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태호 Mar 09. 2019

유일한 경쟁상대

2-3. 타인의 지옥


세상엔 나 혼자만 살면 겪지 않을 문제들이 참 많다. 

사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타인과 얽힘으로 인해 시작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그래서 '타인은 곧 지옥'이라고 했다. 




2-3. 타인의 지옥


일본의 도요타는 독특한 작업 방식(TPS)으로 인해 생산성을 크게 향상했는데, 이로 인해 벤치마킹 연수의 제1순위는 늘 나고야에 있는 도요타 본사였다. 인천공항에서 나고야행 비행기가 오전 9시 30분에 출발했으므로, 연수단의 공항 집합은 아침 7시 30분이었다. 


이른 시간에 공항까지 오는 게 쉽지 않으므로, 늦지 않게끔 모두에게 일찍 오시라고 사전에 단단히 공지를 해 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어느 중견 업체에서 오신 고 과장님처럼 새벽 6시에 도착해서 기다릴 필요는 없다. 내가 함께했던 1,000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고 과장님 이야기가 나올 차례다.  


이 분은 연수가 진행되는 동안 남다른 움직임을 보이셨는데, 버스를 탈 때도, 내릴 때도, 식사도, 다음 일정으로 걸어가는 것도 무조건 제일 먼저였다. 물론 진행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빨리 움직여 주는 사람이 고맙다. 하지만, 산업박물관 자유 관람 2시간 일정을 숨을 헉헉거리며 20여분 만에 마치고 모임 장소에 가서 나머지 시간을 내내 기다리는 모습은 일반적인 범위에서 조금 벗어나 보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작은 문제가 생긴 건 실습 때였다. 

우리가 짠 프로그램에는 실습 시간이 있었다. 도요타 공장을 재연해 놓은 곳에서 실제 자동 부품들을 가지고 도요타 개선 방식을 해 보는 시간이다. 보통 재미를 더하기 위해, 두 팀으로 나뉘어 시합하듯이 진행을 한다. 


여기서 고 과장이 속한 팀이 진 거다. 그리고 지게 된 원인이 고 과장에게 있었다는 게 문제의 시작이다. 볼트를 끼워서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단순한 파트를 맡았는데, 생각보다 둔한 동작을 보이는 바람에 팀이 졌다. 안 하던 일을 해보니, 잘 못하는 게 당연한 거다. 이기든 지든 다들 웃으며 즐겁게 끝나기 마련인데, 팀이 자기 때문에 지게 되니 고 과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분위기가 얼음처럼 싸해졌다. 나는 걱정이 되어 얼른 이분을 따라 나왔다. 


나가보니 이분의 표정에 화가 단단히 실려 있다. 다짜고짜 항의를 한다. 왜 이런 쓸데없는 순서를 집어넣어서 연수 시간을 잡아먹냐고 했다. 하지만, 두 시간 전만 해도 제일 먼저 실습장에 들어가 단단히 의욕을 보이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니, 프로그램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이 실습 프로그램은 그동안 연수 평가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던 순서다. 일단 이분을 다독이는 게 내 일이니, 최대한 좋게 이야기하며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실습장을 떠난 후, 자연스레 이분을 계속해서 주시하게 되면서, 또 다른 특이점을 발견했다.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눈동자는 계속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쳐다본다. 모든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듯 보였다. 늘 긴장을 하는지 누가 이분을 간혹 뒤에서 부르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서 부른 사람이 무안해하기도 했다. 


일정표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다음 일정에 대해 하나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내게 와서 다그치듯 물어보던 이분, 하지만 그 누구도 빨리 행동하라고 한 사람이 없었고, 잘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각자 다른 회사에서 온,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다. 느긋하게 배우고 즐기는 분위기였지, 스트레스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아마도 그동안 살아온 습관이 이분을 이렇게 몰아가는 것 같았다.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이분의 삶이 이렇게 되셨나 오히려 궁금해졌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고 과장이 동년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내가 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그 자리에 있는데, 어떤 분이 넌지시 묻는다.

 

"원래 그렇게 걸음이 빨라요?" 


그러자, 

"내가 빠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느린 거지." 


라며 받는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가더니 이내 뜻하지 않게 이분에게서 속마음 이야기가 나온다. 


"난 뭐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하는 걸 못 참아요. 나도 알아요. 내가 좀 유별난 거. 뭐 내가 잘하는 게 없어서 그런가 보지요." 


생각보다 털털하게 이야기해서 조금 놀랐다. 본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 있지 않으면 힘들고 답답하단다. 


입사해보니 내 능력이 남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타인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품고 지내왔다는 이야기다. 내 삶의 목표를 '타인 보다 나은 나'에 두다 보니, 늘 남들을 쳐다 보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기 위해 긴장하며 사는 것이 굳어진 듯하다. 


그나마 얼마간의 인간미가 흐르던 이날의 술자리에서 마저, 고 과장님은 툭툭 털고 먼저 일어나 가보겠다며 숙소로 향했다. 쓸쓸히 홀로 일어서는 이분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그간의 힘겨움이 가져다준 그늘이 가득하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휴식의 시간 마저도, 스스로 열외를 선택해 내일을 준비한다며 일어서던 이분. 아마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그렇게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숨을 헉헉 거리며 살아가실 것 같다. 

이분을 위로할 방법이 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지옥은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그 잣대를 그대로 들고 와 나를 평가하면서 시작된다. 고 과장은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타인의 평판을 걱정하며 사는 삶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옥을 산다는 게 어쩌면 이런 걸 거다. 


타인을 인식하며 살기로 말하자면 나 역시 만만치 않았던 터다. 

하지만, 이분을 만나고 나니, 그전에는 흘려 들었을 만한 어느 명사의 말 하나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내가 정말 앞서야 할 것은 타인이 아닙니다. 내 유일한 경쟁 상대는 어제의 나뿐이에요.' 


타인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경쟁하기. 

이것이 우리가 사는 '타인의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새 학기가 되었다. 역시 나는 혼자다. 

대학원 생인데 지도를 못 받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성을 다해 보내는 나의 리포트에 아무런 답이 없다. 


매주 꼬박꼬박 제출하던 응답 없는 리포트의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벤치마킹 연수 인솔하는 주는 쉬고, 그다음 연수 준비하느라 바빠서 또 한주 쉰다. 


혼자 공부하는 것에는, 단지 지루하다는 것 이상의 어려움이 있었다. 내가 잘 이해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거다.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점점 잃어 가던 어느 날, 문득 한계점이 왔다.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공부의 의지가 사라지니, 책도 프로그래밍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을 지내던 내가 다시 책을 든 건, 고 과장이 참여했던 연수를 다녀온 후다. 워낙 특이한 모습에 연수 후에도 잔상이 남아 이어지던 중, 나라고 고 과장과 다를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세련되게, 잘 안 보이게 감추고 있을 뿐 실은 잘했다는 평가를 바라고 남들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은 똑같지 않은가.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기쁨을 느끼며 살 수는 없는 건가?

 

잘은 몰라도, 이 마음이 나를 다시금 책상에 앉혀 놓은 것 같다. 지난번에 제출한 리포트를 펼쳐 읽다 보니 여기저기 부족한 점들이 보인다. 어제의 내 리포트를 뛰어넘는 것이 새 목표가 되어,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실천해 가기 시작했다.


그래 끝까지 해보자.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계속해 나가기로, 스스로 다짐에 다짐을 하며, 그 시간을 견디어 낼 용기를 얻었다. 




학교에서 메일이 온건,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내 지도 교수가 보낸 게 아니다. 


자신을 하라 교수라고 소개했다. 


하라 교수님이라면 나도 잘 안다. 우리 학교 교수님들 중에서도 선임급 되신다. 도쿄 의과 치과대학 의학부를 나온 후 의사로 지내다가 생화학을 더 연구하기 위해 생화학과 교수님이 되어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연구에 전념해 오신 분으로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었다. 해당 분야의 대가가 지금 내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메일을 통해 이렇게 물어보았다. 


조태호상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신은 왜 지금 일본에 없고 한국에 있지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나에게 설명해 주겠어요? 


이게 뭐지? 뭔지도 모르는데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다. 일단 하라 교수님의 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난 이미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가슴이 쿵쾅 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걸 묻는 거지? 내가 그만두지 않으니까 더 높은 교수가 나서서 나를 자르려는 건가? 그럼 지금 잘 지내고 있고 연구도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답변해야 하나..?


아니면 혹시 나의 이 상황을 구제해 줄 만한 기회일까? 그럼 와카츠키 교수의 극우 사관에서 비롯된 이 모든 일들을 고자질하듯이 다 말해야 하나..  

하지만, 하라 교수도 똑같은 사람이면 어쩌지..?


물어볼 곳은 없다. 결국 혼자 선택해야 했다.

 

모든 것을 지내온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그때 나는 

어떤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았을까?


이전 08화 해보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