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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Jan 02. 2020

고향 땅에서의 박대

변화하는 인간

고향 땅에서의 박대

학교 선생으로 살다 보면 사랑스런 제자들을 많이 봅니다. 심성 곱고 학업에 열중하면서 친구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착한 제자들을 볼 때면 참 사랑스럽습니다. 그런 이쁜 제자들을 볼 때면 제 집자식의 모자란 점이 ‘들보’마냥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착한 제자아이들이나 못난 제 집아이들이나 모두 제 부모 품 안에서는 어리광도 마음껏 피우고 실수도 잦은 철부지일 수밖에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다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그렇게 마음대로 못난 자식으로 한 번 살아보지 못하면 나중에 어디서 그런 호사를 누려볼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나중에는 부모도 없는 저 막막한 사막같은 인생에서 불철주야 고군분투해야 할 운명인데 '못난 자식' 노릇도 한 번 못해 보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세상이 훤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 자기 집이나 고향에서는 좀 못난 인생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이나 고향에서 칭찬만 받아온 인사가 넓은 세상에 나가서 큰인물이 되어 돌아오는 걸 잘 보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집이나 고향을 떠났다가 (크게 되어) 다시 돌아와서 박대 받는 사람 이야기로는 나사렛 사람 예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고향땅에서 박대당하는 광경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길게 묘사하지도 않으면서 딱 필요한 것만 열거해서(아버지의 직업, 어머니, 형제, 누이들을 보고 당사자를 믿지 못함) 당시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재현해 냅니다. 언제 봐도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아마 종교적인 맥락을 떠나서도 인정되는 원형적인 스토리텔링이 주는 감동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마태오 복음,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메디치, 2014) 중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물론 스스로 변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우리와 달라진 사람들을 쉬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관성' 속에서 삽니다. '예수의 이웃'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그저 '보통의 이웃'으로 남아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저 어릴 때 자주 본 '흠 많은 인생'으로 있어주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래야 변하지 않은 자신들의 '못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격리(隔離)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5년쯤인지, 10년쯤인지, 아니면 20년쯤인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연전에 거금을 들여 『예수평전』이라는 책을 사서 볼 때도 사실은 그 ‘격리의 시간’을 어떻게 재구성했을까가 제겐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책 제목이 ‘평전’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책은 ‘제목을 이기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서점에 나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어쨌든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처럼 그도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응답하는 예수의 행적도 인상적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대목에서 이유없는(굳이 따지자면 전혀 이유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쾌감을 느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친 그가 왜 고향사람들에게는 기적을 베풀지 않았을까? 기적을 베풀어 고향사람들마저도 자신을 믿고 따르도록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등등의 의문과 바람은 그 ‘쾌감’ 아래서 그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돼지에게는 진주 목걸이를 던져주어도 소용이 없다”라는 구절이 생각나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제넘은 말씀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요즘 계속 주제를 모릅니다). 저의 페이스북 글쓰기에서 가장 격려가 되는 것은 누구보다도 ‘고향 사람들’이 제 글을 인정해 줄 때입니다. 옛친구들(선배 후배 포함)이 제 글에 ‘좋아요’를 눌러줄 때 너무 감사합니다. 저를 모르는 사람들은 제 글만 보기 때문에 마음대로 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이들은 필요한 만큼, 또 가능한 만큼, 언제든지 ‘마음의 양식’을 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와 형제와 누이들을 다 알고 있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아도 살갑게 다가 와서 “잘 읽었다”라고 한 마디 해 주기가 쉽지가 않습니다(저도 그 느낌을 잘 아니까요). 그래서 고향에서 박대받은 예수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위로도 되고 교훈도 됩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만, 저와 학문적 관심사가 조금 겹치는 직장 동료 한 분에게 제 책 한 권을 드렸더니 나중에 만나서 “선생님, 정말 좋은 책이더군요”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짧게나마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한 십여 년 아래고 외국에서 공부를 하셔서 저간의 제 사정을 잘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표정을 보니 그 분 입장에서는 좀 의외였던 모양입니다. 그 표정이 참 좋았습니다. 무지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서로, 지난 일은 눈 감아주면서, ‘고향 사람들’끼리라도, 서로를 사랑하며 위로해 주는 것이 이 허무하고 삭막한 인생에 조금이라도 윤기(潤氣)를 보태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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