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늘도 새벽에 눈이 떠졌다. 드디어 출국일이다. 어제밤 늦게까지 엄마랑 같이 짐쌓기 테트리스를 끝냈고 여름이와 시간도 잔뜩 보냈다. 엄마가 밤새 튼 선풍기 바람에 다시 비염이 도져서 기침과 가래를 뱉고 약을 먹었다. 아차, 비염약이라 졸리댔는데... 오전에 마지막 진료가 있는데도 졸음을 못이기고 결국 다시 잠들어버렸다. 다행히 제시간에 깨어나 늦지않게 준비하고 차를 끌고 병원에 갔다. 의사쌤과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영문진단서까지 받았다. 두둑한 약봉지를 품에 안고 나오니 비가 조금 멎어가고 있었다.
다음은 은행으로 향했다. 친절한 주차요원의 배려 덕에 잠시 주차를 하고 은행에서 송금을 완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과일 요거트를 드시고 계셨다. 점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꽁치조림도 준비하셨다. 엄마의 커다란 사랑이 느껴져 또다시 밥 한공기를 뚝딱했다. 국물도 시원하고 칼칼해서 이 맛을 다시 잊지 못할 것 같다. 거대한 짐덩어리들을 끙끙대며 차에 실고 온 가족이 공항으로 향했다.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은 엄마와 어쩐지 감성가득해진 아빠를 지켜보며 기분이 참 이상했다. 내가 멀리 간다는 걸 두분은 이제서야 깨달은 것 같았다. 갑자기 시작된 기침과 함께 부모님을 떠나며 한쪽이 부서진 헤드셋을 낀채 이륙장에서 비행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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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왜 그렇게 잠이 오던지... 비행기에 타고나서 이륙하는 순간까지도 비몽사몽한 채 밥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7시 반에 밥을 받았으니, 세시간 가까이 존 셈이다.
내 옆자리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갓난아기가 찡얼거리고 있는데도 한번도 안 깨고 잘잤다. 아침에 먹은 약 효과 덕분일까? 밥 먹고 또 약을 먹었으니, 남은 비행 시간동안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 지금 기분은...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졸리고, 지루한 비행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다리가 붓고 배에 가스가 차는 기분이다. 내 옆자리의 갓난애기도 어느새 기묘한 헤드셋과 전신 포대기로 온몸을 무장한 채 고통스러운 14시간 비행을 버티는 중이다. 어른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아기인 너는 얼마나 더 힘들겠니.
난기류가 끝나면 이를 닦고 화장실도 가야지. 씻고 나면 다시 또 잠이 올거다. 사실 아직 캐나다 이심을 등록하지 않아 불안하다. 어제 결제해서 오늘이 되기 전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캐나다 시간으로 오늘이 되기 전인걸까? 비행기에서는 어짜피 할 수 없으니 내려서 공항에서 메일을 확인해봐야한다. 그런데도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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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밤 10시 반. 이제서야 화장실에 들렸지만 냄새가 너무 나서 볼일만 보고 이는 나중에 공항에 도착해서 닦기로 했다. 약기운이 장난 아니게 쎈데 지속시간은 짧은 것 같다. 이렇게 기절하듯 잠들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이제 비행은 3분의 1정도 왔을 뿐이다. 뭉친 다리와 어깨를 스트레칭했다. 기침은 아직 현재 진행중이다.. 비행기 내부라 공기가 안 좋은 것 같다.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한다고 했는데 연결만 되고 인터넷은 안된다. 구색만 갖춘건가? 덕분에 이렇게 글 쓰는 시간이 늘어 좋긴 하다. 글이라고 해봐야 생각의 나열들이지만..
아까 온보딩하면서 티켓을 체크하던 여자가 나에게 소리를 질러서 정말 깜짝 놀랐다. Are you blarblarblar? 뒷말은 높고 쨍한 소리에 놀라서 듣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왜 나에게 소리지르냐고 따졌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줄 서 있는 고객들 앞에서 위탁수하물 하나 더 있다고 무슨 스파이를 만난 것 마냥 호들갑을 떨어대니 무슨 일을 그따고로 하는감? 오히려 나에게 무상 위탁 해드리겠다고 설명해주신 한국 직원분들이 더 친절했다.
그 사람도 한국인인데 외국생활을 오래한 한국인인지... 벌써부터 몬트리올가서 만나게 될 한국인들이 상상된다. 동그란 안경에 쪽진 머리, 붉은 립스틱.. 잊지 못하게 깐깐해보이는 인상이다.
저녁약을 먹어야하는데.. 물이 없어서 고민중이다. 물컵을 달라고 하고 약을 먹고 돌려줘야하나? 귀찮은데... 이따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먹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약을 삼일에 한번 먹는 것도 괜찮다니.. 고민해봤지만 역시 꼬박꼬박 챙겨먹어서 초반 컨디션을 좋게 유지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짜피 가서 적응하고 나면 하나씩 차차 해나갈 일들이다. 나중에 생각해야지.
내 정착금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하나는 노트북가방, 하나는 배낭, 하나는 배에 메고있는 힙색에 넣어두고 혹시라도 잃어버려도 대비할 수 있게 했다. 캐리어에 안 넣어둬서 다행이다. 가서 현금을 보여줘야하는데 이민국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현금을 어떻게 보여주나 하는 걱정이 든다. 보안을 위해 잘 해뒀겠지? 휴... 진짜 별별 걱정이 다 든다. 몬트리올은 어떤 도시일까? 부디 히스테릭한 사람들이 적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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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5시. 한국 시간으로 오전 5시겠지? 벌써 도착까지 1시간 50분 남은 셈이다. 아니면 몬트리올 시간으로 따져야하나?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나처럼 새로운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일까? 이제는 더이상 자면 안될 것 같다. 몬트리올의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니 도착하자마자 잠드려면 버텨야하느니... 그래도 생각보다 잘 자서 다행이다.
다리에 감각이 둔하다. 피가 잔뜩 쏠린 모양인지 아니면 오히려 피가 통하지 않은 모양인건지... 갓난아기도 생각보다 매우 잘 잤다. 나랑 자주 비슷한 시간에 깨는 걸 보니 통잠 자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깨서 아가도 느낀걸까? 예민한 아가네.. 예술가의 자질이 풍부하다.
이제 남은 시간동안 뭐하지.... 지금 내 기분은? 멍하다. 피곤하고, 다리도 지끈거리고, 허리도 아프다. 내 자리에서는 벽 하나로 나눠진 비즈니스석이 보인다. 세사람씩 앉은 이코노미와 달리 두사람씩 앉아, 플라스틱 도시락대신 도자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는다. 자본주의 사회를 묘사하는 가장 직접적인 장면같다. 내 옆자리의 갓난아이를 데리고 14시간을 돌보는 부부는 앞자리 비즈니스석을 보고 부러워할까? 아니면 오롯이 아기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까?
아기는 참 사랑스럽다. 눈이 마주치면 마주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면 따라서 웃는다. 아빠의 큰 손에 감싸안긴 아기는 더욱 작아보인다. 살아있는 인형인데 생명이 있는.... 작은 인간. 아가의 사랑스러움을 묘사할만한 단어를 찾다가 같은 의미만 반복하고 있다. 우리 엄마도 나를 저렇게 키우셨을까? 내가 저렇게 사랑스럽게 보일까? 다 큰 나도 내새끼라고 지칭하는 엄마한테는 나는 영원한 아가일 것 같다. 공항에서 엄마가 눈물을 보일 것 같아 걱정했는데 내가 떠나고 나서 우신 것 같았다. 왜 지금 눈물이 나는 걸까? 벌써부터 엄마가 그립고 보고싶다.
여름이도 너무 보고싶다. 여름이 털을 챙기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털을 만지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나는 지금 불안한가? 불안한 것 같다. 공항에서 해야할 일들을 떠올리며 곧 있으면 도착할 몬트리올이 설레고도 두렵다. 새로운 세계로 탐험을 시작한 모험가들이 이런 기분일까? 원정선에서 내리기 전, 막 보이기 시작한 육지를 눈앞에 둔 기분?
공항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건 다음, 핸드폰 이심을 연결하고, 이민국에 가서 비자를 받고, 우버를 불러 새로운 보금자리로 향한다.
주말은 좀 푹 쉬며 시차적응도 하고 M님께 열쇠를 받은 뒤 동네 구경이나 할까.
월요일에 계좌를 만들고, M님에게 렌트와 테이크오버 비용을 정산하고, 범블로 친구도 사귀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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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일이.. 비행기에서 내린 뒤부터는 고난의 연속이다. 입국심사원 앞에서 쿠션?이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어서 버벅대고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서는 잘 했지만 마지막에 나갈 때 데코레이션 페이퍼를 시큐리티에게 주고 가라는 말을 제대로 못들었다 ㅋㅋㅋ 짐을 찾으러 가서는 노트북가방을 잠그다 지퍼가 망가졌고, E심이 오전에 도착했는데 노트북은 충전이 안되어있어 결국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등록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입국심사원에게 이미그레이션 오피스에서는 실수하지 말라고 응원의 메세지를 받았고, 내 비자를 발급해준 서포터는 친절했으며, 짐을 찾을 때는 무거운 가방을 같이 들어주는 분이 있었고, S님에게 부탁해 우버를 부를 수 있었다. 우버를 부를 때 핀 넘버가 필요하다는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우버 시큐리티들이 도와줘서 내 무거운 짐도 수월하게 실었다.
몬트리올! 앞으로 내가 머물게 될 도시. 어떤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이든 환영이다만 큰 고난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