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태호 Mar 15. 2019

어제보다 나은 나

2-4.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어제보다 더 많은 일을 한 나,

어제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은 나,

어제보다 더 착해지기로 한 나는,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나인가?




2-4.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벤처기업의 마케터인 김 대리는, 커다란 배낭 가방 하나를 메고 여행용 커리어 두 개를 양손에 끌며 공항에 나타났다. 연수가 반복되면서, 내게 꼭 필요한 짐은 가방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터다. 속으로 저분 앞으로 짐 때문에 꽤나 고생하시겠다고 생각하며 인원 파악을 이어갔다.


김대리가 다시 주목을 끈 건 그다음 날, 도요타 실습이 있던 날이다. 기름때와 땀이 베인 세계 최고의 생산 현장으로 가는 길에 이분은 화려한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실습하기 편한 복장으로 오시라고 분명히 공지를 했기에, 이분이 혹시 실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싶어 신경이 쓰였다. 그건 아니었지만, 보통 이렇게 일반적인 정서에서 벗어나는 정도의 주목을 끄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김대리는 그 특이한 패션으로 인하여 확실히 관심을 끌었고, 남은 시간 내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분을 지켜보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는데, 먼저 하루에도 많게는 두어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수 기간 중 같은 옷을 입은 적이 거의 없다는 거다. 그제야 김대리가 가지고 온 세 개의 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옷 자체는 상당히 비싸고 좋아 보였다. 문제는 이것이 관광이 아니라 '벤치마킹 연수'라는 것이다. 어느 날은 하루 세 군데 공장을 방문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실습을 하기도, 또 회의실을 잡고 일본 측 초청 강사와 간담회를 하기도 하는데, 이분의 패션은 어떤 상황과도 어울리질 않았다.


결국 야키니쿠 집에서 고기를 굽던 어느 저녁 시간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분의 하얀 바지에 음식물이 튀어버린 거다. 물수건으로 처리가 안되자 화장실로 가더니 한참을 머물다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얼룩을 지우는데 실패한 모양새다. 이를 지우려던 흔적이 오히려 더 큰 얼룩을 만들어 멀리서도 바지 한쪽에 자국이 보였다. 이때 내가 본 김대리의 표정이, 그를 이 글 세 번째 등장인물로 만들었다. 김대리의 표정은 우울했다. 주눅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나름 붙임성 있고 싹싹하던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이후 남은 시간 내내 주로 침묵을 지켰다. 이 우울함은 숙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이후에야 사라졌다. 


처음엔 이분이 옷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큰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일을 보고 나니 이분에게 옷은 그냥 옷이 아닌 걸 알겠었다. 이분은 옷이 자기의 자신감, 자존감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자기가 세상에 보이고 판단되는 모습을 자기의 '겉모습(옷)'으로 한정해 버렸고, 그래서 이분은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세상에 드러나는 나(옷)'를 꾸미게 된 것 같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개선의 에너지를, 이분은 안타깝게도 옷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온통 쏟아부어 버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새롭고 화려하게 수시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옷을 바꾸어 입고, 보이는 모양새를 다듬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것일까?


"훌륭한 패션은 옷이 얼마나 멋있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옷으로 인해 그 사람의 가치가 올라갔는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샤넬을 만든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한 말이라고 한다. 패션의 목적은 내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지 옷 자체가 주목받는 것이 아닐 것이다. 최고의 패션은 옷이 아니라 내가 빛날 때 만들어진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서 헤어지던 날, 마지막까지도 눈에 띄는 차림새의 김대리와 작별인사를 했다. 지난 일주일간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하루 두세 번의 옷을 갈아입으며 독특한 노력을 하던 김대리는 과연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향상시켰을까. 미안하게도, 세 개의 가방을 힘겹게 메고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전보다 나아진 모습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 강렬하고 독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맴돌 듯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던 김대리와의 만남은, 과연 어떤 노력을 어떻게 기울이는 것이 나를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이어가게 했다.

 

보이는 내 껍데기가 아니라 

내 속의 것들 날마다 더 좋아져서,

그것이 우리를 가만히 있어도 빛나게 할 때,

어제보다 진정으로 나은 내가 되는 게 아닐까.






하라 교수님께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다 뺐다.

얼마나 힘든지를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이것도 모조리 뺐다.

그저 일어난 일들과 상황을 그대로만 써서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들, 발표한 학회 자료들을 첨부하여 내 연구에 대한 소개를 대신했다.

지도교수인 와카츠키 교수에게서 받은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 서적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설명하고, 나는 공부하러 왔지 역사관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썼던 메일을 다시 꺼내어 포워딩했다.

그리고 연구비를 지원한 회사로부터 받은 동의서를 스캔받아, 이를 내 연구 성과의 객관적인 평가로 대신했다.


이때 나는 아주 조금, 내가 전보다 조금은 더 나아졌음을 느꼈다. 무언가를 꾸미거나 빼지 않고 나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자랑스럽고 당당한 것이 좋았다. 내 상황은 어렵고, 공부도 뜻대로 되지 않고,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내 겉모습이 아닌 내 속 사람이 떳떳한 것,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누군가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 기뻤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하라 교수로부터의 답신을 기다렸다.






며칠 후, 학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그런데 하라 교수가 보낸 게 아니다.


그동안 한 번의 답장도 없던, 나의 지도교수, 와카츠키 교수가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에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라는 내용도, 그동안 연구에 대한 내용도, 답장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내용도 없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우편을 이용해 조교에게 속히 반납할 것." - 와카츠키


이렇게 쓰여있었다.




이전 09화 유일한 경쟁상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