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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Feb 18. 2019

진리라는 번개

■도덕과 학문 그리고 자유

대학 신입생 시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학에는 왜 가야 할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누가 그런 물음을 제기했는지, 뭐라고들 말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슴푸레한 결론은 진리를 알게 되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인데 자유로운 것이 무엇인가는 제 각각 달랐다. 뭐가 자유로운 걸까? 나는 자유로운가? 너는 자유롭니?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고. 지금 당장 버스 토큰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데도 못 간다고. 그러니 돈 없으면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고, 자유케 하는 것이 뭔지 알기 위해 대학에 들어온 거라고도 했다. 대학에서 진리와 자유에 대해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 걸까?    


‘대학에는 왜 가야 할까?’에 대해서는 초등학교에서 중, 고등학교 가듯 자연스럽게 대학에도 가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 말했다. 문득 생각했다. 돈 없어서 대학 못 가는 사람이 허다한데 그렇게 말하는 건 뭘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런데 대학에는 꼭 가야 할까?    


어쨌거나  커피숍에서 수다 떨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진리라는 것이 있긴 한데 그걸 배우려고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또 진리를 알면 자유로워지는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문제를 알려주는 곳일까?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 없는 씨름과 고민을 했다.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 것이 있긴 한 걸까? 나의 진리와 너의 진리는 동일한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그래야 할 것 같다. 2500년 전 플라톤을 따라서 지금 이곳에 도달한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들 삶 아닌가? 그런데 정말 보편 진리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럴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그걸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진리와 바다 건너, 시간을 거슬러 중세의 어느 시점의 진리는 동일한가? 미래의 진리는 지금 이곳의 진리와 동일할까? 이 지구별과 저 화성의 진리는 동일할까? 진리는 변하는 것일까? 우리는 불변의 진리를 신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는 진리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학문에 대한 니체의 견해는 무엇일까? 과학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즉 학문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신앙에 기초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인식자인 우리들, 무신론자이며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우리도 수천 년간 지속된 낡은 신앙이 점화시킨 불길에서 우리의 불꽃을 얻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낡은 신앙이란 다름 아닌 저 그리스도교-신앙, 또한 신이 진리이며 진리는 신성한 것이라고 믿었던 플라톤의 신앙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이 신앙이 점점 더 신빙성을 잃어간다면,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입증되어 그것이 단지 오류 맹목 허위임이 드러난다면, -신 자체도 우리가 꾸며낸  오래된 허위임이 입증된다면-어떻게 될 것인가?” - 니체, <즐거운 학문>     



그러니까 ‘학문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학문 세계의 신앙은 플라톤의 신앙이라는 설명이다. 학문 세계에서 진리에의 의지는 나 자신도 포함하여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 즉 도덕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나 삶은 비도덕적이고 가상 위에 서 있다. 삶은 ‘오류 기만 위장 현혹 자기기만’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진리에의 의지는 삶의 파괴의 의지, 죽음의 의지다. 학문에 대한 신앙을 전제하는 인간은 이 세계와 다른 하나의 세계를 긍정하려는 것인데 그것은 지금 이곳 이 세계를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식하는 자인 무신론자도 이 낡은 신앙에서 인식의 불꽃’을 얻어온다. 니체 자신도. 이 이성의 불꽃은 바로 플라톤의 신앙이다. 오늘날 자연과학도 플라톤 신앙에서 이론의 불꽃을 얻어 온다. 결국 오늘날 학문의 세계도 플라톤주의 신앙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


플라톤의 신앙은 우리 인간의 뼛속까지 사무치게 스며들어 있다는 진단이다.  우리의 진리에의 의지는 도덕 위에 서 있고 우리의 현실은 가상 위에 서 있는 아이러니를 니체는 지적하고 있다.     


결국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일까? 과학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하는 진리는 플라톤주의적인 이데아이며 우리가 상정하는 과학 또한 플라톤주의적인 형이상학에 지반을 두고 있다고 니체는 이해한다. 그래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 344절에서 ‘우리는 아직 어느 정도로 신심이 깊은가’라고 소리친다.    


고정불변의 보편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보편 과학이라는 것이 있을까? 니체는 개별 '진리들'이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과학이란 세계에 우리가 부여한 해석이며, 언제든지 더 나은 해석이 나올 경우 새로운 과학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장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니까 진리도 과학도 한시적으로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를 강제하는 것, 즉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 의지란 금욕주의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며 또한 이 가치는 저 이상 속에서 보증되고 확인된다... 이 모든 철학 안에는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가 어느 정도나 먼저 변명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 있다. 이 점에서 모든 철학에는 어떤 결점이 있는 것이다.- 이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금욕주의적 이상이 모든 철학을 지금까지 지배했기 때문이며, 진리가 존재로, 신으로, 최고의 법정 자체로 세워졌기 때문이며,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허용된다’는 말을 이해하는 가?-금욕주의적 이상의 신에 대한 신앙이 부정되는 그 순간부터, 또한 어떤 새로운 문제가 있게 된다.: 그것은 진리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진리를 향한 의지는 비판될 필요가 있다.-여기에서 우리의 과제를 규정해보자.-시험 삼아 한번은 진리의 가치를 문제 삼아야 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    


즉 진리의 문제는 진리의 가치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에 유용한가? 이 삶을 부정하고 저 배후의 세계를 희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비판될 필요가 있고 문제 삼아야 한다. 니체에게는 진리가 지금 우리에게 ‘존재’로 ‘신’으로 ‘최고 법정’으로 세워져 있는 현상이 문제다. 영원한 이데아 같은 진리는 없다. 그것이 삶의 가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일 때 진리는 정당화된다.        


그래서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고민했던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물음은 이제 새 국면을 맞는다. 그 진리란 것을 우리는 ‘신으로, 참 존재로 최고 법정’으로 떠 받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 보편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 즉 진리란 없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진리란 다수성으로 한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에 대해 생각하는 이 시간. 삶에, 대지에 기반하는, 삶을 긍정하는 진리들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라고 나는 혼자 결론 내려 본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금언에 따라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 이것은 “너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그 추구가 너로 하여금 밤을 지새우게 했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만들었겠다.”라고 차라투스트라는 고뇌하는 청년에게 말한다.    


“그렇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진리를 말하고 계십니다. 내가 높은 곳에 오르려 했을 때, 나 그때 나의 몰락을 갈망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대가 내가 기다려온 바로 그 번갯불입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번개는 나를 태워 재가 되게 한다. 몰락의 서사는 매혹적이다. 나의 몰락은 나의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 몰락 옆에는 탄생이 있고 재가 된 자는 불꽃을 생성할 힘을 갖는다. 그러니까 몰락과 생성은 위대한 겹침의 순간, 그림자가 가장 짧은 위대한 정오에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이다. 진리는 번개처럼 너에게 온다. 진리는 번개가 되어 너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수 만 가지 현상들의 이름이다, 진리라는 번개를 매일 맞으면서 몰락과 상승을 향한 순간과 과정의 완성, 그 완성의 순간들이 영원히 회귀한다. 그 순간 나의 삶은 긍정된다. 그러니까 진리는 수 만 가지이며 수 만 가지의 현상이며 그 수 만 가지는 비진리이며 오류이기도 하고 가상이기도 하고 ‘기만, 위장, 현혹, 자기기만’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것은 한시적으로 나에게 번개이면 족하다. 진리는 비진리와 포개어져 있다. 당신은 당신의 진리를 알고 있는가?        


처음의 질문! 대학은 왜, 가야 할까?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모르겠다. 나는 지금 내 아이에게 가능하면 대학에 가라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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