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Dec 17. 2019

물 마른 옛우물

오정희 소설

물 마른 옛우물  

   

비유하자면, 소설은 본디 양성애자입니다. 극단적으로 상반된 것을 동시에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역사와 전기(傳奇)를 동시에 좋아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전할 때에도 전기적 포즈를 취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당연히 과장과 왜곡을 일삼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생각과 행동이 예사로 서술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승자와 패자의 역전이 언제든 가능합니다. 현실의 승자가 소설 속에서는 비루, 비참한 신세가 되기도 하고 당연한 역사적 필연이 한갓 개인사적인 우연의 소치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들을 보기 위해서 우정 만든 것이 소설이라는 장르입니다. 소설의 참신한 기괴성이 작가의 윤리와 함께 한 작품의 미학적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소설은 현실을 떠나, 현실을 전복하고, 현실을 조롱하는 힘을 가져야 제대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 여름, 나를 찾아온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허둥대는 어미의 기색을 본능적으로 느낀 아이는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다. 진저리를 치며 물어뜯었다. 이가 돋기 시작한 아이의 무는 힘은 무서웠다. 아앗,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불에 덴 듯 울어대는 아이를 떼어놓자 젖꼭지 잘려 나간 듯한 아픔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아이의 입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브래지어 속에 거즈를 넣어 흐르는 피를 막으며 나는 절박한 불안에 우는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와 함께 강을 건너 깊은 계곡을 타고 오래된 절을 찾아갔다.

여름 한낮, 천 년의 세월로 퇴락한 절 마당에는 영산홍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영산홍 붉은 빛은 지옥까지 가닿는다고, 꽃빛에 눈부셔하며 그가 말했다. 지옥까지 가겠노라고, 빛과 소리와 어둠의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중략>

나는 더러운 간이화장실에서 오줌을 누고 브래지어 속을 열어 보았다. 피와 젖이 엉겨 달라붙은 거즈를 들추자 날카롭게 박힌 두 개의 잇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돌연 메스꺼움을 느끼며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였다.(「옛우물」, 오정희, 『저녁의 게임 외』)

     

오정희 소설의 후유증인가도 싶었습니다. 내 안의 '옛우물'은 이미 물이 말랐는데, 우물 속의 어린 물도깨비 하나가 여전히 악을 쓰며 자기를 주장합니다. "왜 나를 버리고 딴 남자를 만나러 갔는가?" 그렇게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고통이 육체로 전이됩니다. 턱관절이 아프더니 서서히 통증이 안면 상단부로 올라옵니다. 이제는 귓구멍 언저리까지 아픕니다. 벌써 일주일째 그렇습니다. 조만간 오른쪽 두부(頭部) 전체로 통증이 확산될 것 같습니다. 입을 벌릴 때마다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옵니다. 아마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소염제라도 좀 사 먹지?” 속 모르는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건넵니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들을 반추하느라 남모르게 불면의 밤을 며칠 보낸 것이 사단인 것 같습니다. 기억의 불순물들을 애써 끄집어내어 내 소설 쓰기의 불쏘시개로 사용한 경험이 있습니다. 한 번 소설로 가공된 것들은 거짓말처럼 자신의 위치 에너지를 상실하고 풀이 죽어 지냅니다. 시간이 흐르면 거의 깨끗하게 잊혀집니다. 감정적인 색깔마저 완전히 탈색되어 흑백으로 바뀝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치통처럼, 간헐적으로 고통 속으로 끌어당기던 온갖 죄의식과 죄책감들도 그렇게 흑백사진이 되어 증발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사히 진압되었던 것들이 최근 들어 다시 저항군을 형성해 나대고 있습니다. ‘옛우물’이 하나의 도화선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만.      

기억의 불순물들이 준동한다는 것을 최초로 알아챈 것도 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의 각 기관들이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긴장이 찾아오고, 소화가 안 되고, 여기저기 근육이 뭉치고, 신경이 곤두섭니다. 그럴 때마다 "제발 그냥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외치고 싶으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그 고통을 조금씩 음미하고 싶은 충동이 샘솟습니다. 심지어 밖으로 전파해서 남과 고루 나누고 싶은 마음까지 듭니다. 옛날 소설을 쓸 때의 용심(用心)이 다시 찾아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고통이 밖으로 옮겨져서 감쪽같이 사라질 것이라는 엉뚱한 착각마저 듭니다. 고통은 떠도는 원귀(寃鬼)마냥 그냥 떠돌 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내려앉고 싶은 곳 아무데나 내려앉습니다. 아니면 물 마른 옛우물처럼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거나.     


내 기억의 불순물들은 ‘어머니’에 많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레이터 마더(great mother), 무의식의 위대한 어머니, 모든 콤플렉스에게 동력을 제공하는 모성애에 대한 강한 집착, 그러니까, 프로이트 식으로는 모성콤플렉스가 내 모든 무의식적 욕망의 원동력입니다. 그 콤플렉스를 융 심리학에서는 그레이트 마더와 아들 연인(son-lover)라는 에로티즘으로 설명합니다. 근친상간(incest)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그 코드를 사용해서 황순원 소설의 육질(肉質)들을 하나하나 발라내면서 덩달아 나도 쾌감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내 살과 뼈를 발라내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오정희 소설 '옛우물'은 오래된 질문을 상기시킵니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물었던 그 질문입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자가 누구냐?”, 그 질문을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자는 누구냐?"라고 고쳐서 묻습니다. 그리고는 순한 양처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요, 바로 접니다."

작가의 이전글 미신도 때로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