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지 않기
머무른다. 머무른다는 말 안에는 어떤 따스함이 있다. 너에게 머무른다. 그곳에 머무른다. 사랑 안에 머무른다.
나이 들수록 머무르고 싶다. 머무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자기 보존의 욕구일까? 늙음의 현상일까? 그곳은 고치 속 애벌레의 어둡고 눅진한 골방, 나는 정겨운 골방에 머무르며 작은 창문의 문풍지 밖을 겁먹은 아이처럼 응시한다. 바람이 불고 흰 눈이 내린다. 문풍지 안 골방은 어머니가 지핀 장작불이 온돌을 달구고 맞붙은 안방 화로에서 고구마가 익고 있다. 머무르고 싶다! 이 안온한 골방, 엄마의 자궁, 내 성정을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환경 안에.
나는 자주 오래된 기억 속을 배회한다. 이제 기억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 곧 저녁을 지어야 한다.
허둥지둥 살다 보니 어느덧 이곳에 와 있다. 흐름들 속에 간이역 같은 곳이 존재한다면! 거기 잠시 기거하고 싶다. 긴장이 해소되고 평안해지는 그곳에서, 거기 내 오랜 친구가 있다면 더 좋겠지. 마음이 맞는 너랑 거기서 한평생 머무르고 싶다. 생명의 소란을 멀리 밀어내고. 거기서 충일해지고 싶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 충동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저 가혹한 밀림과 정글 속에 야생의 짐승들과 몸 부비지 말고, 이유 없이 한동안 소리 내어 웃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웃자 웃자. 미친 듯이 흰 이 드러내고 웃고 싶어 질 때.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천년인 것처럼 역사 이전의 시대로 다녀와도 좋을 만한 시간인 것처럼 웃는다. 웃는다.
웃음, 현존재의 ‘궁극적 해방과 무책임에 이르는 길’
나는 웃고 싶다. 그건 생명 보존의 충동이다. 나는 웃고 싶다. 그건 죽음 충동일까? 정지한 순간처럼. 웃고 웃고 웃자. 나는 웃고 싶다. 웃다가 웃다가 나는 곧 그 웃음에서 울음이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지점으로 간다. 웃다가 갑자기 욱, 울음이 난다. 울음은 웃음에 진 것이다! 울음은 웃음이 만든 전복의 힘에 굴복한 현상이다. 울음은 웃음의 퇴행 현상이다. 기존의 코드 안으로 숨어 들려는 자의 애도의 형식이다. 그러니까 이때 웃음은 나에게 반동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어찌 됐든 웃음은 웃음이다. 그러니 웃자!
니체는 울음이 아닌 웃음을 긍정한다. 그 웃음은 웃음의 새로운 미래, 그 웃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진리 전체로부터 우러나는 웃음.’ 그런 웃음을 웃을 것. 웃음이 파도가 되어 존재의 목적과 당위를 날려버리는 웃음, 그리하여 ‘짧은 비극은 결국 영원한 현존재의 희극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웃음. 그 웃음은 ‘모든 것을 교정하며’ 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위대한 설교자들’을 보고 웃는다. 웃음은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으며 ‘개체의 해방과 무책임’을 향해 간다. 웃음은 머물지 말고 떠나라고 한다. 웃음은 결국 웃음과 즐거운 지혜만을 선사하는 충동이다. 이유도 근거도 없는.
그러나 나는 니체적인 웃음을 웃지 못한다. 나는 슬픔을 승화한 양식으로 웃음을 택한다. 머물고 싶어서 웃는다. 존재의 목적이 있지 않을까? 삶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개체들의 삶의 악다구니를 보며, 나를 보며 일없이 웃는다. 그건 울음의 지점으로 가는 웃음, 다시 말해 왜소하고 병든 웃음. 머무르고 싶은 웃음. 화해하고 싶은 웃음.
왜 머무르기를 나는 바라는가? 화초는 아니지만 나는 온실이 좋다. 익숙한 이 곳, 세찬 폭풍 찬비 세지 않는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다. 방랑과 여행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여정, 거기 보물보다 더 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여기 내 방 안에서 편안한 창문과 고양이와 먼지들과 집안으로 가끔씩 새어 들어오는 바람의 냄새와 따뜻한 차 한 잔과 소박한 밥과 책과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리움들과 함께 그냥 살고 싶다.
그리고 어느 날 몹시 쓸쓸해지면 나는 또 웃으리라. 내장들이 쏠려 올라올 때까지 웃다가 한마디 하겠지. “이게 사는 거야?” 머무름을 가능하게 해주는 웃음. 긴 머무름을 위해 필요한 잠시의 일탈. 일탈 후 다시 머무름의 지대로 가려는 충동. 그것이 나에게 웃음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말할 것이다. 그대 머무르지 말라. 절대로 머무르지 말라. 머무르더라도 오래 머물지 말라.
“우리는 육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뒤의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니 우리의 배여, 앞을 바라보라! 네 곁에는 대양이 있다. 대양이 항상 포효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 그것은 비단과 황금, 자비로운 꿈처럼 그곳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대양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오, 한때 자신을 자유롭다고 느끼다가 이제 새장의 벽에 몸을 부딪고 있는 새여! 마치 육지에 자유가 있었다는 듯 향수가 너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로다! 육지는 이제 없다!” <즐거운 학문 124>
해서 나는 출항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해버린 항해, 그 무한과의 마주함이 싫다. 그 대양에 비단과 황금이 넘친다한들 나는 항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내 방에서 머무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니체 선생은 대양으로 가라고 한다. 무한과 마주하면서 격렬하고 용기 있게 무한 긍정의 삶을 살라고 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삶을 살라고.
나는 사실 니체 선생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그의 ‘관념’을 사랑하나 그것이 행위가 되는 지점이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그래요. 니체 씨 당신의 말이 적절하다 해둡시다. 그런데 당신은 행복했나요? 당신의 주장도 하나의 관점이겠지요? 당신의 목소리도 하나의 해석이겠지요?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을 약자라고 하겠지요? 독수리의 강한 날개와 용맹이 부족하고 인간이 가여워지는 내가. 당신이 말하는 강자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 또한 슬픔의 삶이라고 나는 단정하고 싶어 집니다. 운명을 사랑하고 경쾌하게 살아라!
얼마나 삶이 슬프면, 얼마나 삶이 무거우면, 운명을 사랑하려고 애쓰고 경쾌하게 살려고 발버둥 쳐야 했을까요? 당신!
앗, 지금은 ‘머무르지 않기’에 대해서 말하기로 하지요. 나는 머무르고 싶어요. 나는 배반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자꾸 배반하라고 하네요. 머무르지 말고 떠나라고 하네요. 역사 이전의 시대로 가보라고 하네요. 그 기원에 가면 만나게 될 것들의 목록을 말해주네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여기 이 벽을 밀어내고 다른 곳을 다녀오고 이 곳 먼지 풀풀 나는 낡은 익숙함을 털어내고 새로운 것의 도래를 미리 보라고.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역사와 도덕과 풍습과 ‘신성한’ 모든 것을 배반하고 떠나라고 하네요. 떠나가서 선사의 토굴로 들어가 그 안에 우글대는 괴물들의 실존을 만나고 미래로 가라고 주문하네요. 새롭게 도래하는 미래.
당신은 말합니다.
“파도는 얼마나 탐욕스럽게 밀려오는가! 기필코 무언가에 이르려는 듯이! 파도는 얼마나 서두르며 바위의 가장 깊은 틈새로 무섭게 기어오르는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는 것처럼. 그곳에 값진 것이, 더없이 값진 것이 숨겨져 있기나 한 것처럼.- 그리고 이제 파도는 되돌아간다. 다소 천천히, 여전히 흥분해서 하얀빛으로- 실망한 것일까?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을까? 실망한 척하는 것일까? -그러나 벌써 다른 파도가 다가온다. 처음 것보다 더 탐욕스럽고 더 거칠게. 이 파도의 영혼 또한 보물을 찾으려는 열망과 비밀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이 삶이다!- 이것이 우리들, 갈망하는 자들의 삶이다!-그 이상은 말하지 않으련다.(...)”
-니체, <즐거운 학문, 310>
당신은 계속 떠납니다. 방랑자가 되라고 합니다. 나는 방랑자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왜 당신이 가여워지는 걸까요? 당신은 이런 나를 보고 으하하하핫, 호탕하게 웃겠지요. 노예와 약자의 도덕에, 그 낡고 교활한 힘에 눌려 있는 나를 보고, 당신은 웃겠지요. 당신의 웃음과 나의 웃음은 다른 지점에 있으나 인간은 역시 웃음이 필요하답니다.
가끔 ‘나는 왜 이리 현명한가?’라고 읊조렸을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또 대책 없이 웃습니다. 당신을 향해 웃는 웃음조차 당신은 허용하겠지요. 하나 기우뚱기우뚱 느린 걸음으로 내가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이나요. 이제 기운을 차리고 당신의 위험한 세계 안으로 가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배반이든 배신이든 아무튼 정주하지 않기. 생성의 흐름, 자연 안의 자연인 나는 그 자연의 역능에 힘입어 자연의 호흡과 생명 안에서 계속 떠나기를 하라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