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비행 시간 동안 주절주절 써보았던 것
거의 만 3년 만에 해외 가는 비행기 탑승 중. 중국 우한발 미스테리 폐렴이 세계를 강타한 팬대믹으로 진화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곳이 다낭이었는데 국경이 열리자마자 가게 된 곳도 다낭이다. 출장 덕분이다. 굿.
싫지 않았다. 나는 다낭이 꽤 좋았다. 나쨩보다 훨씬. 나쨩이 완전한 공산국가스러웠다면 다낭은 진짜로 ‘경기도 다낭시’ 같았던 것이다.
같은 나라고, 똑같이 동쪽 해안가에 자리한 지역이었지만 쌀국수 먹는 방법부터 5성급 호텔 내 서비스, 영어 사용자 수, 그랩 기사들의 마인드 등 많은 부분에서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다낭은 한국인들이 어마무시하게 방문하고 나쨩은 러시아 군인들의 휴양지였다니 그 영향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국같지 않은 나짱을 더 좋아하겠지만, 나는 적당히 한국 같은 다낭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오랜만에 온 인천공항은 여전히 크고 넓었다. 그간 못 한 면세 쇼핑을 원없이 하겠다는 각오로 비행시간보다 아주 이르게 도착했지만 계속 업무가 도착하는 바람에 쇼핑을 즐길 시간은 짧았고 막상 둘러보니 딱히 내 마음을 흔드는 물건도 없었다.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팠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처럼, 돌아다니는 여행객들로 가득 찬 그 드넓은 공간에서 나는 잠깐 멈춰서 온몸으로 배고픔을 느꼈다. 하지만 푸드코트의 줄은 너무 길었고, 앉을 자리도 없었다. 결국 나는 평소라면 (비싼 가격과 spc라는 장벽 때문에) 절대 안 갈 파리크라상에 자리를 잡고 만사천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고작 빵쪼가리와 씨거운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이륙하는 비행기들이 보이는 세상 근사한 뷰를 앞에 두고 나는 인스타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인스타 돋보기에는 왜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 많을까. 귀여운 가구와 소품, 빈티지 명품 같은 걸 보다가 네이트판에 올라온 시어머니와의 갈등 썰도 좀 봐주고, 재미있는 유튜브 콘텐츠를 오려낸 릴스도 잠깐씩 보던 중 의도치 않게 옛날에 아주 가까웠으나 지금은 전혀 뭘 하고 사는지 모르고 살던 인물의 근황을 접했다.
인스타의 세계는 좁다. 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와 그의 사이에는 하나의 지인이 남았다. 그의 전체공개 계정에 올라온 사진을 내 지인이 좋아요 했고, 그래서 그 사진이 내 돋보기에 뜬 거다.
인스타가 없었더라면 전혀 알지 못했을, 굳이 알 필요가 전혀 없는 이런 21세기스러운 사적 정보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tmi는 좀 더 광범위한 느낌이고. 구체적인 이름이 없는 게 아쉽다.
사진 속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딸바보 아빠가. 아장아장 걷는 딸은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억이란 참 신기하다. 사실 평소에는 얼굴도 기억 안 났었는데 사진을 보니 전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십여년 전 그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애 낳으면 무조건 친자검사 하도록 법을 제정해야 해. 남자는 평생 속아서 살 수도 있잖아.” 나는 그 때 그에게, 뻐꾸기같은 케이스보다는 나처럼 아빠랑 똑같이 생긴 채 태어나는 아이들이 훨씬 많을 텐데 그런 아이들까지 국가의 돈을 들여 검사하는 건 비효율적이고 세금 낭비라고 했었다. 그는 그럼에도 그런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었던 거 같다. “야, 너 내가 그럴 것 같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님 뭔데?”
그러고 싸웠었던가? 잠시 그의 이십대 초중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새삼 별로 좋지 않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혀를 끌끌 찼다.세상에, 그딴 식으로 살아온 남자가 딸을 낳아 기른다니!
한심해하던 중 문득, 저 딸바보 아빠에게 나의 이십대 초중반 시절 모습 역시 그닥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역시 인스타 돋보기에 우연히 뜬, 우리의 공통 지인 1인이 ‘좋아요’를 누른 나와 아가의 사진을 보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이십대 초중반 시기를 그딴 식으로 보낸 여자가 애를 낳아 기른다니!’
새삼 나는 그 한심한 시기를 극복하고 훌륭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했는데 쟤라고 못했을 건 없지 않나… 싶었다.
이십대 초중반은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시기다. 어제와 또 내일과 다른 가치관을 만들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유일한 나이다. 한심한 대학생1에 불과했던 나 역시 지금은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어른이 되어 잘 살고 있듯, 쟤라고 그거 못할 이유는 없었다. 내 기억속 그가 한심한 인간이었던 것과는 아주 별개의 일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차원 더 깊은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역지사지와 자아성찰이 한꺼번에 잘 되는 성숙한 인간인 것이다. 물론 이 글을 보면 남동생이 우쭐이 심하다고 맹비난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정말 성숙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걸?
그렇게 어른이 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대체 착륙은 언제 하나. 비행기는 너무 지루하다. 이렇게 길게 썼는데, 아직 한 시간밖에 안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