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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Sep 27. 2021

둔한 여자의 임신 확인기1

냉방병에 걸린 줄 알았지 그게 임신이었을 줄이야

머리가 아팠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두통이었다. 편두통이라고 하기엔 뒷골과 목 전체가 당기고, 또 관자놀이도 아프고, 머리에 피가 엄청 많이 도는 느낌이랄까… 폰이나 컴퓨터로 글을 읽거나 복잡한 생각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다행히 누우면 좀 덜했다.


잠이 왔다. 계속 잠이 왔다. 자고 일어나면 신랑이 밥을 차려줬다. 나 밥 먹이려고 결혼한 거니까 당연하다. 밥을 조금 먹고 나면 또 잠이 왔다. 전날 밤 11시부터 오늘 아침 11시까지 잤는데도 올림픽 보고 있으니 또 잠이 왔다. 올림픽 경기는 스릴이 넘치는데 나는 머리가 아파서 집중도 안 되고 졸려서 또 잠을 잤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저녁 먹고 또 드러누웠다가 잠을 잤다. 태아라도 된 마냥 잠깐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종일 잠을 자며 보냈다. 잠을 자지 않으면 머리가 아팠다.


이상했다. 난 이런 체질이 아니다. 배가 부르면 답답해서라도 잠을 못 자는 사람이었다. 바깥에 한참 운동하고 땀 쫙 빼고 돌아와서도 밤 되면 잠 못 이루던 불면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위 먹었나? 아마 냉방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숨도 안 쉬어질 만큼 더웠다가, 또 회사에서는 스튜디오에서는 집에서는 이빨이 달달 떨릴 만큼 추웠으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도 자주 냉방병에 걸렸던 나였다. 게다가 팬데믹 시대, 건물을 오갈 때마다 측정하는 체온계는 늘 ‘정상 체온’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지하지 못했다. 지난 팬데믹 시대 내내 웬만하면 36도를 넘지 않던 내 체온이 요 근래 들어 매일 36.5도 이상을 찍고 있었다는 걸.


신랑이 없던 어느 저녁이었다. 너무 더운 날이었고, 애초에 더위를 먹었다고 판단한 상태였기에 평소 자주 시켜먹던 일식집에서 냉소바를 주문해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소바가 오니 젓가락이 안 갔다. 세트로 온 돈까츠랑 가라아게만 몇 점 집어 먹다가 그래도 아까워서 몇입 떠먹었는데, 얼마 안 가 토기가 몰려왔다. 순식간에 다 게워냈다. 쯔유 냄새가 너무 역했다. 이 가게의 소바는 몇년 째 더운 날이면 종종 시켜먹던 것이었고, 평소와 맛이 다르지도 않았고, 나는 쯔유 국물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변기에 게워낸 토사물의 물을 내리면서, 단순히 더위먹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제서야 생각했다.


사실 요 근래 계속 이랬다. 저녁을 먹고 나면 괜히 이상하게 헛구역질이 났고, 회사에서도 양치를 하다 갑자기 치약 민트향이 역하게 느껴지면서 욱, 하고 토기가 올라와 변기로 뛰어가기도 했다. 갑자기 새우죽이 너무 먹고 싶어서 시켰다가 반도 안 먹고 토할 것 같아져 덮어버리기도 했고,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서브웨이 에그마요를 30cm나 혼자 다 먹어치우기도 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술이 땡기지 않기까지.


더위 먹어서 그렇겠지하고 넘기기엔 증상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니. 잠깐만. 헐.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택근무하는 월요일 아침, 사 두고 안 썼던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그리고 결과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만큼 당연하게도 두 줄이 선명했다.


결혼한 지 어느덧 3년 차, 이제 30대도 됐고, 안정적 거주 환경까지 갖췄으니 언제든 아이가 찾아와도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따로 철저한 계획을 한 적은 없었기에 막상 이렇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냥 ‘어안이 벙벙’했다.


임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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