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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호 Apr 19. 2019

언제나 옳고 그때는 모르는

3-3. 다시 빨간 약

사람의 두뇌는 편안한 곳을, 안전한 곳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편안한 곳은 위험한 곳이다.

변화를 가로막고 그 자리에 머물게끔 정체시키다 결국 더 큰 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 수전 데이비드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심리학 교수)



3-3. 다시 빨간 약


기적처럼 학교에 복귀하는 길이 열린 것을 확인한 후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특히 하라 교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받은 따듯한 느낌은 그간의 어려움들이 일거에 무뎌질 만큼 인상적이었다. 단백질 구조 예측 연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고, 관련 서적들을 읽어보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획 첫 단계부터 중요한 문제를 만난다. 하라 교수가 제안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을 하지 않은 것은, 연구실 복귀를 한다고 해서 장학금을 다시 받는 게 아니라는 설명을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문부성 장학금은 어떤 이유로든 같은 사람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와 병행해 일본에서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을 마련해야 한다. 그 사이 둘째가 태어나 이제 네 명의 가족이 되다 보니, 쉽게 내릴 결정이 아니었다.


마침 연말이라 회사에서 전 직원 제주도 워크숍을 간다고 한다. 계약직 신분이기도 하고 많은 직원들과 오래 일한 사이도 아닌지라 서먹서먹했던 나도 참석은 했지만, 관망하듯 워크숍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지켰다. 그런데 워크숍의 하이라이트, 그 해 실적이 가장 우수한 직원에게 주는 "올해의 컨설턴트상" 주인공이 발표되는 세 번째 날 밤이었다. 무덤덤하게 앉아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만다. 수상자 중 한 명으로 뜻하지 않게 내 이름이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도요타 벤치마킹 연수가 잘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수십억 매출을 올린 부서가 수두룩한데, 계약직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채용되어 한국 일본만 오가던 내가 이 상을 받은 건 놀라움을 넘어서 파격적이라고들 했다. 부서장님이 환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준다. 부상으로 금강산 여행권과 상금도 받았다. 서울로 돌아와 그간 신세를 졌던 장인 장모님을 여행 보내 드리고, 상금은 본가 식구들과 집 근처 한정식집을 찾아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리는데 썼다. 그간 못했던 효도를 조금이나마 해드린 듯해서 속이 좀 후련했다.


얼마 후, 사장님이 나를 따로 부른다. 국내 1위의 탄탄한 컨설팅 기업,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 자리에 오른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이, 이 자리에서 내게 정규직을 제안했다. 이제 곧 벤치마킹 연수만을 따로 맡는 새로운 부서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과장급에 해당하는 선임 컨설턴트로 정식 채용할 테니 힘써 달란다. 며칠 후, 사내 조직 개편안이 발표되었는데 정말로 벤치마킹 연수를 전담하는 신규 부서인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가 생겼고 내 이름이 선임 컨설턴트라는 직함과 함께 들어가 있다.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러 들어온 곳인데, 정규직이 되었고 순식간에 신규 부서의 과장이 되었다. 단백질 구조 예측 공부하려고 구해 놓은 '구조생물학' 책은 진도가 나가지 질 않는데, 유학을 가지 않을 수많은 이유들이 쌓이고 있다.


일단 고민은 잠시 묻어 둔 채, 새롭게 탄생한 벤치마킹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고 다시 경제의 활력을 얻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자주 보도되던 시기다. 불황 극복 사례를 배우기 위한 연수 문의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이에 연수 인솔자의 '개인기'에 의지하다시피 했던 벤치마킹 시스템을 누가 진행해도 좋은 결과를 얻게끔 '표준화'하기 시작했다. 이 표준화 작업에 그동안 수십 번 보고 배운 도요타 방식(TPS)을 적용했고, 도요타 벤치마킹 연수가 도요타 방식으로 개선되고 있음을 또다시 홍보에 활용했다. 3개월쯤 뒤 글로벌 비즈니스 사업부는 누가 봐도 잘 돌아가게끔 외형도 내실도 다져졌다. 수익도 늘어나고 '정기적으로 해외 나가는 꿀보직 부서'라는 말을 들으며 사내 입지도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이 되었다. 4월이 내게 중요했던 이유는 일본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라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회사의 일원으로 남아 현실에 머무르는 길과, 잘 모르지만 가능성을 가진 유학의 길을 놓고 고민하는 상황, 얼핏 보면 매크로미디어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나던 예전과 닮아 있다. 하지만, 분명하고도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사이 많은 일을 겪은 내가 그때와는 달라져 있었다는 거다.


처음 일본에 갈 때, 결정은 내가 했지만, 실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쫓겨 다녔고, 내 안의 약한 자존감과 자동 분류기처럼 작동하던 고정관념이 내 결정을 대신했다. 이후의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유학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무모한 결정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지도 알았다. 모르고 도망치듯 하는 선택이 아니라, 정말로 공부를 하기 위한 유학을 갈 것인지를 놓고 결정할 만큼 내 경험치가 늘었다. 그래서 결정이 어려웠다.





다시 주어진, 변화의 '빨간약'과 현실 안주의 '파란약' (영화 매트릭스)



하버드 대학교 수전 데이비드 교수는 그녀의 저서 <감정이라는 무기>에서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생리학 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사람의 뇌는 편안한 상황이 되면 보상 관련 사항을 관장하는 뇌 부위인 선조체(striatum)가 활성화되고,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면 공포를 관장하는 편도체(amygdala)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런 결단이나 생각도 없이 무심코 '느낌'만을 따르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편안함, 안전함을 선택하게 되며, 변화를 회피하고 당장 지금 나를 편안하게 만들 것들에만 몰입하게 된다고 했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본능이 우리 안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편안함에서 벗어나 미래를 개척하게 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지금의 편안함을 언제든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두려운 한걸음이 결국 나를 더 큰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업부서가 안정되고, 정규직이 되어 월급도 괜찮아진 상황, 게다가 같은 연수를 수십 번 하다 보니 일에 대한 부담도 전혀 없다. 모든 것이 편안하다. 선택은 이 편안한 곳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내가 바로 얼마 전까지 경험했던, 끔찍하리만큼 힘들었던 유학의 길을 다시 갈 것인가, 둘 중에 하나였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점점 가슴이 아프고 두려워진다. 왜냐하면,


결국 내가 떠날 것이란 걸, 

마음 저편에선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 적도 없는 하버드 대학 심리학 교수가 한 말 때문만은 아니다.


이 선택은 내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내 힘으로 안 되는 더 큰 무언가에 소망을 두고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였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세상에 갇혀 버리기에 이 세상이 너무 크고 광대하고 오묘하고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이 세상을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내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나는 죽는 존재, 이미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것들이 저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할 줄 아는 이 작은 영역을 놓고 작은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내 힘보다 더 큰 무언가를 향한 소망을 내 안에 품고, 아내와 함께 이를 확신한 4월의 어느 날, 부서장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하고 오겠다고. 부서장님 뿐 아니라 모두가 놀란다. 사장님이 다시 호출하더니 마음을 돌리려 한다. 어떤 상무님은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쓴소리도 하셨다. 하지만, 누가 봐도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이 신참 과장의 고집이 세다. 결국 이 자리를 이어받을 다른 경력직이 뽑힐 때까지만 그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약 1개월 후 출중한 후임 과장을 경력직으로 뽑았다.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나오는 길에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리하여 5월, 다시 한번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편에 오른다.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은 잠시 보류했다. 일단은 내가 먼저 가서 생활해 보며 기회를 찾기로 했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길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 외에는 확정된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공포를 관장한다는 그 '편도체'의 활성화 덕분인지 익숙한 두려움이 일본을 다시 찾은 발걸음 내내 함께 한다.


그리 두려웠지만, 

새로 찾은 5월의 교정, 그때의 싱그러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의지로 변화를 선택했다. 그 모든 것을 겪었지만, 상황에 휘둘리지 않았다. 소망을 품은 채 선택한 그 길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내게 선물처럼 주어진 '자유의지'로, 더 큰 세상을 향해, 드디어 내 생애 '첫 발'을 내디딘 것 같았다. 








수년 뒤,

일본 경기가 다시 침체되어 벤치마킹 연수의 인기가 급격히 사그라들었고,  

결국 연수 팀도 뿔뿔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하라 교수님 지도하에 열심히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지금 보니 편안함보다 변화를 택했던 나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매번 그때는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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