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태호 Apr 02. 2019

지금과 예전의 차이가 있는가

3-1. 재판


하라 교수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누구도 인솔할 필요 없는 비행이 오랜만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상상해 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 당장 오늘 하라 교수를 만나면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딛는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문득 처음 공부를 하기 위해 막연히 일본으로 향하던 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잘 되길' 바래서 선택한 유학이었다. 그런데, '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왜 어떤 상황에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막연히 길을 나선 대가는, 길고 혹독했다. 더 가혹한 건, 고난을 겪는다 해도 상황을 꿰뚫어 보는 전지전능한 통찰력 같은 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다. 처음 유학을 떠나던 때나, 많은 일들을 겪고 난 지금이나, 여전히 내 앞에 무슨 일이 생길지 한치를 내다볼 수 없다. 


그때와 지금,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해, 발견하고, 앞으로 내딛고, 스스로와 경쟁하는 것의 의미를 알게 해 준 시간을 보냈다. 내 안의 것들이 빛나면서도 겸손한 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모든 것들의 시작은 바로 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졌을지 모르는 모습으로 두 번째 여정에 오른 나, 

하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은 길이 놓여 있음을, 그 비행기 안에선 미처 알지 못했다. 



3-1. 재판



오랜만에 찾은 학교다. 그사이 김포-하네다 편이 생겨 인천-나리타를 이용하던 예전보다 훨씬 빨리 학교에 올 수 있는데, 이렇게 다시 찾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이메일로 알려준 하라 교수실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같은 학교지만 다른 교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기분이다. 교수실 앞에 서서 똑똑 문을 두드리니 처음 듣는 하라 교수의 목소리가 안쪽에서부터 들린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했다. 반백의 머리가 정갈하게 빗겨진 하라 교수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배어 있어 편안한 인상이었다. 체구가 작았지만 바른 자세로 앉아 내게 자리를 권하는 모습에서 오랜 기간 학생을 대해 온 기품이 느껴졌다. 


"먼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라 교수는 일어서더니 교수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미리 데워 놓은 찻 물을 내린다. 뜨거운 찻잔을 직접 내 앞에 들고 와 놓아 주는데 싱그러운 차 향이 긴장을 조금 풀어 주는 듯했다.


“어디에 묵을지는 정했나요?”


“아뇨 아직...”


재판은 내일이고, 나는 하루 전에 왔다. 재판이 끝나면 하루 더 머물다가는 2박 3일 일정이다. 

근처 좋은 곳에서 묵으라며, 하얀 봉투를 내민다. 내 이름이 써진 봉투에는 항공비를 정산한 것과 넉넉한 숙박비가 현금으로 담겨 있었다. 학교에서 주는 거라고 했다. 돈이 없어 목욕탕에서 노숙자들과 지내던 지난 방문이 떠올랐다. 


그제야 나를 부른 이유를 천천히 설명해 준다. 너무 궁금했던 바다. 도대체 연구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전화로 이야기했지만, 와카츠키 교수 연구실로 최근에 들어온 학생이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 학생이 그만두면서 학교에 투서를 보낸 게 발단이지요."


"투서를요?…"


"네, 그 투서는 와카츠키 교수가 행한 여러 괴롭힘 사례들이 나와 있었는데, 특히 이 학생은 와카츠키 교수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폭행? 그것도 심하게? 궁금했던 이야기를 듣는 순간인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라 입이 벌어진다. 아.. 때릴 수도 있었구나. 맞지는 않았으니, 나는 그나마 다행인 건가.


"그 학생, 혹시 외국인 유학생인가요?"

난 이게 제일 먼저 궁금했다.


"아니오, 일본인 학생입니다."


그제야 스치는 생각이 있다. 연구실의 선배들, 그럼 그들도 다 이런 일을 겪으며 그 자리를 버티고 있던 건가? 


"그 투서로 인해 진상 조사를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제가 위원회 대표 격을 맡게 되어 이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어요. 내일 재판은 관련 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날이지요. 조태호상은 내일 정해진 시간에 나와 본인이 겪은 이야기를 증언해 주면 됩니다."


하라 교수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후 교수실을 나섰다. 

교수실 나와 문을 닫고 복도에 잠시 멍하니 서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군대 같은 연구실 분위기, 나 빼곤 전원 일본인 남학생으로 구성된 인원, 이 연구실 출신의 조교, 무섭고 엄격하지만 교수에 대한 두려움이 보이던 선배들… 만일 여기에 폭군으로 군림하던 와카츠키 교수의 폭력을 집어넣으면 아귀가 맞는다. 나는 도대체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어떤 곳으로 흘러들어 갔던 것인가. 


"조상.."


복도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다. 흠칫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짧은 스포츠머리, 웃는 건지 무표정인지 모를 그 특유의 표정, 다나카상이 거기 서 있었다. 


처음 일본에 도착하던 날 학교 앞 역으로 나를 맞으러 나왔던 다나카상, 그는 내가 일본에서 처음 만난 일본인이자 내 바로 위 선배, 즉 내가 오기 전까지 연구실 막내였던 사람이다. 제일 윗 선배부터 집에 가야 하는 불문율로 인해 매번 나와 둘이 제일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있던 사람, 나보다 나이가 많이 어려 선배라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 같던 사람, 내 일본어를 틈틈이 교정해 주던, 알고 보면 쾌활하고 따듯한 마음을 가진 그가 하라 교수실 앞 복도에서 뜬금없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내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와카츠키 교수가 보내서 온 건지 궁금함이 앞섰지만, 일단은 오랜만에 보는 그가 너무 반가웠다. 


"다나카상!"


가서 인사하니 다나카상도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조상, 오랜만이에요, 한국에서 잘 지냈지요?"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복도 끝 휴게실로 옮기며 대화를 이어간다. 계속 이야기해 오던 사람처럼 친근했다. 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다나카상, 연구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 연구는 누군가 계속하고는 있나요? 제가 매주 교수에게 리포트 보내는 건 알고 있었어요? 협찬해 주기로 한 그 회사가 컴퓨터는 사 주었나요?"


여러 가지 질문에, 다나카상은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답을 하지 못한다.


"에... 에... 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요.." 


말 끝을 흐리며 다나카상은 답변 대신 그동안 나는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연구는 어떤지, 딸은 잘 크는지 등을 묻는다. 나는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비로소  다나카상이 내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이제 한 6년 남았네요. 와카츠키 교수님이 정년 퇴임하실 때까지.. 교수님이 계속 계셔야 모두 무사히 학위를 받고 나갈 수 있을 텐데요.."


이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다. 좋든 싫든 와카츠키 교수가 있어야 이들이 모두 공부를 끝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의대와 치대로만 구성된 이 대학 특성상 하나뿐인 의공학 교실이 갑자기 해체되면 이들은 갈 곳이 없다. 게다가 어느 교수의 제자인지를 중요하게 따지는 일본 학계의 특성상, 만일 교수가 파면이라도 되면 제자들 역시 자신의 커리어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그의 이 말로 인해 내가 속으로 정말 놀란 건 따로 있다. 내가 당한 일을 증언하면 교수는 파면되고 연구실이 해체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내일 하게 될 증언이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있는 건가? 


잠시 그렇게 대화를 나눈 뒤, 연구실로 돌아가는 그와 헤어졌고, 나는 학교 부근의 호텔로 향했다. 하라 교수 말대로 좋은 호텔을 잡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내가 당한 일을 증언하러 온 건데, 이것이 다른 선배들의 학위 여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느라 제대로 못 자고 불편하게 첫날의 밤을 지냈다. 


다음날, 정해진 시간을 기다려 조금 일찍 학교로 향했다. 재판이 열린다고 알려준 곳은 학교 본관에 위치한 어느 세미나실이었다. 아직까지도 갈피를 못 잡고 땅바닥을 쳐다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세미나실 앞 복도에서 누군가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연구실의 우에노상이다. 토호쿠 지역의 좋은 의대에 입학했지만, 수련의 도중 적성이 안 맞아 이쪽으로 와 의공학 연구를 시작한 사람. 내가 이곳에서 공부하던 2년간 많은 의지가 되던 사람이다. 어떻게 공부하면 그리 해박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내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대답해 주던 사람이었고, 나이도 우리 중 제일 많아서, 최고참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리더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교수가 나의 장학금을 끊어 휴학을 하기 직전,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나를 염려해 주었던 기억도 났다. 


내게 악수를 청한다. 하필이면 재판장 앞에서 그 시간에 마주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유야 무엇이든, 일단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악수를 나누며 우에노상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런데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다짐하듯, 내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더니, "자, 그럼.." 이 한마디를 하고는 반대편 쪽으로 사라진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서는 고참 선배의 여운이 어제의 다나카상보다 훨씬 컸다. 뭔가 잘못되면 우에노상도 어려움을 당하게 될 테다. 우에노상, 다나카상 뿐 아니라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제 상황은 내 응어리를 풀 것인가, 연구실을 지킬 것인가 이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시간이 되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재판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가니 조용한 가운데 예닐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자리를 안내해 주어 앉았다. 누가 와 있는 건지 둘러보니, 하라 교수가 제일 먼저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홈페이지 인사말이나 학내 매거진에서 봤던 얼굴, 대학원장이라는 걸 잠시 후에 깨달았다. 이미 만났던 사람들도 몇몇 있었는데 내 박사과정 입학시험의 면접관이었던 학장급 교수들이다. 분위기는 엄숙했다. 나는 아직도 마음을 못 정해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왔다.  


이때 문이 열리더니 와카츠키 교수가 들어온다. 처음 보는 깔끔한 옷을 입고 있다. 떡이 져서 늘 뭉쳐 있던 머리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저렇게 단정하게 될 수도 있는 머리였다니 하는 생각이 든다. 옆에는 두꺼운 가방을 들고 있는 조교가 따라온다. 그들 역시 정해진 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진행은 하라 교수가 했다. 재판이 지금 시작된 게 아니라, 앞서서 한참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었고, 내가 올 동안 잠시 휴정한 채 나를 기다린 모양이다. 하라 교수가 알려준 시간은 재판의 시작시간이 아니라, 재판 중 내가 증언을 하는 시간이었다. 이렇다 보니 앞서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분위기 파악은커녕 오랜만에 본 학교의 높은 사람들로 인해 주눅이 든 채로 앉아 있는 중이다. 하라 교수가 내 소개를 잠시 하더니 이윽고 나를 향해 말한다.  


"이제 조태호 상이 증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말문이 막혀 더듬더듬거리다 내가 한국에서 온 경위와 내가 했던 연구 테마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석사 인증 시험과 박사과정 입학시험 합격한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내 입학을 결정한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합격한 이야기를 도대체 왜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말문이 더욱 꼬이던 참이다.  


"조태호 상은 지금 한국에 가 있지요? 어째서 지금 한국에 가게 되었고, 무슨 이유인지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변죽만 울리고 있는 내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뭐라고 해야 하지.. 


어제부터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머리를 깎고 항의하던 일, 한국으로 돌아가던 일, 적성에 안 맞는 영업을 하다 엄동설한에 죽을 뻔했던 일, 그리고 노숙자와 잠을 자며 연구계획서를 만들던 일.. 오지 않는 답변을 홀로 기다리던 그 길고 긴 날들..


내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 시간들, 

어릴 적부터 만들어진 고정관념을 발견하고, 

내 이면에 있던 그 연약한 자존감을 발견하던 날들..


수많은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며 내 안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어제보다 진정으로 나은 내가 되기로 다짐했던 일..


잠시 그렇게 침묵이 흐르는 동안, 이상하게 오히려 점점 마음이 평안해 짐을 느꼈다. 

침묵을 깨고,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두 저의 탓입니다."


죽은 듯 고요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발언을 이어간다. 


"와카츠키 교수실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훌륭한 선배들, 꽉 짜인 학습 분위기 속에서 단지 학습 이상의 많은 것들을 익혔습니다. 모든 것은 다 제가 부족해 생긴 일입니다... 이상입니다."


모든 것을 뒤로 한채 나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만 말했다. 


하라 교수가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나는 내 앞 책상을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하라 교수가 진행을 이어갔다. 나는 내 순서가 끝난 줄 알고 일어설 준비 했다. 그런데, 내 발언에 이어 와카츠키 교수의 소명 발언 시간이 있는 줄 몰랐다. 난 이어지는 와카츠키 교수의 발언을 듣고 나서 퇴장해야 했다. 


이제 와카츠키 교수가 발언을 하려 한다. 그 순간, 나도 궁금해졌다. 모든 일들을 알고 있고, 나의 답변까지도 들은 와카츠키 교수는 과연 뭐라고 답을 할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 들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조태호의 퇴학처분을 바랍니다."




이전 11화 그날은 반드시 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