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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15. 2019

인간말종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인간말종’이라는 굵은 글씨를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인간말종?  철학서적에 인간말종이라니!    


뭔가 ‘인간답지 못한’, 막가는 사람들에게 쓰는 이 낱말을 니체가 사용한 이유가 뭘까? 인간말종의 영어는 The Last Man, 독일어는 Der letzte Mensch(구텐베르크 프로젝트, 독일어판 참조)이다. 인간말종의 뜻은 인간의 마지막 종자(종)다. ‘최후인’, ‘종말인’ 등의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하필 ‘인간말종’이라고 번역했다. 인간말종이라 하면 내게는 ‘인간쓰레기’라는 말이 연동돼서 떠오른다. 이 ‘막가는 말’을 ‘The Last Man’의 번역어로 사용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뭐지? 궁금증 폭발이다.     


10년 동안 산속에서 혼자 살다가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이 그러하듯’ 자신의 지혜에 싫증이 난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어주고 싶어 졌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온다. ‘태양이, 자신의 빛을 받아들이는 사물들이 없다면 행복하지 않듯’ 차라투스트라 역시 자기 지혜를 나눠줄 사람들이 필요해졌을까?    


도시(시장)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말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보고 인간말종이라 하는 걸까? 차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하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웃고 있을 뿐이다. 그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 이 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 보다”    


이 말 멋지다! 나 너 같은 자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 보다! (말귀를 못 알아듣고, 내 말을 곡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허공에 대고 크게 외치시라. 나, 너 같은 자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 보다!!! 그리고 웃으시라! 지나치게 잔소리가 심한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말씀하시라. 나 너 같은 자의 입을 위한 귀가 아니

야! 닥치세요! )    


니체는 초기작 <반시대적 고찰>에서 당대 독일 교양인을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이 교양인에 대한 경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머리글에도 다시 등장한다. 인간말종!  인간말종은 바로 니체가 가장 경멸하는 ‘교양인’을 지칭한다.       


“저들은 저들 나름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저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지? 교양이라고 부르지. 그런 것이 있기에 저들은 염소 치기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경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지. 그렇다면 나 저들의 자부심에다 대고 말하련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말종이 그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그러니까 인간말종은 들을 귀를 가지지 못한 자다.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물을 뿐이다. “사랑이 무엇이지? 창조가 무엇이지?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이렇게 물은 후 눈만 꿈뻑일 뿐인 자, 그가 인간말종이다. 이 인간말종은 ‘사람의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는’ 자다. 별을 모르는 자, 그는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도 모르는,  경멸스러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말종은 세상을 초라하고 숨 막히게 만들지만 생명력 길어서 매우 오래 산다. 가늘고 길게 잘 사는 자들이 이 부류에 속하지 않을까? 인간말종의 특징을 더 알아보자.    


인간말종들은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하면서 눈을 깜빡거리는 자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다. ‘병에 걸리거나 의심을 품거나’ 질문을 던지는 것을 죄로 생각한다. 매사에 조심한다. ‘독을 마시며 단꿈을 꾸고, 많은 독으로 편안한 죽음에 이르는’ 자다. 일중독에 걸린 워커홀릭이며 다스림도, 복종도 싫어하고 평등을 원한다. 그는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누군가 위버멘쉬에 대해 말하면 정신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밤낮으로 쾌락을 즐긴다. 그러나 건강은 끔찍이 챙긴다.     


그리고는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하고 눈을 껌벅거린다.      


인간말종은 어떻게 보면 저만 아는 인간이다. 인간말종은 현대인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일중독, 건강, 평등, 이웃 사랑... 이웃을 왜 사랑할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이웃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고, 삶의 의미를 찾고 싶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가치를 발견한다. 거짓 사랑. 자기기만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 그 삶이 인간말종의 삶이다. 독을 마시면서 살고 있으나 그것이 파멸인 줄 모르는 자. 이때의 파멸과 니체가 긍정하는 파멸은 다르다.    


니체는 파멸과 몰락을 자주 말한다.    

“나는 사랑하노라. 왜 몰락해야 하며 제물이 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먼저 별들 뒤편에서 찾는 대신 언젠가 이 대지가 위버멘쉬의 것이 되도록 이 대지에 헌신하는 자를, 나는 사랑하노라.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자, 언젠가 위버멘쉬를 출현시키기 위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몰락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니.  ”-니체,  <같은 책>        


니체는 파멸과 몰락을 강조한다. 위버멘쉬(overman, ‘초인’)의 출현을 위해 스스로는 몰락하기를. 내가 몰락해야 나를 딛고 위버멘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창조자인 위버멘쉬의 탄생은, 지금 나의 몰락이 선행돼야 하므로. 자기 몰락의 의지가 인간을 너머 가려는 의지다. 그것은 되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떠나버린 자다. 그는 ‘신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의 신을 응징하는 자’다. 그런 자는 ‘그 신의 노여움을 사 파멸하는’ 자다. 나의 신은 무엇일까? 가족, 돈, 권력, 명예, 애인, 부모, 자식, 신앙...     


인간말종은 내가 이용해 먹은 타인을 향해 자신의 이웃사랑을 자랑하고, 나를 위해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그것을 숨긴다. 인간말종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행복이라는 거짓 가치를 만들어 세계와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만든다. 인간말종은 경멸스러운 허위 속에 살면서 스스로를 교양인이라고 부르며 자부심을 드러낸다.    


반면 위버멘쉬는 매 순간 인간말종을 극복하는 자다. 자기를 경멸하는 자다. 자기를 경멸할 때 창조의 에너지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매 순간 상승하며 매 순간 완성하는 자.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자기 차이를 만들어내는 자. 안주하지 않는 자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유명한 밧줄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이다.  위버멘쉬를 향해 밧줄을 건너가는 자, 그는 ‘상처 입고 파멸’할 수 있지만 기꺼이 밧줄을 건너간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을 만큼. 그리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그럼으로써 만물은 그에게 멸망의 계기가 되리니. (...) 나는 사랑하노라.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영혼을 지니고 있는 자를, 누군가가 그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않고 되갚기도 바라지 않을 자를. 그런 자야말로 베풀기만 할 뿐, 자신을 보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 <같은 책>        


자신을 잊을 만큼, 자신 속에 무수한 타자를 품어 안는 정신은 어떤 정신일까? 그 정신은 몰락하는 정신이다. 길을 잃는 정신이다. ‘정상’ 궤도에서 이탈해버린 자,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자, 자기를 넘어선 자기다. 그 자를 차라투스트라는 사랑한다. 그 자는 또한 사랑하는 자다.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영혼을 지닌 자, 그는  고마워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베풀기만 할 뿐이다. 자신을 보전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이웃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웃사랑이란  기껏해야 나를 위한 사랑이다.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본능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먼 곳에 있는, 나와는 다른 별에 있는 자에 대한 사랑만이 니체적 사랑일 것이다.  먼 행성, 자기의 고독 속에 있는 자, 무리 속에서 자기를 보전하려 하지 않는 자, 그 자는 나의 적이 될 수도, 벗이 될 수도 있다. 모르는 별에 있는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자, 그러나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넘쳐흘러서 안 줄 수가 없어서 주는 것일 뿐이니까. 넘쳐흐르는 나의 사랑을 이유 없이 베풀고 나눠준다. 베풀어라. 그러나 태양처럼 베풀어라.    


태양이 세상 모든 사물에 빛을 나눠주는 것은 이유가 없다. 나눠주지 않을 수 없어 나누어주며, 아무도 태양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태양은 감사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이라는 것은 니체의 눈으로 보면 하나같이 난쟁이들의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할 뿐이다. 멀리 있는 자에게 왜 사랑을 베푸는가? 왜 밑지는 장사를 하나? 차라투스트라가 만난 ‘성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충고한다.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 ‘무엇을 줄 생각이라면 적선 말고는 주지 말라. 저들이 그걸 구걸하게 하라고.’

    

 잔인하지 않은가?  이유 없이, 받는 자가 미안해하지 않게, 내가 필요 없어서 버리듯이 주면 절대 안 된다. 태양처럼 주면 안 된다. 구걸하게 하고, 간절하게 손을 벌려 간구하게 한 후 적선하듯이 주어야 인간은 고마움을 알기 때문이다. 자화자찬하고, 자기 자랑 늘어놓고, 상대가 구걸하는 심정이 될 때까지 참았다가 줄 때 그가 ‘베푼 사랑’은 커다란 효용으로 그에게 보답한다. 고개 조아린다.     


헌 옷 수거함에 안 입는 옷을 버리듯이, 상대방이 오히려 큰소리치면서 가져가도록 베푸는 사랑을 하라고, 그것도 내가 속한 무리인 이웃이 아닌, 멀리 있는 자에게 주라고 니체는 말하는 듯하다. 차라투스트라는 ‘구걸하게 한 후 적선하라’는 성자의 조언에 이렇게 대답한다.    


“ 나 적선 따위는 하지 않지. 나 그 정도로 구차한 것도 아니고.”    


인간말종과 위버멘쉬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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