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지만 그래도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느끼는 건데, 부부관계가 원만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어엿삐 여기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연애 초반처럼 미친듯이 콩깍지 씌어서 뭘 해도 이쁘고 사랑스럽게만 보이고 이런 게 아니라, 약간 흐뭇한 학부형의 마음 같은 것.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지만 그래도 또 돌아보곤 괜히 저 사람이 그래도 귀엽긴 해 하는 그런 거. 에로스의 캠프파이어가 사그라든 자리에 남은 아가페의 잔잔한 모닥불이 기반이 된 애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삼십대 후반인 신랑은 아직 몇 년 남긴 했지만 그래도 나보단 훨씬 빨리 마흔살이 된다. 그래서인지 자주 피곤해하고 체력이 아주 저질이 되어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같이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으면 계속 꾸벅꾸벅 졸아댄다. 나랑 얘기하다가도 갑자기, 기면증 환자처럼 손에 핸드폰을 놓지조차 못한 채 급속도로 잠들어 버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짠하면서 귀여운 부분이 있다. 얼마나 무던하게 잠을 잘 자길래 저런 자세로 잠을 다 자나 싶어 웃기면서도 동시에 새벽같이 출근해 하루종일 고군분투했을 모습이 떠올라 짠하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신랑이 잘못한 게 있는 날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오르지만(그런 날에는 뭘 해도 쉬룸) 평시에는 그냥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 그렇게 자는 게 귀여워서 새치로 허..얘진 정수리에 뽀뽀를 해 줄 정도로! 물론 연애 때의 에로스 가득한 입맞춤과는 달리 귀여운 아가에게 뽀뽀를 해 주는 마음에 가깝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고 거진 십년을 같이 했는데 그냥 겸둥쓰로 보이는 것이다.
콩깍지까지는 아니고, 그 정도 자체필터가 씌인 덕분에 싸움 없이 행복하게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듯. 실제 주변에 잘 사는 부부들 보면 대체로 뭘 하든 서로를 귀여워한다. 어느 한쪽이 뭔가 잘못을 하더라도 가정 파탄을 불러올만한 문제가 아니고서야 서로가 서로를 어느 정도 귀엽게 보고 있으면 용서도 쉽다. 내 새끼인데 이거 잘못했다고 손절을 하겠어 어쩌겠어. 대신 훈육은 확실하게 해야겠지만. 서로 육아하는 마음으로.
다만 이런 인식이 가끔은 약간 변태같이 보일 때도 있다. 며칠 전 신랑이 갑자기 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우리 와이프, 대학생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커가지고…”라고 하는데 뭔가 키잡(?)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동시에 그런 말을 하는 신랑이 귀엽기도 해서 좀 변태같아 보이면서 웃겼다. 이건 우리의 나이차이가 좀 벌어져서 더 그런 거겠지만…
뭐가 됐든 어느 한 쪽이 부족한 사랑을 갈구하거나 한 쪽만 애 취급을 당하는 게 아니라, 부부 사이에 서로를 어엿삐 여기는 꼴이면 관계가 스무스하게 유지된다는 생각. 뭐 그런 게 사랑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