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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Feb 26. 2019

이토록 무거운 여행

여행의 시작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날들이었다. 친구들과 약속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고, 용기의 문제’라고 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돈의 문제이기도 했다. 공부를 핑계로 꽤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았고, 모아둔 돈도 수험 생활 중에 야금야금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돈을 버는 일이 괴롭지는 않았다. 일단 수중에 돈이 생겼고, 지금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 있다는 사실이 괜히 설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러 개의 단기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바쁘게 보낼 때면 희미한 하루를 그럭저럭 채워낼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 여행 그 자체보다 큰 설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준비하는 동안 가까워진 여행이 시작과 동시에 조금씩 멀어지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 시작이 조금 달랐다. 평소와 달리 돌아올 안정된 일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에 다녀와 설 연휴가 지나면, 나는 2019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액션을 취해야만 한다.

 

무거운 마음과는 반대로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여행 가방이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잠시나마 마음까지 가뿐해진 느낌이다. 겨울 짐 대신 담긴 걱정과 고민은 여행지에 두고 와야지,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여행의 중간

친구들과 학교에 다닐 때에는 비슷한 하루를 보내며 일상에도 서로에게 내어줄 자리가 많았는데, 직장을 갖고 조금 떨어져 살게 되면서 일상을 공유하는 데에도 계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도 늘 만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돌아가며 하는 말이 있었다. 올해는 꼭 다시 여행을 가자고. 2014년에 시작된 이 제안이 2019년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소중한 친구들과의 여행은 편안하다. 한겨울 비수기 여행지가 아무리 한산해도, 우리는 많은 말을 뱉어내며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낸다. 가끔씩 찾아오는 말과 말 사이의 여백에도 긴장이 없다. 그러나 낯설지만 편안한 여행지에서도 익숙한 감정과 상황을 마주칠 때면, 어김없이 현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 나와 함께 웃고 있는 친구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까.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아 그 존재를 가늠할 수 없어 때때로 외로워졌다. 내가 선택한 이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실 이번 여행의 과제와도 같았다.


어찌 됐든 일상을 벗어난 낯선 곳에서의 시간은 새로움과 설렘으로 즐겁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일몰도 놓치는 법이 없고, 해가 지는 거리에 쌓인 눈의 반짝임도 새롭게 느껴진다. 어두워진 거리 오늘, 이 공간을 찾아온 낯선 여행자는 이 순간들을 일상처럼 지나치는 사람들로 눈을 옮긴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길거리 사람들의 이야기가 괜스레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편안한 여행의 장면에서 시행착오를 만나기도 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월요일 차른 협곡에서의 일이다. 가이드를 다시 만나기로 한 지점을 찾지 못해 가파른 언덕을 따라 협곡을 넘어보려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네 발로 기어 언덕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예상했던 협곡의 정상, 그러니까 우리를 태워갈 차가 아니라 거대한 수십 개의 또 다른 언덕이었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경이로운 자연 앞에 우리는 뒤돌아 걸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가파른 언덕을 조심조심 기어 내려와 원점으로 돌아온 길 위에 민망하지만 편안한 정적이 흐른다. 그러다 웃음이 터진다. 아니, 도대체 이런 무모한 도전은 누가 시작한거야?


여행의 마무리

협곡을 사이에 둔 길, 머리 위에는 높고 넓은 하늘이 흐르고, 바스락바스락 눈 밟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하염없이 걷는다. 발걸음은 점점 처지고 벌써 여기저기가 쑤시는 것 같지만, 이상한 용기 같은 것이 생긴 기분이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 목표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벽을 만나 뒤돌아서는 일이 있더라도, 뒤돌아선 용기 끝에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행에서 마주한 장면과, 이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어쨌든 설렘보다 두려움으로 시작되었을 이번 여행도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머릿속 생각은 복잡하고 앞으로의 내 인생도 걱정되지만, 아주 적당한 시기에, 좋은 사람들과,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보낸 것에 감사하다.

 

돌아와 펼쳐 본 캐리어는 어쩐지 가볍다. 기념품이나 선물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와 마음들을 담아 왔다. 이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다시 긴 수험 생활을 버텨내야지. 지친 일상에 위로를 줄 소중한 보물이 하나 더 늘었다. 여행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 짧게 남겨 놓은 메모를 보고 있자면, 이 문장들이 그때의 바람과 냄새를 내 침대 위로 가져오는 것 같다. 벌써 몇몇 기억이 흐려지는 것 같아 서운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아쉬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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