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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호 May 19. 2019

세상은 이미 행복하다

3-4. 이렇게 좋은 날


조금 전 그랬다. 편안한 곳은 위험하니, 진정한 안전을 위해 변화를 선택하라고.


그런데

결국 다 를 위함 아닌가.


그 '위험'과 '안전'의 차이는 누가 정하는지. 만일,


내가 편안한 그곳에 있기로 하고, 다가올 '위험'까지도 내 선택의 범주에 놓는다면,

그것은 위험인가. 아니면, 결국 지나갈, 내 삶의 일부인가.


왜 굳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며,

왜 힘들여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지.



따지고 싶지 않은가?






3-4. 이렇게 좋은 날



호주인 그레함 스타인스 씨는 젊은 시절 나병(한센병) 환자를 돕는 훈련과정을 자원해서 마쳤다. 간호사이던 아내와 함께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에 들어가 나병환자를 돕는 봉사를 하며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가 찾은 곳은 인도의 오릿사라는 지역이다. 너무도 가난해서 전염병과 영양실조가 만연한 곳, 의료시설도 열악한 곳에서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나병환자들을 본 그레함 씨는 이곳에 남아 이들을 평생 돕기로 작정한다. 지금부터 전할 이야기는 그레함 씨가 가난한 인도의 변두리, 오릿사에서 14년째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어느 날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관해서다.


그날도 온종일 나병 환자들을 돌본 그레함 씨는 두 아들, 필립(10), 티모시(7)와 함께 차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무언가 소란한 분위기에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눈을 뜬 그레함 씨는 건장한 인도 청년들이 자신의 차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보았다. 화가 나 보이는 젊은 청년들의 손에는 각각 커다란 각목과 몽둥이가 들려 있다. 그리고 역한 휘발유 냄새가 났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차 문을 여는 순간 사방에서 무섭게 몽둥이가 날아온다. 위험을 직감한 그레함 씨는 차 문을 닫고 필립과 티모시를 품에 꼭 껴안는다. 아직 어린 티모시가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누군가 차에 불을 붙인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듯 화염이 차를 휘감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이 꺼진 차의 문을 열어보니, 서로 꼭 껴안은 채, 불에 새카맣게 탄 세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레함 씨는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이 평생을 봉사하고 헌신하던 곳에서 그렇게 어이없이 살해되었다. 1999년 인도의 오릿사에서 일어난 '그레함 씨 일가족 살인 사건'이다.


이 청년들은 왜, 

일평생 나환자들을 돌보던 선량한 그레함 씨와, 그의 어린 아들들을 죽였나?


그리고, 나는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레함 씨가 죽은 이유는 그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다.

이 인도 청년들은 강경파 힌두교도 들이었다.


이날 이 청년들은 마을의 전통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식 축가로 누군가가 찬송가를 부른 것이 이들을 화나게 했다.  


기독교가 자신의 삶을 방해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는다고 느낀 힌두교 청년들은 돌아오는 길에 분풀이 대상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타깃이 된 게 바로 노란 머리의 그레함 씨와 두 아들이었다.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사건을 일으킨 청년 무리의 우두머리는 ‘다나 싱’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건이 알려지자 다나 싱은 살인죄로 처벌을 받기는커녕, 강경파 힌두교도들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오릿사 지역의 크리스천들을 상대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크리스천이라면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교회에 폭탄을 터트리는 광풍이 분다. 이 살인의 광기는 오릿사를 넘어 타 지역으로 번지며, 인도 내의 크리스천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어찌 이리 잘 알고 있는가?

나도 그때 인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벵갈루루란 곳으로 출장을 나가 있던 중이었다. 3개월 일정이라 평소에 하던 대로 일요일에 교회를 찾아간 건데 거기서 그레함 씨 살인 사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바로 옆 마을 교회에서 예배 중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져 여러 명이 다치고 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알고 보니 내가 출장 간 벵갈루루 지역도 힌두교도들이 대다수인 지역이었다.


일하러 갔다가 나도 모르게 목숨 걸고 예배드리는 상황이 된 거다. 일본 유학 훨씬 전, 2000년 봄의 일이다. 두려움이 많던 이십 대의 내가 폭탄이 있을지도 모르는 쓰레기통을 흘끔거리며 생애 가장 '무서운' 예배를 드렸다.


인도에서의 일정은 처음부터 힘이 들었었다. 팀원들과의 관계도 어려웠고, 현지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것들도 적응이 안되었다. 힘든 환경을 피해 일요일 만이라도 교회를 나가고 싶은 나의 바람은 그래서 신앙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피할 곳을 찾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교회에 앉아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이 상황은 전혀 예상했던 게 아니다.   




여덟 살 무렵, 나는 처음 교회를 나갔다. 그날 교회에 왜 갔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보통 크리스마스 같은 행사에 친구 따라 처음 교회를 오곤 한다는데, 나는 어느 날 혼자 뜬금없이 찾아왔단다. 아마도 일 나가신 할머니를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았었나 보다.


바라는 것 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이 가족의 사랑이라면,  어린 시절 내게 이 사랑을 지속적으로 주던 곳은 교회다. 물론 할머니가 눈물 날만큼 헌신적으로 날 키워 주셨고, 가끔씩 찾아오시던 아버지, 어머니와의 시간을 통해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너무 힘든 생활고를 겪던 할머니와, 자주 볼 수 없던 부모님으로부터 그 나이 또래에서 노출되어야 할 사랑과 정을 온전히 받는 건 무리였다.


교회 가면 사람들이 있고, 프로그램이 있고, 친구들이 있었다. 특히 내 사정을 아신 어느 집사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남몰래 내게 용돈을 주시며, 학교 수업료를 다 내주셨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날 따듯하게 대해 주셨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보았다. 교회는 내 가족이었고, 내가 성인이 되기까지 내가 엇나가지 않게끔 붙잡아 준 곳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만난 교회는 모든 것이 달랐다. 두려움, 절실함, 간절함, 그리고 비장함이 흐르는 곳이었다. 죽음이 바로 곁에 있는 곳, 무섭고 떨리는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것이, 내가 인도의 그 작은 교회를 3개월 내내 한 주도 빠짐없이 나갔다는 거다. 여기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아저씨의 공이 크다. 쓰레기통 폭탄 소리에 놀라 잔뜩 움츠린 거북목을 하고 경직되어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던 그분. 검게 그을린 얼굴의 그 아저씨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한 채, 겁에 질린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었다.



"쫄았어?"





쫄았다. 폭탄, 테러, 살인, 뉴스에서나 보던 이런 무시무시한 것들과 내 평생 처음 가까워진 순간이다. 쫄아서 겁에 질린 토끼 같은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고 있었을 거다.


참 이상한 건,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는 거다. 교회라고 해봐야 겨우 열명 남짓의 선교사들이 모이는 작은 모임, 누구도 주눅 들어 보이는 사람이 없다. 비장하고, 두려운 건 오직 나뿐이었다.  


이들의 평온함은, 일하는 게 힘들고 사람들 관계가 어려워서 그곳을 찾은 내 어려움과 내 사정들을 일순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분들과 만나고 있으니, 내가 처한 처지가 뭐라고 힘들어 하나..라는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3개월 동안 매주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매번 그들로부터 남몰래 조금씩 '이기적인'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그렇게 정해진 3개월을 다 채워가던 어느 날이다.


다행히 지난 3개월간 쓰레기통에 폭탄은 없었다. 내가 있던 벵갈루루는 그나마 온건파 힌두교도들이 많아 더 이상의 위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오릿사 소식만큼은 날로 비참하게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교회를 다닌 다는 이유로 맞아 죽고 불에 타 죽는 일이 생기고 있었다. 현대 시대, 바로 내 곁에서 믿을 수 없는 살육이 벌어지는 중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예배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맛난 점심을 먹고 다과를 하던 중, 늘 즐겁게 분위기를 이끌던 ‘쫄았어’ 아저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을 지금도 난 잊지 못한다.


"아 참, 저 내일 오릿사 들어가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일순 가라앉는다. 나는 놀라서 속으로 물었다. 오릿사를 간다고? 왜?


"도와줘야지요. 뭐든.. "


누구도 그리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자원해서 그곳에 숨어있는 크리스천 인도인들을 도우러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잠시 가는 게 아니라 계속 그들 곁에 있을 생각이란다.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출발하기 바로 전날 이를 알리는 중이다.  


"오릿사라면.. 너무 위험한데...."


누군가 이 말을 한 뒤, 침묵이 흐른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거기를 기독교 선교사의 이름으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걸.


"우리 같이 가요.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어떤 분이 말끝을 흐린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 눈앞에 멀쩡하게 살아 숨 쉬는 이 사람이, 이제 곧 죽는다고..?

우리에게 걱정 말라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이제 얼마 후면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니...


어디선가부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한 두 사람씩 일어나 이분 주위를 둘러싼다.

팔을 한번 만져 보고, 어깨를 한번 잡아 본다.

참았던 울음이 결국 폭발하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기적인 위로를 구하며 그 자리에 있던 나, 

그런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데, 멈추질 않는다.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눈물을 닦고는 옆에 놓인 기타를 집어 든다.


"이거 왜들 이래. 먼길 가신다는데 우리 늘 하던 찬양 합시다." 그러면서, 찬양 한 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때 다 함께 불렀던 찬양이

'이렇게 좋은 날'이란 찬양이다.


이렇게 좋은 날,

아름다운 우리의 만남을 기뻐합니다.


때론 슬플 때도 있고,

견디기 힘든 때도 있겠지만,

우리 예수님 당신과 함께 늘 동행하세요.

"


눈물 흘리며 이 찬양을 부르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주저앉았다. 그리곤 내 안에서부터 알 수 없는 울음이 터지는데, 그렇게 목놓아 울어본 적이 없다. 한참을 그리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왜?

이분은 왜 가는 거지?


교회에 가면 편안하고, 가족 같고, 즐거웠던 나다. 교회 지붕이 피난처고 안식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리 쉽게 다녔던 교회는 사실 이런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곳이다.


1866년 기독교를 조선에 전하기 위해 최초로 도착한 토마스 선교사는 도착한 첫날 조선인들에게 목이 베어 죽는다. 하지만, 그가 죽기 직전 필사적으로 건넨 성경책이 조선땅에서 최초의 신도를 만들었고, 그 성경이 훗날 기독교 대부흥을 이끈 평양 장대현 교회를 만든다. 나를 엇나가지 않게 지켜준 울타리, 내 유년시절을 즐거운 추억들로 채워준 교회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런 사람이 목숨을 버려가며 만든 거다. 백오십 년 전 조선에서 일어나던 일을 내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난 정말 몰랐다.





이제, 다시 돌아와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작은 변화도 무서워, 한 치 앞을 내딛지 못하는 내가 여기 있다.  

하지만,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갈길을 내딛는 사람들이 동시대에 살고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물론 신앙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답변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겐 여전히 이해될 수 없을 뿐이므로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알아들을 수 있는 답을 달라고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그리 간절히 기도했던 듯하다. 


기도의 응답일까?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을 더 지난 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게 있다. 

바로 그 선택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  


'유한한 나'의 '정해진 잘됨'을 위한 선택이라면,

이런 선택은 할 수 없다.


나보다 큰 어떤 존재를 믿고 그쪽 방향을 향해 선택하는 것.

그게 다르다.


우리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그 끝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유한함을 향할 때다.


세상의 큼과

나의 작음,


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그 어떤 진리와

내가 지금까지 배운 지식의 조각,


내가 있든 없든 이미 행복한 세상과,

날 때부터 유한한 나.


이 두 가지를 구분하여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한계에 구속되지 않는 것.


아주 작은 발견이지만, 이 미세한 발견이 내 인생에 가져온 차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변화를 망설이는 것은, 많은 경우 그 불안함의 끝에 ‘내’가 있고, 우리가 그 ‘나’를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나의 완전하지 못함으로 인해 시작된다면, 

두려운 게 당연한 거다. 나는 완전하지 못하므로.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하나님이 되려던 아담의 이야기. 

이것이 가리키는 건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신이 되려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거다. 내가 신이 되어 버리면, 내가 무지한 어떠한 것 까지는 비전을 품을 수가 없다. 그 큰 영역이 내게 호의적이라는 믿음도 가질 수가 없다.


된다는 확신이 나를 내딛게 하고,

때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용기마저도 내게 하며,

그 믿음이 역사를 만든다.


내가 만든 울타리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큰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면,

선악과를 먹어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만든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고민에서 해방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보다 더 큰 세상, 그것을 움직이는 진리가 내 편이라는 확신 안에서는

어떠한 선택도 기쁨이다.



그러한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이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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