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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Mar 15. 2022

출산 당일의 기록

진통 와서 애 낳으러 간 산모인 내가 이 병원에선 코로나 확진자?!

괜히 “시작이 좋다 말이 있는  아니다. 사실  풀린 일은 돌아보면  단추부터  느낌이 달랐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풀릴 일은 처음부터 쎄하게 시작한다.  벌어진 뒤에야 깨닫게 된다는  문제지만.


임신 후 대학병원 산부인과를 다닌 건 내 의사는 아니었다. 나는 일반 동네 산부인과도 상관없었지만, “만의 하나” 혹시 모를 위급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시댁 의견이었다. 뭐든 미리 대비하는 게 나쁠 건 없기에 그 의견엔 일리가 있었고, 마침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니는 동안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일반 산부인과를 다니는 친구들에 비해 받을 수 있는 초음파 사진은 적었고, 방문 때마다 그 날 오후는 통째로 날려야 할 정도로 대기 시간이 길었으며, 돌아오는 설명은 짧고 가격은 몇 배로 비쌌다. 벌어지지도 않은 “만의 하나”를 위해 감수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여건이었다. 그래서 매번 대기가 길어질 때마다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굳이 여길 다닐 이유가 없는데. 혹시 둘째 생기면 그냥 일반 산부인과 다닐 거야…


그 때는 상상도 못 했다. 출산 당일, 그 “만의 하나”가 나에게 벌어질 것이라고는...

눈물쎌카...

37주쯤 되면 언제 출산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출산휴가를 받은 후부터 외출을 정말 최소한으로 줄인 나였지만 37주가 시작되고부터는 정말 현관에 발을 디디지도 않았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처음이다보니 정말 언제 어떻게 아기가 나올 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아 무서운 마음에 - 장을 보다가 아기가 나오면 어쩌지? 장본 물건 들고 오다가 양수가 터지면? - 외출을 절제한 것이다.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면 집에서 내내 호흡법이나 연습하며 뒹굴댔지만 진통이니 양수파열이니 이슬이니 하는 출산의 징조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생모에 따르면 나는 예정일보다도 2주 늦게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내 새끼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언제 아기가 나올지 전전긍긍하며 보낸 지 2주 가량 되었던 38주 6일의 새벽, 뱃속에 가스가 가득 찬 것 같은 불쾌한 기분에 눈을 떴다.


임신 기간 동안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깬 적이 수백번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시간은 새벽 4시 50분 무렵. 하지만 장은 감감 무소식… 그럼에도 당장 뱃속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한참을 변기에 붙어 있었는데 아랫배가 고통스럽기만 하고 아무런 신호도 오지 않아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다시 잠들려고 했는데 고통은 멈추지 않고, 낑낑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게 진통인가?


그간 읽었던 진통 후기들을 떠올려봤다. 하늘이 노래지더라,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려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고 생각도 들지 않더라, 죽고 싶더라 등등. 아프긴 진짜 아팠는데 막 죽을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던 터라 진진통은 아니라 가진통일 것이라고 혼자 결론짓고 어떻게든 잠자려고 해 봤는데 지속적으로 아랫배를 누군가가 꽉 쪼이는 듯한 통증이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통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인터넷에 가진통과 진진통의 차이를 검색했다. 그런데 검색하고 나니까 오히려 더 아리까리해졌다. 견딜 만한 정도로 봤을 땐 가진통 같은데, 이 정도로 규칙적인 통증이 반복되는 건 진진통이라니 이 통증은 대체 가진통이냐 진진통이냐.


일단 어플을 깔아보고 진통 주기가 5분 이내면 진진통이라 보고 바로 병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진통 주기도 계속 10여분 정도라 긴가민가했다. 그 와중에 시간은 계속 흐르고, 가진통은 걸으면 없어진다길래 신랑이 출근한 뒤 좀 걸어보기로 했다. 당연히 어디 나갈 용기는 없어서 거실에서 부엌을 계속 왔다갔다 하며 걷는데 진통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갑자기 어플이 빽 소리를 냈다. 빨리 병원에 가라는 경고가 떴다. 최근 3회의 진통 간격이 5분 이내로,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네?... 임박했다고요?...


화장실에 가서 속옷을 확인했다. 양수파수는커녕 이슬의 흔적도 전혀 없었다. 이게 진진통이라고? 이러고 병원에 갔다가 퇴짜맞으면 어쩌지? 그 때가 벌써 9시가 다 되어갈 때였다. 일단 병원에 전화를 걸어 현재 상태를 설명했다. “빨리 병원 방문하세요!” 세상에. 나는 장대한 기골만큼 맷집이 쎄고 통각이 무딘 편인데 그게 마냥 좋은 건 아닌 모양이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신랑에게 서둘러 전화해고, 신랑이 달려오는 사이 얼른 샤워를 했다. 곧 아기를 낳게 되면 한동안 샤워를 못 할 지도 모르니까. 챙겨뒀던 출산가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하고, 집으로 달려온 신랑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 진통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주차장은 만차였다. 병원 입구로부터 굽이굽이 먼 자리에 겨우겨우 주차를 시킨 뒤, 신랑이 짐을 챙기려는데 내가 막아섰다. 어차피 여기 주차해둘 거고, 당장 짐을 둘 곳도 없고 급하게 필요한 거 아니니까 나중에 입원수속 다 된 다음에 오빠가 짐 갖고 올라오면 되지. 신랑도 무겁게 굳이 들고다닐 바에는 그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짐을 내려놓고 내 손을 꽉 잡았다.


병원에서는 사전검사실이라는 방으로 이동해 옷을 전부 탈의하고 병원복과 산부인과 치마로 갈아입고 누웠다. 그 이후 굴욕스럽다는 내진을 처음 해 봤는데, 왜 굴욕이라고 하는지 너무 뼈저리게 느꼈다. 어쨌든 나는 아파 죽겠는데 정작 자궁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는 황망한 소식을 들었고, 내진을 해 준 선생님께서는 태동검사 때 쓴 것 같은 기계를 내 배에 붙여주고 진통 횟수를 측정해서 알려달라고 하고 방을 나섰다. 결과는? 약 20분 간 진통 횟수가 5회 정도. 3~4분에 한 번씩 진통이 온 셈이다. 방으로 돌아온 선생님은 뽑혀 나온 그래프를 보고 이 정도 진통인데 왜 자궁문이 안 열린지 모르겠다며 다시 한 번 내진을...(ㅠㅠ). 그 사이에 약간 자궁문이 열렸고, 나는 오늘 중으로 자연분만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통 중에도 조금 안심했다.


입원을 위해서는 코로나 검사가 필수였다. 방진복을 입은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나와 신랑의 콧구멍을 찔렀고, 결과는 한시간 반 뒤에 나오니 그때까지 이 방에서 대기하면 된다고 했다. 그 와중에 한 번 더 내진이 있었고, 갑자기 또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진통에 몸부림치는 나에게 너무나 태연하고 무자비하게 이번에는 제모를(ㅠㅠ)... 아픔과 수치스러움에 잠시 넋이 나간 순식간의 사이에 엉덩이 주사도 놔주셨다. 그래도 엉덩이 주사 맞으니까 좀 나아지는 듯했는데, 그랬는데… 걱정스런 얼굴로 내 땀을 닦아주던 신랑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아, 네. 둘 중 한명이요? 누구인지는 안 나왔나요? 아… 일단 알겠습니다… 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코로나 검사를 해 주셨던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우리 둘 중 최소 한 명이 양성이라 격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셨다.


네?;;;


당황도 잠시, 선생님은 단호하게 신랑에게 내 옷을 전부 들고 집으로 귀가할 것을 명했다.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였다. 내 상상 속에서 신랑은 출산 때까지 내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꼭두새벽부터 진통 어플을 봤던 내 폰의 배터리는 10% 가량 남아 있었다. 그리고 충전기는 차 안, 출산가방 안에 있었다. 나는 아까 차에 짐을 두고 오자고 한 걸 후회했다. 신랑과 이렇게 격리되어 버릴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냐만은. 선생님께선 충전기를 빌려 주겠다고 하셨고, 우리는 그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 나는 사전검사실에서 나와 다른 작은 방에 갇혔다. 무슨 문제였는지 선생님께서 빌려주신 충전기는 도저히 충전이 되지 않았고 현재 상황이 불안해서 그런지 진통은 더 심해지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아기를 어떻게 낳아야 하나? 신랑도 없이 어떻게... 그 때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내 인생을 바꿔놓는 것이었는데…


“확진이세요. 확진이실 경우에 저희가 자연분만을 할 수가 없어요. 오늘 저녁에 제왕절개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확진이라는 것보다 제왕절개라는 단어가 더 크게 머리를 울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였다. 자식을 넷 다 순풍순풍 낳은 우리 엄마가 물려준 완벽한 왕골반을 갖고 태어난 내가 제왕절개라니? 게다가 제왕절개를 하면 평생 제왕절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제왕절개로 애를 낳는 건 내 골반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없었다. 코로나 걸린 산모 주제에. 진통과 당황스러움, 두려움이 섞여 덜덜 떨리는 입술로 알았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멘붕이 왔다. 코로나? 제왕절개?


지난 일주일, 아니 한 달 사이 만난 사람들의 숫자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있었다. 도저히 어디서 옮아온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코로나라고? 제왕절개라고?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핸드폰 배터리는 간당간당했다. 아직 차 안에서 격리대기 중이던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그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랑에게서 소식을 들은 친정엄마는 급히 서울행 케이티엑스를 탔고, 남동생도 퇴근 후 바로 병원으로 달려오기로 했다. 어느새 시간이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꺼지기 일보 직전인 폰으로 계속 전화가 왔다. 수술은 6시 정도에 시작한다고 했다. 탄탄아 이게 무슨 일이니. 그래도 너 곧 세상의 빛을 보겠구나. 생각도 못 한 방법이지만.


멘붕 상태로 6시가 됐다. 다섯 살 때 요술공주 놀이한다고 이층침대에서 뛰어내려 쇄골이 박살났을 때를 제외하면 평생 살을 찢는 대형 수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거대 골반의 여성인 나였는데 애를 낳는다고 배를 쭉 찢게 되다니. 인생은 정말 역시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뉴스에서나 보던 음압 카트가 날 태우러 왔다. 타고 보니 투명한 관 같아서 공포감이 배가됐다.

설마 죽진 않겠지?


거대한 병원의 끝없이 펼쳐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동하는 동안 오른쪽 귀 옆에서는 공기가 오가는 건지 털털대는 환풍기와 비슷한 소리가 계속 났다. 음압 카트는 투명했지만 비닐이 울렁거려 바깥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다. 슬슬 해가 지고 있는 창밖 풍경이 살짝 흐릿하니 평소보다 훨씬 근사해 보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참을 달린 끝에 카트는 수술실에 닿았다. <뉴하트> 같은 병원물에서나 봤던 그런 수술실이었다.


수술은 추웠다. 척추에 뚝 소리와 함께 스며들어간 마취약도 추웠고 마취가 먹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몸 여기저기 문대는 알콜솜도 추웠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내 시야를 가린 천조각도 추웠고 아마 엄청난 피를 쏟아냈을 내 자궁도 추웠다. 평생 살면서 그렇게 심하게 떨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주체가 안 될 정도로 온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술실의 적막을 깨고 으앵- 소리가 들렸다. “아기 나왔어요!” 그 때부터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기는 볼 수 없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에 한 번 안기지도 못하고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송됐다. 눈물마저 덜덜 떨리는 듯했다.


수술은 오래 걸린 것 같기도, 얼마 안 걸린 것 같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정신은 멀쩡했는데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친절한 마취 선생님께서 나를 좀 진정시켜 주셨고, 두 다리의 감각과 뱃속의 아이를 빼앗긴(?) 나는 다시 음압 카트를 탔다. 어느새 병원은 어둑해져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길게 달린 것 같은데 카트는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탔던 것 같다. 만약 여기서 저 분들이 내 카트를 버려두고 가면 어쩌지. 하반신도 움직일 수 없고, 카트의 문도 열 수 없는 나는 리터럴리 꼼짝없이 하염없이 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할 터였다.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이나 하다 보니 드디어 웬 병실에 닿았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모두 방진복에 고글까지 쓰고 있는 걸 봐서, 뉴스에서나 보던 코호트 병동인 듯했다.


음압카트에서 내린 나를 보자마자 간호사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옷을 갈아입혀 주셨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쉴새 없이 온몸을 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갑자기 몸에서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가 그랬을 것이다. 간호사 선생님들 중엔 남자 분도 계셨지만 수치스럽고 뭐고 그럴 틈도 없었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 몸도 내 몸 같지가 않았고, 내 정신도 내 정신 같지가 않았다.


오래돼서 늘어져버린 바디필로우처럼 침대에 눕혀진 후 팔에는 진통제와 수액이 꽂혔고 배 위에는 모래주머니가 올라왔다. 거기에 이불을 세 개나 덮고 나니 그때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벽에 걸린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격리된 방에 두고 온 핸드폰은 내 손으로 돌아왔지만, 꺼진 상태였고 여전히 충전기는 없었다.


아침에 짐을 챙겨서 병원에 올라올 걸. 거기서부터 일이 꼬였다. 첫 단추부터 뭔가 잘못됐다.


아기는 뭘 하고 있을까. 아기는 누구를 닮았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내가 코로나 걸린 상태에서 낳아서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닐까. 신랑은 확진일까. 엄마랑 남동생은 왔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텐데 괜히 헛걸음만 하는 건 아닌가. 두꺼운 이불을 덮고 수액을 맞아서인지 떨림은 좀 잦아들었지만, 아기와 신랑을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나는 건 멈출 수가 없었다.


아기 생각에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피곤해서인지 잠이 들긴 했다. 기나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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