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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이 Dec 13. 2019

세상 밖으로, 사람과 함께

눈이다, 눈!

첫눈 소식이 들려왔다.

    연일 SNS, 소셜 네트워크에는 눈밭을 뒹구는 강아지들과 그들을 지켜보며 입이 귀에 걸린 보호자들의 행복한 사진들이 올라왔다. 다른 지역에 폭설이 내려도 어쩐지 비만 내리는, 빛 광에 볕 양자를 쓰는 광양에 살아 올 해도 눈 구경은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그건 대프리카라는 별명을 가진 대구에 사는 곤이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올 해는 눈 구경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어쩐지 슬퍼졌다. 눈이 많이 오고 쌓여 있는 강원도까지는 광양에서 6시간, 대구에서 4시간을 잡아야 했다. 아무리 곤이네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해 봐도, 하얗고 까만 슈나우저 두 마리를 눈밭에 굴릴 수 있는 여정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열망은 깊어갔고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던 그때.

베뉴라는 소형 SUV를 4박 5일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시트와 트렁크가 더러워질 걸 예방하는 매트도 깔려 있는 강아지 전용 제품들이 장착된 차량이었다.

덜컥 4박 5일간 차량을 렌트해주는 시승 이벤트에 당첨이 됐다. 핑계는 이거다! 얼른 곤이네에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차를 빌리는 기간은 금요일부터 화요일까지. 토요일 오후까지 일정이 있으니 저녁에 대구로 가서 곤이네를 태우고 대관령으로 가는 여정이 합의됐다. 문제는 대구에서 대관령까지 약 4시간이 소요되어 잠을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대관령 도착이 예상되는 시간은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어디 숙소를 잡기도 애매했다. 그러다 문득 시승하기로 한 차가 소형 SUV, 나름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이므로 뒷좌석을 눕혀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자 곤이네가 곧 겨울철 차박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아왔다. 준비는 끝났다.

대구에서는, 광양에서는 아직 슬리퍼에 맨발로 야간 산책이 가능하니까 대관령에서 몇 시간쯤이야, 까짓!

마침내 대망의 토요일 저녁. 가득 주유를 하고 대구로 차를 몰았다. 대구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대관령 주차장에서 몇 시간 안 있을 예정이었지만 준비한 짐은 트렁크와 뒷자리를 꽉 채웠다. 도착하면 먹으려고 준비한 치킨의 양념 냄새가 차 안에 넘실댔다.

출발합니다!

기대에 찬 까맣고 하얀 슈나우저의 보호자 둘은 들떠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우리도 눈이 쌓인 곳에서 마루, 곤이와 함께 뒹굴고 있겠지? 정말 신나겠지? 막 저절로 꺅! 소리도 나올 거야. 곤이랑 마루도 엄청 신날 거고. 지켜보는 우리는 더 신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고 있을 텐데. 아, 빨리 도착했으면.


저기, 누군데 우리 엄마랑 저를 싣고 가는 거죠?
대관령 가는 길,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간 누나를 찾아 운전대를 잡은 마루.

    밤은 깊어가고 차량의 외부 온도를 알려주는 계기판의 온도계는 영하 4도가 됐음을 알렸다. 그러나 들뜬 두 보호자는 마루와 곤이의 어릴 때 이야기, 훈련 이야기 등을 하며 추운 줄도 모른 채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렸다. 수다를 떠는 동안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 옆을 보면 어김없이 엄마 무릎에 엎드린 곤이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누구세요?', '누구신데 엄마랑 저를 태워 가시는 거죠?', '우리 어디 가요?', '이상한 데 가는 건 아니죠?' 하는 물음표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럴 때마다 웃으며

곤아, 우리 눈 보러 간다! 가서 신나게 뒹굴자!

하는 말로 우리는 지금 굉장히 신나는 일을 하러 가는 길, 이라는 것을 알려주러 애썼다. 그렇게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목적지인 대관령 주차장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대관령의 칼바람이 날카로운 인사를 하며 불어댔다.

    저절로 몸이 떨렸다. 얼른 뒷자리를 눕혀 잠 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우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곤이네는 마루와 곤이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 주차장의 주변에는 군데군데 눈이 얼어 있었다. 분주히 짐을 옮기고 이불을 깔고 나서 얼른 차 안에 치킨을 펼쳤다. 작은 SUV 차량의 트렁크 공간은 발을 뻗기도 힘들었다. 앉으려면 목을 꺾어야 했다. 멀쩡히 서고 누울 수 있는 곤이와 마루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치킨을 먹고 꼬박 8시간 가까이 운전을 한 내가 먼저 시동을 끄고 누웠다. 뜨거운 물을 넣어온 물주머니는 이내 식어 미지근해졌다. 시동을 끈 차 안은 곧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 위해 내놓은 코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코털이 얼어 서그럭거렸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고 새우처럼 웅크려 곤이의 등에 코를 박았다. 곤이는 따뜻했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떨림이 멈추고 잠이 들 수 있었다. 발치에는 마루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강아지와 함께라면 겨울 차박도 할만하구나, 싶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알람이 울렸다. 아침이었다.


오길 잘했다.

    추위에 굳은 몸을 펴서 차 문을 열고 내려서니 마치 옷을 안 입은 것처럼 바람이 온통 몸을 감고 돌았다. 으으, 소리를 절로 내며 운전석에 앉아 시동부터 켰다. 앞자리에 놔둔 짐을 다시 뒷자리로 옮기고 차와 몸을 같이 녹이기 시작했다.

밤새 얼어버린 차 유리와 뒤척이며 잠을 설친 듯한 마루의 하품.

    계기판의 외부 온도는 영하 11도. 대관령은 우리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추위를 경험하게 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릴 때마다, '어서 와. 여긴 대관령이야.' 하며 대관령의 바람은 추위를 선사했다. 어으, 추워. 몸을 떨어가며 애초의 계획과 달리 차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이용해 오르기로 했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차도, 사람도 많지 않아 수월하게 주차를 하고 등산화를 신은 후 아이젠을 착용했다.

대관령 선자령 등산길을 마구 뛰어다니는 까맣고 하얀 슈나우저 두 마리.
이 모습입니다. 눈 위를 신나게 뛰는 마루와 곤이.

    등산로 초입엔 예상대로 눈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마루와 곤이는 신나서 뛰어나갔다. 보는 내내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새로 산 등산화가 발에 맞지 않아 새끼발가락이 숨 못 쉬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까짓, 마루가 저렇게 신났는데, 싶어 꾹 참았다. 예전에도 눈 쌓인 길은 몇 번 걸었지만 이 정도로 신나진 않았는데, 이상했다. 지난밤의 고생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 과하게 입고 간 바지와 두꺼운 잠바가 걸리적거리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그늘진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걸을수록 점점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뽀드득뽀득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마루와 곤이는 신나게 냄새 맡고 서로의 흔적을 찾고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때로 뛰었다.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배고픈 줄도 몰랐다. 곤이 귀를 펄럭이며 신나게 뛰면 마루도 곤이를 좇아 궁둥이를 흔들었다. 그러다 더 이상은 좁은 신발로 고통받는 발바닥의 비명을 무시할 수 없어 마루와 먼저 돌아 나오기로 했다. 곤이는 좀 더 등산을 하기로 했는데 마루에게 정말 미안했다.

곤이와 떨어져 불만인 마루.
좀 더 놀면 안 되냐는 무언의 시위 중.

    역시 사람이든 강아지든 함께 놀 대상이 없으면 조금은 시시해지는 모양이다. 되돌아 나오는 산길은 고요했고 사방이 온통 눈이었다. 마루와 이런 눈길을 차분히 걷고 있는 자체로 벅찼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루랑 눈 보러 왔어요!' 하며 외치고 싶었다. 발이 아프기도 했지만 이 길을 조금 더 오래 걷고 싶어 천천히 걸었다. 눈에 찍힌 마루의 발자국이 귀엽게 앞장섰다. 바쁘게 이 냄새, 저 냄새 맡으며 걷느라 마루 발자국은 어지럽게 찍혔다. 그 발자국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뒤따랐다. 다음엔 좀 더 준비를 잘해서 또 와야지, 오길 잘했다.


이제 다음은?

    생각보다 눈길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서 아쉬웠지만 내려갈 길을 생각하면 더 지체할 수도 없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서둘러 대구로 향했다. 휴게소마다 들러 부족한 잠을 자 가며 곤이네를 내려주고 집에 도착하니 저녁 7시. 꼬박 24시간의 엄청난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가득 쌓인 눈에서 뛰놀던 한 시간 가량이 모든 걸 보상하고도 남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텐트 하나 짊어지고 산으로, 들로 향하나 싶었다. 친구와의 여행이라면 고작 한 시간의 눈길 산행으로 모든 것이 보상받진 못 했을 텐데 정말 신기한 여정이었다. 강아지와 함께 한다는 것, 보다 자연을 깊숙이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 시간을 선사했다.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만만찮은 시간 동안 차에서 시달린 마루에게 정말 미안했는데 정작 마루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으이그.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자연으로 안내하기 힘드네, 힘들어. 내가 참아야지 뭐.

고마워, 마루야. 이제 다음은 어디로 안내해 줄 거야?

그건 사람이 알아서 생각해 봐. 스스로 깨달아야 돼.

아아,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마루와 함께 가는 세상 밖은 언제나 신나는 곳이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당장 오늘은 집 앞 산책로를 걷고 주말엔 다른 곳을 가봐야지. 아무래도 세상 밖은 마루가 아닌 사람이 나가게 되는 게 맞다. 그래도 혼자는 심심하니까 마루야,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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