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과 이타심 그리고 붓다와 장자
왜 사는가? 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죽지 못해 산다. 사는 게 재미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자주 대성통곡하셨다. 어머니의 대성통곡은 어린 나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통곡 후에는 긴 일장연설을 하셨다. 어찌나 구구절절 옳은 말인지 듣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 절망의 통곡과 울부짖음이 나와 아버지에게서 비롯됐다는 사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너무 감명받는 일, 그런데 감명받은 자가 감명을 촉발한 자의 고통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 그럼에도 그의 말이 속속들이 옳다고 느낄 때, 죄의식이 생긴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존재하는 걸까?
설득력은 설득 권력이다. 말을 너무 잘하는 자를 경계하라! 그가 어머니든 아버지든 혈육이든! 피붙이가 감동적으로 말을 잘할 때 특히 조심하라! 모르는 사이에 나를 피 흘리게 한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데 왜 안 되지? 나는 왜 이것뿐이 안 되는 인간일까?” 오히려 막말로 열 받게 하는 꼰대 같은 부모가 낫다. 그러면 돌아서서 욕이라도 할 수 있다. 나의 죄의식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말을 매우 잘해서 나를 울게 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마시라! 그 자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폭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내가 요즘 내 딸에게 이렇게 하고 있다.(이런 담론을 퍼트리는 나는 불온하다! 철들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르니 여러분은 내 말을 한 귀로 흘리셔도 좋다. 혹 나의 말에 설득된다면, 나를 의심하시라. 철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
죽지 못해 산다. 이제 그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인간은 죽지 못해 사는 것이라고 어머니와 어머니와 할머니와 할머니들이 말씀하셨다. 어느 날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다르게 말하려고 한다. 인간은 왜 사는가? 고양되려고 산다. 인간은 고양되려는 의지와 나빠지려는 의지에 동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고양되려고 산다고 말하기로 선택한다.
사실 고양되려는 의지와 동물의 되고자 하는 의지는 동전의 앞 뒤 면처럼 붙어 공생하고 있다. 왜 사는가? 나는 고양되려고 산다. 나는 고양되고 싶다! 이것을 니체 식으로 말하면 복된 이기심일 수 있다.
인간의 이기적 성향은 자주 비난받는다. 해서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취는 것을 조심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 여러 가면을 바꾸어 가며 산다. 따지고 보면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인 개체의 특성이며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닐까? 니체는 이상적인 이기심 등등의 언술로 인간의 이기심을 추켜세우며 화려한 인식의 장을 펼친다. 하여 니체의 금언은 죄의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주는 해방의 목소리처럼 다가온다.
니체는 특히 그리스도교 사제들의 동정과 이타주의의 복음을 경멸한다. 그렇다면 니체는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긍정했을까?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인간말종’ 부분을 보면 잘 드러난다. 인간말종들은 자기만 아는 인간들이다. 자기의 보존과 안위를 위해 눈을 껌뻑거리면서 최상의 안락과 편안을 쫒는다.
니체는 이기심을 두 가지로 분류해서 본다. 복된 이기심과 나쁜 이기심으로. 나쁜 이기심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한다. 확장하면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유형이다. 나쁜 이기심을 니체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병들고 나쁜 이기심을 ‘사이비 지혜, 하인과 늙은이, 지쳐있는 자들이 부려대는 온갖 익살’이라고 부른다. 또 ‘두렵고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입을 맞추는 저 굴복하는 듯한 태도’를 나쁜 이기심이라고 말한다. 한편 ‘사이비 현자들, 모든 사제들’은 이기심을 무조건 비난했다.
니체는 “힘찬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건강한 이기심”을 찬양한다. ‘아름답고 강력하며 생기 있는 신체’와 영혼이 누리는 자기 향락을 덕‘이라고 말한다. 이 자기 향락이란 덕이며 이 덕이란 힘의지일 것이며 이것은 복된 이기심이다. 근심에 싸여 ‘사소한 이익이나 챙기는 자’를 니체는 경멸한다. 또 눈치 보고 비굴하게 영합하는 자, ‘곧장 땅바닥에 드러눕는 개와 다름없는 자’를 하찮은 자라고 말한다.
해서 복된 이기심은 강건한 신체와 영혼에서 나오며 주인에게서 나오는 이기심이다. 이 건강한 이기심은 주변을 밝게 하고 주변의 약함을 끌어올리는 이기심이다. 이때 건강한 자, 자기 자신의 주인인 자의 이기심은 이타심과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말하자면 이 이기심은 삶을 상승시키는 힘으로서의 이기심이며, 개체의 삶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기심이다. 이 이기심은 나를 끌어올리는 힘이며, 함께 관계하고 있는 주변 모두를 상승시키는 이기심이다. 네가 상승해야 나도 함께 상승하는 세계다.
이것은 붓다의 무아(無我)나 장자의 도(道)와 통하지 않을까? 붓다가 마음을 우주의 전 존재에게로 열고 니르바나의 경지로 나가는 것은 아(我)와 타(他)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일 것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위버멘쉬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니체의 위버맨쉬는 매 순간 완성되는 존재이며, 매 순간 이기적이며 동시에 이타적인 존재이며 상승하는 존재다. 해서 깊은 수준에서 붓다의 니르바나는 위버멘쉬와 만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식으로 니체와 붓다의 유사성을 끌어내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붓다가 자비와 공감 속에서 자아를 넘어선 지점, 무아를 이야기할 때 위버멘쉬의 자기를 넘어섬과의 접점을 발견하게 된다. 니체는 물론 자비나 공감, 동정의 감정을 혐오했다. 그것들을 매우 저열한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말종’의 공감이 아니라 위버멘쉬 수준의 자기를 극복한 자의 공감이나 자비(사랑)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베풀되 태양처럼 베풀 라고 했으며, 공치사 듣는 걸 원하지 말라고 말한다. 꿀벌이 모은 꿀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 태양이 빛을 세상에 주는 것이, 공기가 인간을 호흡하게 하는 것이 감사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듯, 그렇게 타인에게 주라고 한다. 이것이 위버멘쉬가 베푸는 방식이다. 태양처럼 베풀어라! <천경 니체 읽기 , 인간말종편 참조>. 해서 깨달은 자 붓다가 매 순간 평화롭게 깨어있듯이, 니체의 위버맨쉬는 매 순간 명랑하고 가볍다.
“말들을 해보아라. 어떻게 하여 금이 최고의 가치에 오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금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고, 씀씀이를 따로 갖고 있지 않은 데다, 빛을 내는가 하면 광채 속에서도 은은하기 때문이다. 금은 언제나 몸을 바쳐 베풀기만 하는 것이다. 금은 최고의 덕의 모상으로서만 최고의 가치에 오른 것이다. 베푸는 자의 눈길은 금과 같이 반짝인다. 금의 광채가 달과 해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준다.(...) 베푸는 덕이야말로 최고의 덕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한편 장자는 도(道)와 하나 됨으로써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다. 안동림의 장자 번역본을 읽으면 장자의 사유를 유려한 문장으로 만나게 된다. 장자의 도(道) 역시 분별하는 자아를 넘어 선 지점에 있다. 장자가 말하는 자의식 없는 상태, 이 역시 아와 타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물론 붓다와 달리 장자나 니체가 개체의 자아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고를 넘어서서 도(道)와 하나가 되는 장자의 사유는 무아와 위버멘쉬와 통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붓다나 장자의 경지는 완전한 공감이 가능한 세계다. 위버멘쉬 역시 자유로운 존재이며 공감하는 존재다. 붓다도 장자도 니체도 에고에 갇힌 인간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니체가 말하는 인간말종들은 장자와 붓다의 중생일 것이다.
니체는 주인 도덕의 주권적 개인이 될 것을, 베푸는 덕을 소유한 상승적 존재가 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이 존재의 건강한 이기심을 병든 자들의 이기심과 구별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면 위버멘쉬는 “고독의 저 높은 경지가 영원한 고독을 마다하고 자족하지 않는 것, 산이 골짜기로 내려오고 높은 곳에서 있는 바람이 낮은 곳으로 불어 내리는 것”<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13쪽>을 원한다. 자기 고독 속에서 자족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존재.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 산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도시로 내려온다. 이는 붓다가 7년간의 수행 후 장터로 내려와 일반 대중을 교화한 것과 유사하다. 니체에게 고독의 시간은 깨달음의 시간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철학도 종교도 고양되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고양되려는 의지란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의지, 인간의 한계 너머로 나가려는 힘, 무아의 정신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완전한 공감의 세계다. 고양된다는 것은 혼자 득도하는 순간 너머로 확장되는 힘이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고양되려는 의지가 핵심이다.
어머니는 이태 전 작고하셨다. 어머니의 울부짖음과 통곡을 생각한다. 나는 고양되고 싶다. 그것은 사랑을 무화(無化)하는 사랑일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려는 의지.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