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과 묘사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지 말기
살다 보니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이 각양각색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윤리관도 그렇습니다. 젊어서는 남녀관계에 있어 저와 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여길 때가 많았습니다. 소위 ‘양다리’를 걸친다거나, ‘임자 있는’ 상대에게 눈길을 보낸다거나, 세칭 가정이 있는 자가 ‘바람’을 피운다거나 하는 일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모두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의리 없는 짓들’이라고 여겼습니다(삼국지의 주제가 ‘의리 없는 놈(년)은 인간이 아니다’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다보니 남녀지간의 윤리니 비윤리니 하는 것들이 좀 석연치가 않다는 느김을 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생각대로 산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평생 살면서 ‘내 맘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추호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지금까지, 길지는 않지만, 제가 살아본 경험입니다. 실수, 만용, 욕심, 일탈, 호기심 등등, 차 떼고 포 떼고 이것저것 다 떼어 내곤 장기판을 꾸려나갈 수 없는 법입니다. 보고도 못 본 척, 싫어도 괜찮은 척, 굳이 용서라는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저것 껴안고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즈음은 남의 일에는 아예 판단을 하지 않는 쪽으로, 그저 데면데면 멀뚱멀뚱, 그냥 두고 보자는 심사로 기울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설명’이 아닌 ‘묘사’로 삶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비 딕』 독후감에서, 스스로 다시 그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을 토로하고 따로 ‘후기(後記)’를 두지 않는 기술(記述)을 강조한 정진홍 선생의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았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다시 쓰는 작업에서 저는 고래와 바다와 에이허브를 모두 교체할는지도 모릅니다. 포유류임에도 물에서 사는 동물, 그렇기 때문에 땅을 떠나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전개,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외다리 선장, 이 전부를 말입니다. 저는 어쩌면 고래를 양서류로 바꾸고, 바다를 땅과 바다로, 그리고 에이허브를 두 다리가 성하거나 모두 상한 에이허브로 만들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고 멜빌이 이 작품 속에서 풀어나간 이야기를 그대로 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때 신이 어떻게 묘사될는지, 그때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질는지, 그때 인간이 어떻게 그려질는지 궁금합니다. 그때 ‘일몰’(37장)이, 그때 ‘모포’(68장)가, 그때 ‘호두’(80장)와 ‘눌러 짜내기’(94장)가, 그때 ‘관 속의 퀴이퀘그’(110장)가, 그때 ‘모자’(130장)가 어떻게 그려질지 저는 궁금하다 못해 초조할 지경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이 소설이 ‘거절’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사랑이야기도 하게 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대로 두어도 좋습니다. 교훈의 여운을 문자화하는 것은 친절입니다. 그것은 기려도 좋은 덕입니다. 소설이라고 해서 그 덕을 누리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작가의 자유를 훼손할 수도 있을 독후감의 진술이 소설을 되쓰고 싶다는 데 이르는 것은 독자의 오만입니다. 그러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중략)
그러한 것을 충분히 유념하면서도 저는 견딜 수 없이 하고 싶은 딱 한 가지 ‘다시 쓰기’의 희구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후기(Epilogue)’를 잘라내는 일입니다. 이 후기가 없으면 이 소설은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을 전해주는 화자(話者)마저 파도의 깊은 속으로 빠져 사라지게 한다면 이제까지 한 이야기는 모두 ‘실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멜빌은 이 마지막 결미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욥기를 인용한 것(“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1장16절)”)이라든지 이슈마엘을 구해준 배 이름이 이미 피쿼드호가 만난 배이기는 하지만 가나안으로 가다 베냐민을 낳고 난산 끝에 죽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이름과 같았다든지, 그 배는 선장이 잃은 아들을 찾아 헤매던 배였는데 “자기 아들이 아닌 다른 고아를 찾았다”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정진홍,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중에서]
정진홍 선생은 『모비 딕』이라는 소설이 굳이 인생에 대한 결론짓기와 요약하기를 도모하려고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런 ‘설명’을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이 ‘신(神)의 해답’과 함께 하는 것이 싫다고 말합니다. ‘물음’으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진정한 인간과 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인간 자존의 표출’이라는 것입니다. 『모비 딕』이 경전이 아니라 문학이려면 반드시 그러해야 된다고, ‘해답의 거절’이 있어야만 한다고, 다소 장황한 느낌마저 주면서까지 역설하고 있습니다. ‘애써 한 소식 들은 척’(신현락, 「고요의 입구」)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사족 한 마디. 글을 쓰던 책을 읽든 무도 수련을 하든, ‘싸움의 기술’을 탐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부지불식(不知不識), ‘사람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상대의 기술에 경탄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면서 제 자신과의 비교에 나섭니다. ‘기술’은 사람이 부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늘 ‘사람’과 함께 갑니다. 어쩔 수 없이, ‘기술’에 대한 경탄이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기술’에 대한 불만이 ‘사람’에 대한 경멸로 이어질 때도 많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그런 ‘차별’이 저의 못난 분별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모두 인생을 섣불리 결론짓고 요약해 보고 싶은 과욕(조급성?)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젊어서는 몰랐던 것인데, 나이 들면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저급한 수준이나마, 나이 들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몇몇 ‘싸움의 기술’ 덕분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제가 그러니 남들도 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행과 불행을 평생 안고 삽니다.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나이 들수록 더 외로운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좀 무리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도 그의 ‘외로움’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한 검도 저널에서 그런 ‘싸움의 기술’에 대한 문답이 있었습니다. 전성기 시절 무거운 죽도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던 한 원로 검도가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직도 무거운 죽도만 고집하십니까?”
기자는 아마 그의 연로한 모습을 봤을 듯합니다. 기력은 쇠하였음이 분명한데 칼은 여태 무거운가, 시간에게 종속된 인간에게 과연 도(道)란 어떤 의미인가, 아마 그런 잡념을 지녔던 듯합니다.
“아닐세. 요즘은 가벼운 것을 무겁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네.”
나이 든 ‘선생님’은 그렇게 답했습니다. 인체에는 한계가 있어 근력이 마냥 늘어나지는 않는 것, 노년에 접어든 몸으로 옛날의 힘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지만 ‘싸움의 기술’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해진 크고 무거운 것도 작고 가벼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크게 쓰면 큰 것이고 작게 쓰면 작은 것입니다. 가벼운 것도 무겁게 쓰면 무거운 것이고 무거운 것도 가볍게 쓰면 가벼운 것입니다. 저의 이 작고 가벼운 글쓰기, ‘싸움의 기술’, ‘소가진설’도 마찬가지라 여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공감을 얻을 때 당근 크고 무거운 것이 되리라 믿어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