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육아일기
나뭇잎 새로 비치던
그 햇살처럼
손을 내밀어 터를 잡고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네
그대 볼 때마다 그 햇살만큼 눈부시어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네
사랑, 그 이름 하나가
나의 세계로 들어와
나의 모든 것을 빛내기 시작하였고
새로워지기 시작하였다네
-작자미상
결혼식은 부산스러웠다. 오늘의 신랑 신부는 예식장에 미리 도착했다. 겨울의 초입에 우리는 인생의 한 전환을 맞고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몸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상큼하다. 푸르고 맑은 하늘에는 투명하게 흰 구름이 우리들의 믿음처럼 든든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는 것 같다.
서른여덟 살 신부는, 긴장으로 입술이 말랐으나 신랑은 신부의 변신에 멋쩍은 듯 웃고 있다. 하객들의 덕담을 들으면서도 신부로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아 선배 진짜 예쁘다! 내가 결혼식 여러 번 다녀봤어도 선배처럼 청초하고 예쁜 신부는 드물었어. 선배가 이렇게 예쁜 사람이나?”보는 사람마다 예쁘다, 고 칭찬했지만(객관적으로 예뻤다!) 내가 예쁜지 어떤지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얼떨떨하기만 했다.
일정이 끝난 후 식을 무사히 마친 것에 안도하며 신혼부부를 위해 준비해 둔 차에 올랐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마음만은 푸릇푸릇 싱싱하다. 나로 말하자면 새 천년이 열리는 2000년, 서른여덟 나이에 4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했다!
2000년 새해가 되면서 올해는 넘기지 말아야지, 했지만 결혼이라는 것이 마음처럼 되는가? 그런데 그 해 5월 우연히 남편을 만났다. 가슴 설렌다거나, 행복하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찐빵’처럼 두리뭉실하게 생긴 ‘착한’ 사람을 만나고 있구나, 싶었다. 몇 번 만나면서 꼭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결혼이라는 것이, 아니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처럼 오랫동안 꿈쩍 않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 마음 한 올이 툭, 풀어진다고 느껴지자 일사천리로 결혼을 논의하게 됐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당시의 나에게 남편과의 만남이 연둣빛, 혹은 분홍빛의 설레는 그 무엇은 분명 아니었다. 나의 지금 느낌이 무엇인지,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미래는 어떤 그림으로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시간을 흘러 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이 찐빵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긴 사람을 오늘로서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상실감으로 오래 앓을 듯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선택에 만족했다. 하지만 결혼을 결정할 무렵은 한참 심란했다.
결혼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보니 새삼스럽다. 위 시는 우리의 결혼 과정을 담은 비디오 말미에 자막으로 깔린 것이다.
결혼을 하자 모든 것이 쉽게 굴러가는 것 같았다. 결혼 한지 석 달 만에 임신이 되었다. 내가 결혼하던 20년 전만 해도 요즘과는 달라서 신부 나이 38살이라면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38살에도 결혼을 하네! 한번 갔다 온 사람 아닐까? 아기는 낳을 수 있을까? 그런데 임신이 이렇게 쉽게 되니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신기하고 놀랍고 쉬워 보이는 신혼의 일정이, 조금 얽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11주 만에 유산이 된 것이다. 넉 달 후 다시 임신이 되었으나 두 번째도 유산이었다.
과중한 직장 업무로 오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결혼 전인 94년 초에는 한쪽 유방에 멍울이 만져져 유방 전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에서 받은 수술이었지만 지금도 뭔가 의아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의사는 ‘암은 아니지만 암이 될 수도 있다’며 ‘한쪽 가슴 전부를 들어내고 대신 식염수 팩을 넣어 가슴모양을 유지한다’고 통보해 왔다. 요즘은 설령 암이라 해도 유방을 모두 잘라내는 수술을 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하느님 같은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감사하며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수술 후 내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필요한 수술을 했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는 의사 선생님에게 무엇하나 제대로 따져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암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구세주의 처분을 머리 조아려 따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무튼 나는 한쪽 유방이 없다. 게다가 나의 자궁에는 7-8센티 이상의 물혹이 7-8개나 있다는 걸 결혼 후 산부인과 검진에서 알게 됐다. 게다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적기는 한가? 몸은 비쩍 마르고 쉽게 피로가 찾아왔다. 손과 발이 차고 몸 전체가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쑤시고 아팠다. 생리 때는 구토 증세가 심했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편두통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직장생활로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찮았다. 그러니 임신이 된다고 해도 그런 몸 상태와 자궁환경에서 아기가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 유산을 하고 나서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직장을 다니며 마음만은 간곡히 아기를 기다렸다. 어떤 날은 아기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아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아기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달랐다. 은근히 아기 갖기를 종용하고 나의 건강치 못한 몸 상태를 에둘러서 꼬집으셨다. 시댁에 가면 아무 말 없이 나를 쓱 쳐다보는 시어머니의 표정은 압권이다. 대 놓고 뭔가를 비난하지 않고, 웃는 표정인 듯한데 우회적으로 슬쩍슬쩍 던지는 노회한 화법의 파괴력을 그때 실감했다.
일상생활에서 펴놓고 경우 없이 막말을 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대하기가 편하고 뒤끝도 없다. 하지만 ‘약을 주는 것 같은 화법’인데 실은 비난이나 비아냥을 담고 있다면 뭐라고 대꾸하는 것이 만만찮다. 순발력이 좋으면 같은 화법으로 ‘언중유골’을 쓰면 되지만 나는 그런 재주가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오호라! 이건 좀 심상치 않다! 처음에는 툭툭 잽을 날리는 수준이었다면 갈수록 어퍼컷을 날리고 훅을 날리고 완 투 스트레이트, 번개 같은 주먹을 날린다. 어느 순간엔 KO 수준의 펀치가 날아왔다. 앗! 우르르 쾅 천둥 번개가 번쩍 으아아!!! 지금이야 웃을 수 있지만 그때는 진짜 심란했다. 하지만 여전히 포장은 멀쩡해서 뭐라 대거리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애 못 낳는 며느리’이라는 언중유골을 듣지 않기 위해서도 아기를 낳아야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시아버지와 시동생은 대 놓고 아이를 요구했다. 그래도 솔직한 말씀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아기에 관한 한 ‘나의 요구’ 혹은 ‘부부의 요구’보다는 주변의 요구가 훨씬 더 힘이 셌다.
그냥 무작정 노력했다. 배란일에 맞춰 부부가 함께 잠을 자는 정도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엔 임신조차 되지 않았다. 결혼한 지 햇수로 3년이 되었는데 말이다. 내 나이는 마흔이 됐고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기를 영영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불안했다. 하지만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병원에 대한 불신이 컸던 당시로서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병원은 정말이지 싫었다. 게다가 면역글로불린 주사니 뭐니 해서 불임 치료에 기천만원 이상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전전긍긍 노심초사했다. 그러다가 결심했다. 시작해보자! 내 힘으로 아기를 갖자! 난 할 수 있다! 나는 사랑스러운 아기를 낳고 싶고 아기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