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선택, 그 후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지혜와,
이를 해내는 꾸준함과,
소망을 품고 기다리는 인내.
성장이란,
우리가 만나는 거의 모든 고난에 응답할 키워드가
이 세 가지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3-5. 선택, 그 후
하라 교수를 만나기 3일 전, 일찌감치 일본에 도착해 앞으로 지낼 곳부터 찾기 시작했다. 학교 기숙사에서만 살았던 터라 집을 구하는 건 처음이다.
도쿄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살인적인 도쿄의 물가'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주범이 바로 '주거 비용'이라는 점에 동의할 거다. 워낙 비싼 데다가 월세를 살려면 레이킨(礼金, 사례금), 시키킨(敷金, 보증금), 중개료 등 첫 월세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집주인에게 추가로 내야 하는 곳이 일본이다. 이 마저도 집주인이 싫다고 하면 못 들어간다. 외국인은 일본에서 집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한국에서 검색해 온 세 곳의 '쉐어 하우스'주소를 손에 꼭 쥐고 돌아다녔다. 첫 달 월세만 내면 추가 비용 없이 살 수 있다는 광고가 마음에 들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서, 공부하기 위해 상경한 젊은이들이 널찍한 집에 생기 발랄하게 모여사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그냥 한국의 '고시원'같은 곳이다.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나이 든 분들이 왔다 갔다 했다.
이곳저곳 가릴 처지는 아니다. 처음 간 곳은 모든 방이 꽉 찼다며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겠다고 했다.
두 번째 간 곳은 방이 있다며 따라 오란다. 관리인을 따라 빈 방을 확인하러 가는데 제발 저기 만은 아니길 바라던 방의 문을 연다. 공용 화장실 코앞에 있던 그 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여기가 제일 싼 방이라는 설명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 번째 쉐어 하우스를 찾아 나서는데, 이번엔 길이 좀 멀다. 한참을 전철로 이동하며, 학교 근처의 집을 '쉐어'하면서 쉽게 통학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었다. 도착해보니 시내 중심에서 좀 떨어져 있기에 가격은 적절했다. 주택가라 주변도 조용하다. 특히 빈방을 소개해 주는데 열자마자 창문으로 햇살이 비치는 게 보였다. 그 자리에서 그 방으로 정했다.
좁은 침대 옆에 자그마한 책상이 있고 밑에는 한 칸짜리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나가서 음료수를 좀 사 와 채워 넣고, 책상에 앉았다. 그동안 무수히 펼쳐 보았지만 진도가 안 나가던 '구조 생물학' 책부터 펼쳤다. 방의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느낌이 좋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는데, 이렇게 기분 좋게 공부를 한 적이 얼마만인가 싶다. 내가 좋아하는 편의점 녹차를 꺼내 마시며, 조금씩 다시 시작한 유학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새롭게 시작할 공부에 대한 설렘으로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아마도, 학교에서
와카츠키 교수를 다시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그날따라 그 선배가, 건물에 누가 들어오는지를 우연히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들어서는 걸 보고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가더니, 하라 교수실이 있는 층에서 갑자기 와카츠키 교수가 나타난 것도 물론 어쩌다 그랬을 수 있다.
아무튼, 등골이 오싹해졌던 건 하라 교수실이 있는 층에 내리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을 때다.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그 특유의 중얼거림,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와카츠키 교수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와카츠키 교수는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다고만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걸 보니 교수직을 잃을 정도의 중징계는 아닌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년 간은 좁은 캠퍼스 내에서 계속해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인 듯하다.
중얼거리며 내게 점점 다가오는데, 이 교수를 맨 처음 만났을 때의 기괴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이를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깨달은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하라 교수실로 옮겼다. 하라 교수실을 향해 걷는 내 뒤를 와카츠키 교수가 중얼거리며 따라오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뒤에서 어이! 하는 소리가 중얼거림 속에 섞여 있었던 것도 같다. 발걸음이 빨라지며 나를 따라잡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돌아서서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도대체 왜 나에게 오는 거지? 어찌할지를 몰라하던 그때였다. 하라 교수실의 문이 벌컥 열린다.
"조상, 도착했네요, 들어와요"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얼른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난 하라 교수, 나를 보호해 주는 보호자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새로운 지도교수와의 만남을 앞두고 이것저것 얘기할 거리가 많았었는데 순간 다 잊어버렸다. 와카츠키 교수의 중얼거림이 험난한 새 출발의 길을 예고하는 듯 뇌리에 남아 나를 멍하니 앉아 있게 했다.
그날 와카츠키 교수는 분명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그때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 후로는 신기할 만큼 한 번도 그와 마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본 건, 졸업을 위해 박사학위를 심사하던 자리에서였다. 지난 연구 실적을 조심스레 발표하던 날,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데 와카츠키 교수다. 오기로 되어 있던 명단에 없으므로 초대받고 온 게 아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랐지만, 진정시키며 내가 준비한 것들을 발표했다. 발표 내내 와카츠키 교수는 가만히 한쪽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몇 번인가 끄덕이던 것 같기도 하다. 발표 후 질의응답이 이어질 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 후 정년퇴임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날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가 궁금해지는 걸 보니, 혹시 내 안에 그로부터 듣고 싶은 어떤 말이라도 있었던 걸까. 만일 그가 내게 고생 많았다고, 미안했다고, 훌륭한 학자가 되라고, 첫 지도교수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들었으면 좋았을 그런 말들을 내게 해주었다면, 나는 그에게 뭐라고 대답했을까?
아무튼, 학교를 다시 찾은 이날은 학생으로서 하라 교수를 처음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하라 교수는 그의 학생들이 있는 실험실로 날 안내해 주었다.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이다. 군대 같던 와카츠키 연구실과는 확연히 다른 색채의 공간이다. 여러 실험 장비들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고, 흰가운을 걸친 연구원들이 왔다 갔다 했다. 분주해 보이면서도 고요하다. 교수가 왔다고 전원이 기립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자칫 서둘러 움직이다가 실험에 이상이 생기지 않게끔 정해진 룰이다. 교수가 다가가 말을 걸면 돌아보고 질문에 답을 하거나 상황을 보고 한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해 주는데 모두가 환한 얼굴로 따듯하게 나를 맞이해 준다.
새로 배정받은 책상에도 앉아 보았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연구실 안의 내 책상인가. 잠시 앉아 보는데 눈앞에 커다란 창문이 있다. 창문 너머로 도쿄돔이 보인다. 잠시 눈가에 눈물이 맺힐 뻔했다. 내 자리다. 정말 어렵게 되찾은 내 연구실 책상이다.
첫 학기는 하라 교수가 교내 장학생 신청을 해 주어 등록금을 안내도 되었다. 하지만 다음 학기까지 등록금을 마련하고, 앞으로의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묵직한 과제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수중의 돈이 떨어지기 전에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일본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먼저 입국관리소에서 '자격 외 활동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정해진 시간 내에서 일을 할 수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음식점 서빙 아르바이트 들이었는데, 일할수 있는 시간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한 달에 벌 수 있는 급여가 많지 않았다. 특히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야간에 일을 해야 하는데, 적당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점점 흐른다.
아빠가 먼저 가서 꼭 부르겠다고, 이제 어린이집 다니기 시작한 딸들에게 약속하고 왔는데, 아무리 다리품을 팔아도 쉐어하우스의 월세를 가까스로 낼 정도의 급여만 벌 수 있는 상황이다.
밤이 되면 가족이 그립고 사람이 그리워진다. 무사히 도착했다고 한국에 전화를 걸던 첫날밤, 옆방에서 시끄럽다고 벽을 두드리는 바람에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내가 놀란 건, 그 순간 벽이 얼마나 얇은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두꺼운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후로는 옷을 갈아입을 때 조차도 소리가 날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늘 밖으로 나와 아내, 아이들과 통화를 했는데, 마치고 나면 멍하니 계단에 조금 더 앉아,
캄캄한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곤 했다.
내가 만든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오는 것들..
사실 선택은 순식간이다. 선택 이후의 상황이 긴 거다.
때로는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길고, 어떨 때는 포기하고 싶을 만큼 길기도 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고, 때론 후회하며 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을 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기쁨으로 기다리는 것.
생각해 보면 그것 외에는 내가 할 게 없다.
화날 일도,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그저 '일'로 받아넘기고,
내 안의 자동 분류기, 고정관념을 뜯어고쳐가며 새로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그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먼저, 여기저기에 알렸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아르바이트가 필요하다며 내 상황을 설명했다.
소식이 들린 건 같은 대학의 한국인 후배로부터다. 교내의 몇 명 되지 않는 한국인들인지라 서로 챙겨주던 사람들 중 한 명이던 그 친구가 내 사정을 듣더니 이야기했다.
"선배, 학원에서 강의를 한번 해 볼래요?"
"응 무슨 강의? 컴퓨터? 아님... 플래시?"
"선배, 영문과 나왔잖아요."
"아...... 그렇지."
"초, 중고 학생에게 한국식으로 영어 문법을 가르칠 선생님을 구한대요."
일본에는 한국인들이 많다. 그중 주재원들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녀들이 돌아가서 다시 한국식 교육을 받을 상황에 대비하고 싶어 한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 초중고생을 위한 한국식 보습학원 시장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영어 문법이라면, 자신 있다. 고교시절 서울역 앞 대일학원, '성문 종합 영어' 인기 강의 수강권을 밤새워 끊어가며 따라다닌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난 학부시절 지루해 하긴 했어도 어째튼 고급 영문법, 영어 구조론을 훌륭히 이수한 영문과 졸업생이 아닌가. 대학 전공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학원을 찾아가 면접을 봤다.
그리고 시범 강의를 하던 날, 초등학교 5~6학년 친구들 몇 명이 쪼르륵 앉아 있는데 이 녀석들이 내 생명줄로 보였다. 한때 방송 강의도 했던 나다. 별의별 오버를 하며 아이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 테스트를 통해 아이들의 실력을 분석한 결과를 전문 컨설턴트들이 쓰는 화려한 양식을 활용해 출력했다. 바로 몇 달 전 회사에서 흔히들 쓰던 거다. 출력해 보니 내가 보기에도 근사하다. 학원장에게 보내어 학부모와의 면담 때 사용할 거라고 설명했다.
학원장은 대 만족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신주쿠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한국식 보습학원의 영문법 강사가 된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그 학원에서 가장 많은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강사와 학원이 수입을 일정 비율로 나누는 시스템 덕에, 생활비는 충분히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가족들도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는 말은, 두드려야 열린다는 말이다. 어떤 건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되지 않는다. 내가 문을 열어야 한다. 열면 문밖에 있던 소망이 내게 들어와 나와 함께 머문다. 이 당연한 진리가 '변화' 직후에 몰려오는 '두려움'에 의하여 흔히 가려진다.
때로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는 세상이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 나에게 손을 내밀고, 날 맞이할 때가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들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안의 것들을 보는 것뿐이다. 내 고정관념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나를 돌아보고, 소망을 잃지 않는 것. 결국 다시 이 두 가지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일본으로 와서 같이 살자고 했다.
아내가 직장을 정리하고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오기로 했다.
우리 가족의 두 번째 일본 체류가
이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