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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호 Apr 03. 2019

보이지 않는다고 길이 끝난 게 아니므로

3-2. 뜻밖의 이야기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사실 내가 있든 없든 원래 세상은 잘 돌아갔다. 그렇다면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할 것도 없다. 원래부터 있던 세상 입장에서 보면 잠시 있다 갈 나 하나에게 특별히 호의를 가지고 잘 대해 줄 이유가 없다.


괴로워한다고 해서 바뀔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지금이 막다른 길 같고 모든 게 결정된 것 같아도 사실 그렇지 않다. 다른 시간에 다른 시선으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시간, 그 일을 놓고 최선을 다했는지, 나의 진심이었는지를 보면 된다. 그리고 장차 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다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끝난 게 아니다. 






3-2. 뜻밖의 이야기


"조태호의 퇴학처분을 바랍니다."


와카츠키 교수의 발언과 함께, 조교가 가지고 온 두꺼운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려놓는다. 그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는데 두께가 20cm는 되어 보이는 엄청난 서류뭉치 들이다. 와카츠키 교수가 말을 잇는다. 



"이건 조태호에 대한 자료입니다."


뭐를 가져온 거지? 



"에… 그러니까 '문과'.. 를 전공한 조태호는, 의학이든 공학이든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인데, 본인이 한국에서 간곡히 요청을 해와서 어쩔 수 없이 잠깐 공부할 기회를 준 적이 있습니다." 


내가 간곡히 요청을? 


"그런데 은혜를 모르고 2005년 4월에 있었던 학회를 조태호가 무단이탈하여,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었고, 더 이상 학업에 뜻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무.. 무슨 말을.. 



"그리하여, 나는 메일로 자퇴를 권고했고, 지금까지 이에 대한 아무런 응답이 없기에 자퇴한 학생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동안 한국에 있었나요? 제가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디 다른 곳에 불법 취업을 하고 있었나 했거든요. 이렇게 다시 보니 놀라울 뿐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그동안 내가 지도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듣고 있자니 점점 기가 막힌다. 와카츠키 교수의 말투가 점점 연구실에서 많이 듣던 중얼거리는 투로 변해 간다. 


"여기서 조태호가 했다는 연구들도 다 뭐 그저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나마 내가 돌봐 주어서 학회에 포스터 발표를 하게 된 것인데.. '행방불명'이 되어가지고..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지가 약한 사람을 열심히 지도해서 가까스로 입학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미 자퇴한 바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 조태호의 퇴학을.."


의장 역할을 하던 대학원장이 마침내 이야기한다. 


"우리가 판단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을 다 들은 듯하네요. 둘 다 퇴장해도 좋습니다. "


보여주지도 않을 '조태호 관련 서류' 묶음을 조교가 다시 가방에 쑤셔 넣는다. 와카츠키 교수와 함께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젠 뭘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은 저 서류는 대체 뭐지? 였다. 하라교수가 내게 이야기하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든다. 


"조태호상, 오늘은 일단 가도 되겠습니다. 내일 아침 돌아가기 전, 제 연구실에 다시 들리도록 하세요."


그제서야 억울한 마음이 물컹물컹 솟아 항변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장내는 벌써 어수선해져 있다. 발언의 기회는 이미 다 지나갔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일어나 재판장을 나왔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조금씩 후회가 밀려온다. 아무 생각도, 준비도 없이 그 자리에 나간 내가 바보처럼 농락당하고 버려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그런 특별한 자리에서 내가 한 말이 고작 '모두가 내 탓'이라니.. 내가 무슨 성인군자라도 되나? 다나카상, 우에노상을 위해 희생하면 그들이 내게 학위라도 줄 줄 알았나?


생각이 점점 깊게 골을 파더니 호텔로 돌아와서는 결국 머리를 쥐어뜯고 만다. 내가 왜 그랬을까. 가는 길이 올바른지를 점검하고 그 길이 맞다면 언젠가 연구실에 복귀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내게 이리도 호의적이지 않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당당하다면 끝까지 해보자며, 언젠가 내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 여기던 모든 게 어린애 같은 기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위안부 이야기에 발끈하며 머리를 깎던 순간부터 와카츠키 교수는 이미 나를 내쳤다. 생각해 보니, 그는 계속해서 이 결정을 알렸다. 장학금 중단에서부터, 자퇴 종용, 지난번 방문의 냉대, 그리고 답을 하지 않던 긴 시간 동안 와카츠키 교수는 일관되게 한 가지 답을 보냈다. 나 혼자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거다.  


잠 못 이루던 그날 밤을 다 새우고 나서야 결국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공부를 원래 하려던 것도 아니었지. 

어쩌다 시작하게 된 유학, 다 잊고 한국 돌아가서, 그냥 지금처럼 살자.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는데,  하라 교수가 돌아가기 전에 잠시 들리라고 한 게 떠올랐다. 만나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하라 교수도 기대하는 게 있어서 여기까지 불렀을 텐데, 어제 그렇게 밖에 발언을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공항으로 향하던 길에 다시 한번 학교를 찾았다. 그간의 모든 것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마음으로 하라 교수실 문을 두드렸다. 



하라 교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처음 보았을 때처럼 차를 타 주는데 역시 향이 향기롭다. 호텔은 괜찮았는지, 지내는 동안 불편은 없었는지를 물어본다. 예의를 다해 답을 하면서, 내가 하려던 말을 했다.


"교수님, 여기까지 불러 주셨는데 제가 어제 증언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라 교수는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짓는 듯했다. 

차 향기를 맡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걱정 마세요, 이미 우리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네?"


"그동안 와카츠키 교수 연구실에 대한 여러 가지 조사를 진행해 왔어요. 당신이 지난번 보내온 자료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와카츠키 교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느 정도 파악된 상황입니다."


"아.." 


"당신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인상적이었어요. 와카츠키 교수는 자기 학생이 한국에 가 있는 상황에 대하여 서면으로 이미 변론을 했습니다. 어제 그가 이야기한 건 우리에게 사전에 제출했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요."


"그러면,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도 다 알고 계신 거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바뀌는 걸 느꼈다. 


"어제 일어난 일은 그 자체로 연구실 안에서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느낀 그대로, 모두들 함께 느꼈을 겁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던 하라 교수님이 자세를 바로 잡는다. 


"조태호상, 그동안 겪었을 모든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제가 대신하여 사과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하라 교수님이 갑자기 내게 머리를 숙이며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사과를 하고 있다.  


"아, 아뇨...  감.. 감사합니다..." 


나도 덩달아 머리를 숙였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하라 교수님의 말과 표정, 태도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 진실을 알아주었다는 위로가 마음 한편에 차오른다. 일본에는 이런 교수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감사의 인사에 하라 교수님이 또다시 미소 지으며 가만히 찻잔을 본다. 

그러더니 의외의 질문을 던진다. 


"조태호상,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네?? 아... 물론..."


"그럼, 내 연구실에 와서 공부해 볼래요?"


내 눈이 점점 동그래진다. 하라 교수님이 설명을 이어간다.



"저는 생화학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야 할 때가 있어요. 이 분야 연구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연구를 하면 어울리겠네요. 어제 돌아간 후,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내가 당신의 새로운 지도교수가 되는 것을 제안했어요. 거기 있던 모두가 이에 동의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선택하면 됩니다."







원래 세상은 그렇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원망할 건 없다. 내가 최선을 다했고, 그게 나의 진심이라면, 

장차 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다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끝난 게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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