는 왜 이 자극적인 말을 제목으로 정하고, 하나마나 뻔할지도 모르는 논의를 하려는 걸까. 천재가 아닌 나를 독려하기 위해서?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누구나 천재성이 있다고 주장하려고? 그냥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니체의 맥락에서 천재를 사유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개념에서 항상 미끄러져 도망가 버리는 니체의 언어들은 논의를 어렵게 한다. 니체의 텍스트에서 언어들은 살아 움직인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천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온전한 개념을 움켜잡기가 쉽지 않다. 그의 논지를 힐끔거리면서 그가 말하는 천재성에 대해 생각해보지만, 나의 니체 따라잡기는 언제나 행복의 파랑새 잡기로 끝난다. 내 안으로 니체를 구겨 넣으려고 하지 말자.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천재로 보고 있으며 그의 삶의 방식을 긍정한다. 니체를 따라가 보면 각자는 내면에 ‘생산적인 유일성’, 즉 ‘그의 본질의 핵심’을 지니고 있고, 그가 이 유일성을 의식하면  ‘비범한 사람의 광채’가 나지만 게을러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고 만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 유일성에 의해 파멸할 수 있고, 이 ‘유일성에 대한 두려움에 파멸’할 수 있고 ‘자신을 포기하기 때문에 파멸할 수 있다’고 한다.    


후기 저작인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천재를 ‘생산하든지 출산하는 자’라고 말한다. 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천재는 곧 철학자다. 철학자는 비범한 정신의 소유자다. 반면 학자는 평균적인 인간이며 거울처럼 사물을 비추는 존재이다. 학자는 ‘고귀하지 못한 천성의 인간’이며 늙은 처녀 같은 인간이다. 이미 늙어버린 처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학자는 자기 것을 낳을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인식 주관에 와 닿는 것을 반영할 뿐인 수동형의 인간이다. 니체는 천재와 학자를 구분하며 비범한 정신과 평균의 인간, 거울같이 비추는 존재를 구분한다.     


천재=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자, 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자란 어떤 사람일까? 생산한다는 건 무엇일까? 출산한다는 것은 무엇의 비유일까? ‘생산’의 사전적 의미는 1.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각종 물건을 만들어 냄 2. 아이나 새끼를 낳는 일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생산이란 어떤 재료로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나는 무엇을 생산했나? 나는 뭘 하고 살고 있나?     


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자. 생산이나 출산이 위대한 발명. 발견 행위라고 한다면 보통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다. 그러나 자신의 ‘유일성’이 ‘생산한’ 무엇을 천재의 작품이라고 나는 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되면 나의 삶에서 나오는 소소한 행위도 ‘생산’이 될 수 있다. 하루의 삶도 생산이 될 수 있다. 내 삶을 조형하는 힘이 생산이 아닐까? 나의 유일성을 담아낸 무엇을 하는 것은 생산이 아닐까? 글쓰기든, 그림 그리기든, 뜨개질이든, 바느질이든, 요리든, 노래 부르기든, 그것은 나만 할 수 있는 것, 고유한 나의 힘이 작용한 무엇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도약에 이를 때 ‘작품’이 되는 것이겠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을 작품으로 조형해내기란 어려운 것이 아닌 것 같다. 타인과 비교하거나, ‘시대의 정신’ 안에 숨어들 거나, 흉내 내는 삶이 아닌 어떤 것일 게다. 내가 만들어가는 삶, 나를 강렬히 잡아채는 힘 속에서의 삶. ‘보편’의 방향이 아닌 내가 가야 할, 그 길에서 살기. 한마디로 나의 유일무이 성, 나의 고유성으로 살기. 그 삶은  내가 생산한 작품이다.  


그렇게 보면 누구나 생산. 출산하는 자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 고유성과 유일성을 살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것은 지금 내 안에 구축된 가짜 나를 버려야 하는 고통의 힘과의 조우를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유일무이성을 지닌 인간으로, 자기 삶을 조각하고 조형해 낼 수 있다. (니체는 귀족주의적이고 엘리트적인 색채가 농후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나의 삶일까?    


 나의 삶은 나의 색으로 그림 그리고, 나의 향으로 물들이고, 나의 손과 눈으로 나의 입김으로 만들어 가는 고유한 나만의 작품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내 것이 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것이라고 믿는 내 안에 바글거리는 힘들은 적극적인 나의 힘일까? 가짜 힘들의 집합체는 아닐까? 고유한 나를 나는 알아보고 있나? 나를 점유하고 있는 욕망들은, 꿈들은, 어떻게 내게 도착한 걸까? 나의 색과 나의 향기 찾기, 그것을 향한 능동성의 삶. 이 힘을 내 삶에 끌어오기가 쉽지 않다. 이 힘은 나를 비범하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모르는 사이에 순응하고 굴복한, 나의 힘을 왜곡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아닌 것 알기. 이미 내가 되어버린, 거부할 수 없는 힘들은 나의 방향을 막는 폭력들의 구조로 실재하고 있다. 이것과의 싸움은 고통을 요구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천재가 작품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자신에 사용하는 저 힘의 연극, 즉 자기 자신의 통제에, 자신의 상상의 순화에, 쇄도하는 과제들과 착상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선택하는 데 사용하는 저 힘의 연극(놀이)이다. ” <아침놀, 548>    


흔히 ‘성공한’ 삶이든, 위대한 예술 작품의 생산이든 고유한 힘의 ‘구성’을 위해 고통을 겪은 이야기는  좋은 소재거리로 부상한다. ‘사소한 창작행위’도 엄청난 고통의 힘이 부여된 무엇일 때 에너지와 빛을 머금는다. 그것은, 내 고유성과 유일성을 막고 내 안에 버티고 있는 폭력들과의 싸움을 견디고 자신의 ‘힘’을 찾은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데 나의 힘의 느낌 안에서 살게 되는 순간들은 불변한 상태로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진동하며, ‘보편성’ 혹은 ‘구조’에 의해 침식당하고 왜소해지고 쪼그라들 위험에 노출돼 있다. 나의 고유성을 지켜내려면 힘이 필요하다. 이 힘 , 나인 것을 살리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니체는 고통과 즐거움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삶의 진짜 ‘성공담’은 나로 사는 즐거움이다. 능동성의 삶이다. 지금의 나와 다른 어떤 나를, 강하고 위대한 나를 구출해내는, 경쾌한 삶의 힘이다. 그것은 고통과 표리 관계에 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는 쌍둥이 자매. 고통에 대한 감각을 지금과 다르게 느끼는 인간.    


“만약에 즐거움(쾌)과 고통(불쾌)이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어서 그 하나를 가능한 한 많이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그만큼 많이 받아야 한다면, “하늘에까지 이르는 환호”를 배우려는 사람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애”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실제로 그러할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12> 


 니체는 고통의 필요성, 고통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고통과 즐거움은 동시적 국면이라고. 우리는 고통과 역경이 인간을 발전시킨다는 자기 계발 담론에 익숙해있다. 그러나 자기 계발 담론에서 고통을 긍정하는 것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채택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안락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안락이라는 ‘피안’에 가기 위한 임시거처로 승인하는 것. 그러나 니체는 그런 삶을 파멸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더 큰 고통을 말한다.  너, 더 커다란 고통! 어서 내게 오라!   

 

“(...) 그대들은 가능한 한 –이것보다 더 미친 듯한 ‘가능한 한’은 없지만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는 그 고통을 지금까지 있었던 것보다도 오히려 더 높고 힘든 것으로 갖고자 하는 것 같다! 그대들이 이해하고 있는 안락함-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종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인간을 바로 조소하고 경멸하게 만드는 상태이고, -인간의 몰락을 원하게 만드는 상태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225>       


니체는 인간들이 원하는 안락함이란 인간을 종말로 안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엄청난 고통의 훈련만이 인간의 모든 향상을 이루어왔다’고 강조한다. 고통이 가져다주는 향상, 달콤하게 나를 유혹하는 순응적인 힘들을 거부하고 저항하며 사는 자는, 고통과 함께 행복한 존재로 도약한다. 나의 힘이 증가하는 느낌은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원하는 것은 자신의 힘의 증가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싶다! 안락에 파묻힌 삶은 사실 행복이 아니고 몰락이다. 우리는 고통 안에서 정신의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안락 속에서 잠자고 싶고 몽롱해진다. 정신은 그 예리한 빛을 잃는다. 니체는 이런 현상을 몰락이라고 말한다.   


“영혼의 힘을 길러주는 불행에 있는 저 영혼의 긴장, 위대한 몰락을 바라볼 때의 영혼의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감내하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독창성과 용기, 그리고 언젠가 깊이, 비밀, 가면, 간계, 위대함에서 영혼에 보내진 것:- 이것은 고통을 통해 엄청난 고통의 훈련을 통해 영혼에 보내진 것이 아닌가.”

                                                                                       -니체, <같은 책> 225    

 

불행과 고통을 끌어 오는 강자에게는 비범함과 독창성과 깊이와 위대함도 즉각 생성된다.  불행 앞에서, 비로소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매일 보던 태양과 매일 마주하던 일상이 사라지고, 틈새를 비집고 다른 힘, 어떤 악마성이 나에게 들이닥치는 순간을 직면할 때 나는 비로소 내 삶을 조형할 힘을 갖게 된다. 그 순간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웃는 자. 웃음과 고통은 동시에 온다. 나의 유일무이한 힘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나의 창조자는 자기의 역할을 하기 위해 위험을 나에게 요구한다. 그런데 나는 힘들어서 외면하고 싶다. 안락과 순응의 열매는 왜소하고 병든 나를, 빌붙어 살게 한다. 큰 힘은 큰 위험과 고통 앞에서만 작동한다. 모르는 사이에 똬리 틀고 있는, 나의 힘을 약화시키는 폭력들과 그럴듯한 가짜들에게서 빠져나오라고 니체는 말한다.     



“깊이 고통을 겪어본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적인 자부심과 구토감이 (...)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자들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그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멀고도 무서운 많은 세계를 잘 알고 있고, 언젠가 그곳에 ‘머문’적이 있다는 전율할 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확신이 온몸에 젖어 들어 이로 채색해버린 것이다. (...) 깊은 고통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  -니체, <선악의 저편,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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