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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호 Mar 22. 2019

그날은 반드시 온다

2-5. 득인가 실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 번도 답이 없던 와카츠키 교수에게서 느닷없이 온 이메일, 내용이 황당하다. 다짜고짜 책을 보내라니.


허나 무슨 일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어 보인다. 지도 교수가 달라면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책장을 뒤져 그 지긋지긋한, <친일파를 위한 변명> 책을 꺼냈다. 그리고 그 길로 우체국으로 가 국제 우편으로 책을 배송했다.


문득 돌아보니 이 책을 교수에게 받은 이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시원하면서도 허탈했다.


한 가지 분명해지는 느낌은 있다.   

확실히 연구실에,

무슨 일인가 생겼다.





2-5. 득인가 실인가



학부생들의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 연수는 어느 대학의 같은 과 학생 20여 명이 담당교수와 함께 출발한다. 해외에 처음 나가는 학생들도 많았던 터라, 다들 설레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종알거리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보기에 좋았다.


담당교수만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교수는 자기 짐을 이것저것 챙기며 학생들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내 인사를 딱딱하고 무뚝뚝하게 받았다. 일단 학생들에게 다가가 티켓팅을 위해 여권을 모았다. 그리고 늘 하듯이 주의 사항을 간략히 알려 주면서 출국 전 오리엔테이션을 잠깐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수가 나를 부른다.

 

"어이"


돌아보니, 아까 그 자리에서 손을 까딱거리며 자기에게 오라고 손짓을 한다.

이야기를 멈추고 교수 쪽으로 갔다.


"네, 무슨 일이시죠"

"내가 할 테니, 가서 티켓이나 받아와요."

"네? 아.."


잠시 '뭐지..?' 싶은 마음이 스쳤지만, 이 교수가 매년 학생들을 데리고 똑같은 연수를 다녀왔다는 것이 생각났다. 리더십을 본인이 가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분위기 파악을 빨리 하는 것도 이 일의 임무라면 임무다. 나야 차라리 편하지 며, 그 길로 카운터에서 티켓팅을 했다. 돌아와 보니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뒤에 보이지 않게 서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매년 우리가 아닌, 경쟁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서 이 연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 연수에서 무슨 일이 생겼던지, 올해 처음으로 우리에게 연락을 했다. 이것저것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교수에게 맨 뒷줄에 있던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고 몸짓으로 알렸다. 이때만 해도 교수와 나는 같은 인솔팀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완전한 착각이라는 걸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교수가 아이들을 이동시키자마자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예?? 아... 저는 그냥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알려 드리려고.."

"나는 사실 업체 사람이 왜 가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당신 호텔비 비행기 값 내주면서 같이 갈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내가 다 하는데. 그냥 식사나 좀 제대로 준비하고, 교통편이나 잘 준비해요."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다 준비할 것이지 컨설팅 회사에는 왜 연락을 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식사와 교통편을 준비하는 게 우리 일에 포함되긴 하지만, 보통 벤치마킹 연수 인솔자는 그런 일만 하는 게 아니다. 방문 지역이나 기업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자료를 준비해서 틈틈이 알려 주고, 이동 중 시간이 비지 않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모두의 분위기를 풀어주기도 하고, 또 모으기도 하는 역할을 한다. 언제쯤 긴장을 유도해 연수 본연의 성과를 끌어올릴지, 또 언제 긴장을 풀어 주며 즐거운 추억을 남기게 할지에 대한 노하우가 한창 쌓이고 있던 나는, 나름대로 이 학생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훌륭한 연수를 만들어 주리라 잔뜩 준비하고 온 터였다.


하지만, 하지 말라니 어쩔 수 없다. 다른 연수와 달리, 사제지간의 관계는 연수가 끝나고 돌아가도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만큼, 상황은 이해가 됐다. 이후로는 내내 조용히 식사와 교통편, 그리고 다음 방문지와의 사전 연락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또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알았다. 호텔, 식사, 교통 어느 하나도 이 교수가 만족을 하지 못하는 거다. 내게 끊임없이 불만을 늘어놓았고 불편을 호소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는 다른 팀들도 묵었던 곳이고, 이 식당은 다른 연수 팀들이 맛있게 먹었던 곳이라는 정도의 대답인데, 이 말에 특히 짜증을 냈다. 다른 사람들이 좋든 말든 자기에게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식당 문제에 대해서 연수단에게 미리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동이 많은 연수의 특성상 동선을 고려해서 정해야 하므로, 혹시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식당 말고는 대안이 없을 때가 많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과하며 힘겨운 여정을 이어갔다.


문제가 터진 건 셋째 날 저녁때였다. 중국식 뷔페를 가는 날인데, 교수가 입구에 서더니 냄새가 느끼하고 역해서 안 들어가겠단다. 학생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쭉 서서 기다리는데 왜 이런 데를 데리고 오냐며 내게 심하게 뭐라 한다. 하지만, 그 식당은 나름 평이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뷔페이니 만큼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먹으면 된다.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데, 오히려 언성을 높이며 한국 사람이 오는 연수에 왜 이런 싸구려 중국인 식당을 정했냐고 한다. 그러더니 '중간에 얼마나 받는지 몰라도'라는 말을 했다. 현지 식당과 짜고 커미션을 받는다고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기가 막혔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 들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런 일은 당연히 없고, 여기는 평이 괜찮은 곳이라 예약한 거라고, 자꾸 이러시는데 여기를 안 가면 어디서 저녁을 먹을 것이며, 학생들은 어떡하냐고 되물었다. 지지 않고 맞서는 내 태도를 교수가 잠시 노려 보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그러더니 우리 회사 부서장님에게 국제 전화를 건다.


내 앞에서 내 상사와 통화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 연수가  아주 형편없다고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다. 음식도 별로고 제대로 된 게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그러면서 지금 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테니 연수 비용을 모두 환불해 달라고 한다. 내 얼굴이 하얘지는 게 느껴졌다. 이거 장난 아니구나 싶었다. 교수가 전화기를 내게 내밀더니 부서장님이 나를 바꾸라 했다면서 받으라 한다. 부서장님은 이 연수를 수도 없이 경험한 분이다. 떨리는 마음 그대로 전화기를 넘겨받으니 수화기 너머로 조용히 다독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분 잘 맞춰 드리라고, 이렇게 조금만 더 통화하면서 혼나는 척 하다가 폰 다시 넘기라고,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해 주신다. "아 네..", "네.." 하고 대답하는 나를 교수가 팔짱을 낀 채 내리 깔듯 쳐다본다.


통화 후 다시 전화기를 돌려주니 둘이 다시 한참을 통화한다. 아마 부서장님이 뭔가를 설득하는 것 같다. 마침내 전화를 끊은 교수는 주눅이 들어 마냥 기다리던 학생들을 향해 말한다.


"일단 들어는 가는데, 먹기 싫은 사람은 안 먹어도 돼."


배고픈 학생들이 주욱 줄지어 들어간다. 들어가 보니, 당연히 맛있다. 이것저것 배부르게 먹는 학생들이 흘끔흘끔 교수의 눈치를 본다. 교수는 깨작거리며 뭘 좀 먹긴 하는데 여전히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교수를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MRI 장비를 파느라 3개월을 접대했던 그 고객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떤 분야에서 만큼은 전문가라는 것, 그리고 항상 자기를 떠받들듯이 대하는 그룹 안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즉 자기 영역에서 만큼은 견제받는 것 없이 왕처럼 지내는 사람들이다. 모든 선택의 기준에 오직 자기가 있고 결국은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하는데 이에 대해 뭐라 할 수 없게끔 분위기를 만든다. 


남은 일정 내내 나는 특히 더 조심하며 식당 안내와 교통편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만일 내가 인솔했다면, 아 저기서 한번 크게 웃을 텐데, 아 저기서 감동받을 텐데 하는 포인트 들을 죄다 교수의 무미건조하고 뜬금없는 설명으로 대신하는 게 안타까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생각보다 이동이 많은 일정, 학교에서 강의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설명, 특히 때마다 대놓고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는 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학생들은 점점 주눅이 들어 제대로 배우지도 즐기지도 못하며 흥미를 잃어 가는 듯했다. 첫날, 소풍 가듯 왁자지껄하던 학생들의 분위기는 이내 축축 쳐져서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무언의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마지막 헤어지는 날, 학생들의 모습은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내가 함께 다녀온 연수 중 최악의 분위기였고, 연수에 대한 설문 평가 결과도 최악이었다.  


다른 컨설팅 회사가 마음에 안 들어 이리로 왔지만, 여기도 연수 준비가 형편없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던 교수와 헤어지고 나니, 일주일이 아니라 몇 개월짜리 연수를 끝낸 듯 피곤해져 있다. 교수의 말대로 그건 최악의 연수였다. 하지만 그게 바로 교수 자신 때문이라는 건 끝까지 모르는 듯했다.




지식은 우리에게 생각과 이해의 통찰력을 더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공부와 지식이 사람됨이나 지혜를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걸 계속해서 보고 듣고 느낀다.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했던 교수도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주장한다면 대놓고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과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이분이 내내 느끼게 해 주었다. 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나의 모든 판단과 행동 기준이 '내 이기심을 채워주는지'의 여부로 귀결된다면, 그 지식은 내게 득인가 실인가.


조금씩 지식이 쌓일 때마다, 어쩌면 교만한 마음도 조금씩 쌓여 가는 중인지 모른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중간 과정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문득 돌아보면 어느덧 교만과 오만의 맨 끝에 다다른 나를 만날지 모른다. 그래서 내 눈이, 내 발걸음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비록 느릴지라도 움직이듯 보이지 않더라도, 미래의 어느 순간 깜짝 놀라 내가 어디 있는지를 돌아보는 날이, 반드시 온다.




기다리던 메일이 왔다. 하라 교수님에게서 온 메일이다.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며,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알려준 시간에 전화를 했다. 이분과는 처음 대화하는 지라 긴장이 되었지만, 하라 교수님은 와카츠키 교수와는 말투부터 확연히 달랐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와카츠키 교수가 조상에게 혹시 그사이 연락을 했나요?"

"네, 며칠 전 바로 메일이 오더니 '친일파를 위한 변명'책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냈나요?"

"네 보냈습니다만..."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하라 교수가 말한다.

"알겠습니다. 조상, 잠깐 시간을 내어 일본에 들어와 주시겠어요? 0월 0일, 0시에 시간이 어떤가요?"


그날이 무슨 날이기에 오라 하는지 궁금해하며, 얼른 내 스케줄을 체크했다. 별 일 없는 날이다.

"아, 네 그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하라 교수에게서 놀라운 답변을 듣는다.

 

"그날은 와카츠키 교수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날입니다."

"네??"


재판이라니? 나의 놀라움에 하라 교수가 설명을 덧붙인다.



"와카츠키 교수는 조상이 없는 사이 새로 들어온 대학원생에게 '직위를 남용한 학내 괴롭힘'으로 고소를 당했어요. 진상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하던 중에 한국에 가있는 조태호 학생도 피해자일 가능성을 발견했고 그래서 제가 지난번 연락한 것이지요. 재판이 열리는 날 오셔서 조상이 당한 이야기를 증언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 그때 내 자리를 쓰고 있던 그 모르는 학생이? 일본에서, 학생이 교수를 고소했다니!! 그 학생은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가슴이 떨리는 걸 진정할 수 없었다.

그럼 이 기다림도 끝이 나는 건가? 하지만...

지도교수가 징계를 받으면, 그의 학생인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도대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던 그 혼란한 시간,

하지만 단 한 가지 외침 만은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날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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