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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Feb 08. 2019

글은 힘이 세다

당신의 문장들

하루 온종일을 집 안에서 보내며 알게 된 사실은 햇살의 움직임이 시간에 따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간다는 사실이다. 지금껏 흘러가는 시간을 인식할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 별거 아닌 일들도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쨌든 요즘 내 일상은 햇살을 따라 의자를 옮겨 가며 책을 읽는 것이다. 국적과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여러 책을 읽고 있다. 물론 눈은 책에 두고서 마음은 다른 곳으로 새는 경우도 많다.

 

시험을 위한 개론서를 읽을 때처럼 모든 문장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휴식을 노력하지 않기로 다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에 ‘2019년의 문장’이라는 이름을 달아 메모해 두었다. 수 권의 책에서 모아 온 문장들을 보다 보면 나는 프랑스에 사는 14살의 알제리 사람이 되었다가, 어느새 죽음을 결심한 29살의 일본인이 되기도 한다. 다른 이들의 문장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흥미롭다. 나는 이 문장들과 닮아 있거나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쨌든 이를 핑계로 지난 경험을 꺼내어 보거나 묵은 감정을 토해보는 과정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하는 일이다.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진행되고,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더 많은 자연스러움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적과 흑>, 스탕달


채색된 화폭 위에 나타나는 건 오히려 화가 자신이란 말이지.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기억하기 위해 쓴다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약간 흥분된 상태로 책을 읽다가도 다시 이어질 수험 생활을 떠올릴 때면 그 막연함에 우울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이때쯤 문 언니는 내게 이런 위로를 전했더랬다.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과 내 몸과 내 마음 상태들을 없던 것처럼 두고 싶지 않아. 간직하고 싶어” 언니의 말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려 섬광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남겼다. 아, 글을 써야겠다. 지금을 기억해야겠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지금 내가 외롭고 쓸쓸해서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나에게라도 증명해 보이면 좀 덜 쓸쓸하지 않을까. 고민을 말로 내뱉지 않아도 머릿속에 늘어놓기만 해도 좋다. 소중한 것, 그러나 외면하고 있던 것, 소홀히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꺼내어보아야겠다. 깊은 고민을 위해 필요한, 어쩌면 특권일지 모를 여유가 나에게 있다.


내게 질문을 하고, 다시 답하는 솔직한 대화는 현재의 상황과 감정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물론 기쁘고 멋진 기억보다는 쓸쓸하고 불편한 기억들이 더 많이 담기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써 내려가며 내 삶에 애정을, 그리고 용기를 보내려 한다. 글을 쓰겠다는 다짐 만으로도 갑자기 세상이 달라진 느낌이 든다.


나의 문장들

온몸으로 느끼는 문장을 솔직히 써 내려가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머릿속에 얽혀 있던 생각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행복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따위에 대한 답은 앉은자리에서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에 답하며 삶을 돌아보는 과정은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어 옷을 짜내는 일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결국 나의 문장들은 지금의 상황과 감정을 감당하게 하여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채색된 화폭 위에 나타나는 것은 화가 자신이고, 글 속에 드러나는 것은 작가 자신이다. 그러니 나의 결과물은 다른 이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소설’이 아니라 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나의 ‘삶’일 테다. 그렇다면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은, 이 문장들은, 견디기 힘든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도록 치유의 힘을 주지 않을까. 일상의 감정들이 삶의 무게로 쌓이지 않도록, 나를 살게 하는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도록, 이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써 내려간 글들이 나를 몇 뼘 더 자라게 할 것이다.


2019.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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