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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님 Jan 21. 2020

소확행의 진실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만원을 주고 품에 안은 네 캔의 수입맥주, 땀 흘리며 먹는 아주 매운 떡볶이, 침대에 누워 보는 영화 한 편….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바로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인 ‘소확행’은 2019년 트렌드 키워드로 꼽히기도 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소확행이라 일컫는다. 사람들은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만의 행복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삶을 충만한 행복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2030 세대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되었으며, 소비 트렌드로까지 확장되었고, 단순한 트렌드가 아닌 나아가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들에 도취해 있자니, 어쩐지 놓치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다. 


  

( 이슬아의 책/ 학교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들 )필자의 소확행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어떤 흐름에서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 사실 소확행이라는 말은 30여 년 전 일본에서 먼저 등장했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그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며 이렇게 묘사했다.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의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있는 것.” 

  그의 소확행과 우리들의 것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과 우리들의 소확행은 그 기원에 차이가 있다. 책이 등장한 1980년 당시 일본은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 속 물질적 소비와 황금만능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차원에서 등장한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시한 일본의 소확행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확행의 등장은 그 배경이 일본과는 판이하다. 대한민국에서 소확행은 경제성장 둔화와 낮은 청년 고용률, 과열된 경쟁 등으로 암담한 상황 속에서 거대담론을 이야기할 여유가 없는 세대가 오늘을 버티기 위해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경향에서 시작되었다. 얼핏 보면 자신만의 취향을 찾고 오롯이 자신의 일상에 몰입하여 그 안에서 행복을 얻는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의 성공과 성취를 얻지 못하고, 계속해서 커다란 행복만을 좇기에는 이젠 지쳐버린 한국의 청춘들이 위안을 얻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우리의 소확행이다. 


  소확행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택하는 것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큰 차이가 있다. 하루키의 책 속에서의 소확행은 크고 작은 여러 행복의 형태 중에서 본인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한국 사회는 소확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소확행밖에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행복이라는 물음에 저마다의 답변을 자유롭게 써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소확행이라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주어진 사회이다. 

  소확행이 등장한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보았을 때, 소확행은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모태로 둔다고 할 수 있다. 무한한 경쟁으로 점철되어있지만, 모두가 노력하면 공정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현실 속에서 사회는 지쳐버린 청년들에게 ‘소확행’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건넸다. 하지만 그 배경이 어찌 되었든 젊은 세대들은 지금 그 달달한 소확행에 열광하고 있다. 이는 우리는 소확행을 통해 행복을 찾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위안을 얻는 것일지도, 팍팍한 사회에서 조그마한 행복들을 꼭 붙잡고 모순된 사회에 순응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커다란 행복을 손에 쥘 수 없어 그저 내려놓고 순응해야만 비로소 웃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물론 행복의 크기는 어떠한 기준으로도 재단할 수 없는 개개인의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말하고 있는 소확행은 ‘대 확행(大確幸)’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청년들을 달래기 위해 잠류 할 뿐이다.


  청년세대에게는 일시적인 행복도 좋지만 더 근본적인 행복을 필요로 한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보금자리, 쉴 수 있는 노동환경, 경제적 여유, 지속 가능한 안정성을 원한다. 자신이 노력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사회에서는 더 큰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때로는 커다란 행복을 위해 눈앞의 작은 행복을 기꺼이 미뤄둘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일상 속에 스민 ‘소확행’도 좋지만 ‘커다랗고 확실한 성취와 행복’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러한 ‘원대한 행복’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서만이 소확행은 그 진정한 의미를 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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