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32
대공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에 여전히 위대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는 피렌체가 그들 가문의 도시임을 재확인했고, 그 외관을 결정하는 마지막 퍼즐들을 맞추었으며(우피치, 피티 궁전), 후손들이 피렌체를 온전히 통치할 수 있도록 체제의 안정을 닦아놓았다.
메디치 가문의 영달은 코시모의 대에서 정점에 이른다(프랑스의 실질적 통치자로서 메디치 역사상 가장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었던 카테리나 메디치는 논외로 한다). 이 사실은 그의 역량을 방증하는 동시에 뒤를 이은 여섯 메디치 대공(프란체스코 1세-> 페르디난도 1세-> 코시모 2세-> 페르디난도 2세-> 코시모 3세-> 지안 가스토네))이 그에게 견줄만한 됨됨이를 보여주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냉정하고 과묵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무서운 행동력을 보여주었던 코시모와 달리 그의 후손들은 피티 궁전에 틀어박혀 국정을 등한시하고 그들의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메디치 가문의 자손들답게 예술과 과학의 후원을 꾸준히 지속한 덕분에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갈릴레오를 비롯한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의 후원, 피에트레 두레 기법과 오페라의 탄생) 이 또한 황금기 피렌체의 업적에 견줄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사코 디 로마(로마의 약탈(1527))의 참상 속에서 클레멘스 7세는 적극적인 외교전을 통해 가문의 생로를 확보해 냈다.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코시모 또한 피렌체의 지정학적 이점을 십분 외교에 활용하여(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간의 전란을 틈타) 피렌체의 위상을 대공국으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굳어진 생존전략에 따라 메디치가의 대공들은 추후에도 다른 어떤 정치적 사안보다 유럽의 왕가들과 정략결혼을 성사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의 부단한 노력은 메디치가 친인척이 유럽 전역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는 쾌거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역시 사적 쾌락에 탐닉하는 무기력한 인물들을 거듭해서 통치자로 옹립하게 되는 불운을 상쇄시키지 못했다(반면 메디치 가문 이야기의 저자 G.F.영은 기록된 메디치가 사람들에 대한 악평 중 상당 부분이 메디치 가문을 향한 나머지 귀족 가문들의 시기에서부터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탁월한 역량을 증명함으로써 공화국의 평범한 은행 가문에서 대공국의 왕가로까지 도약한 메디치가는 어느새 유럽 왕가의 폐습을 반복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대공들 모두가 완벽하게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메디치 가문은 16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초반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유럽 내 전란의 소용돌이로부터 피렌체를 지켜냈다. 열강이 30년 전쟁,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대규모 분쟁에 정신이 팔린 사이, 피렌체는 과학, 예술, 공예 등의 메디치 특유의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실크와 양모 산업 또한 다시금 과거의 위상을 회복했다. 항구도시 리보르노를 상업 특수구역으로 지정하여 대대적인 지원을 감행한 페르디난도 1세의 정책은 토스카나 대공국을 지중해 무역의 최강자로 부상시켰으며, 피렌체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 내 세력다툼의 저울에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무게를 실을 수 있었다.
이 시기 피렌체가 이루어낸 예술, 문화, 과학 분야에서의 업적 역시 사소하지 않다. 메디치 대공들은 갈릴레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전 유럽으로 전파했고, 유럽 최초의 과학 협회(Cimento)를 창설했으며, 메디치 영묘 건설 과정에서 발전된 피에트로 듀로 공예를 도시를 대표하는 공예로 성장시켰다. 무엇보다 그리스 비극을 부활시키려는 취지에서 시작된 연극과 음악의 접합이 오페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페라는 이탈리아가 문화적 패권을 상실한 18, 19세기에도 나폴리, 베네치아 등의 도시들이 음악의 성지로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메디치 통치 마지막 200년 동안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예술품 수집과 미술관 증축 사업 또한 주목할만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오늘의 피렌체를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대공 취임 이전 로마에서 생활했던 페르디난도 1세와, 페르디난도 2세의 동생이었던 레오폴도는 모두 추기경 시절, 교황들이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틈을 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고대 조각품들을 구입하여 피렌체로 운반하였다. 이 두 추기경이 가져다 놓은 무수히 많은 조각품들이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의 회랑을 수놓고 있다). 다만 한 때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를 배출했던 피렌체는 한번 잃어버린 문화적 입지를 되찾지 못했다. 전 유럽적 유행이 매너리즘을 거쳐 바로크적 표현주의의 전성기로 들어선 후에도 피렌체는 여전히 르네상스 대가들의 복제품을 생산하는 데 집중할 만큼 고유의 고전적 취향을 고수했다. 이는 르네상스 전성기(하이 르네상스)에 확립된 양식에 어긋나는 ‘퇴보’를 용납하지 못하는 피렌체인들의 고귀한 안목을 고백하는 것인 동시에, 더 이상 피렌체가 예술의 유행을 주도하지 못하게 됐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메디치가의 여섯 대공>
코시모의 사망 이후 대공의 자리에 오른 프란체스코의 치세(1574-1587)는 짧았다. 기술할만한 사실 역시 많지 않다. 그는 코시모의 비상함을 물려받았으나, 그것을 통치보다는 보석과 유리 세공, 연금술, 화학, 생물학 시험에 발휘했던 인물이다. 반면 그의 뒤를 이어 대공의 자리에 오른 동생 페르디난도(대공 페르디난도 1세: 1587-1609))는 언급한 여섯의 대공 중 가장 나은 역량을 보여준다. 그는 갈릴레오를 아들 코시모 2세의 교사로 고용함으로써 피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고전분투하고 있던 갈릴레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메디치 가문의 영묘 제작을 기획하여 그 건설을 명했으며, 리보르노의 대대적인 발전 사업을 추진했다. 그중 인근 항구 리보르노를 특수 상업 지역으로 지정하여 종교와 상업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주요 항구도시로 발전시킨 선택은 큰 성과를 가져왔다. 코시모가 일찍이 양성한 강력한 해군, 여전히 건재한 양모와 실크 산업과 함께 제노바, 베네치아와 견줄만한 무역 중심지로 성장한 리보르노는 피렌체를 새로운 지중해의 지배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사망 이후 아들 코시모 2세가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대공으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그의 옛 교사 갈릴레오에 대한 후원을 지속한 것, 피티 궁전을 이전의 세 배의 크기로 증축한 것, 대공가문에 어울리지 못한 활동이라는 이유로 메디치 은행의 폐업을 결정한 것뿐이었다. 그는 대공 자리에 오른 지 11년(1609-1620) 만에 숨을 거두었다.
반면 그의 뒤를 이어 10세에 왕위에 오른 아들 페르디난도 2세의 치세는 무려 50년간(1620-1670) 이어졌다. 이 시기는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이 유럽 내에서 완벽하게 그 입지를 상실한 시점이었다. 우선 피렌체의 경제가 완벽하게 몰락했다. 리보르노가 가져온 일시적인 호황이 1630년에 창궐한 역병과 함께 끝을 맞이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역병과 동시에 들이닥친 흉작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피렌체 경제의 두 기둥인 양모, 실크 산업과 은행업 역시 다시는 이전 수준으로 일어서지 못했다. 국채의 값이 폭락했고, 토스카나 교외에서는 물물교환이 다시 재개될 정도로 화폐 부족 현상 역시 심각했다.
국가적 난항을 타개해야 할 페르디난도 2세는 인자하고 사려 깊었으나 결단력이 부족한 군주였다. 그는 10세 소년으로서 왕위에 올라 섭정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국사를 맡긴 채 청년기를 보냈다. 사제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그녀들의 관용을 교황파 세력이 남용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남은 메디치 가문 역사 100년에 있어서 이 사건은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잔존하던 사보나롤라식 신정 사상으로 무장한 사제들이 시민들의 일상에 다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게 됐다. 동시에 전통적으로 종교와 세속적 삶 사이의 거리를 확보해 주었던 메디치 가문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시점이었다. 이후 사제들은 반종교개혁의 영향 하에 종교재판, 면세권, 십일조의 특권을 광범위하게 남용함으로써 대공의 권위와 도시의 재정 상황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게 된다.
갈릴레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코시모 2세의 아들 페르디난도 역시 메디치 전통의 인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과학과 예술을 열정적으로 후원하고, 민중의 고충을 진심으로 걱정했던 군주로 기록돼 있다. 전술한 역병(1630)이 도시 인구의 1/10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에도 피렌체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그 외 부유한 시민들은 거의 모두 피렌체를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결정적으로 스스로의 신념을 밀고 나아갈만한 강단이 없었다. 그의 아내인 우르비노 출신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와의 혼인 당시 약속받은 우르비노 공작령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막무가내로 점령해 버렸을 때(1626), 몇 차례의 항의 끝에 너무 쉽게 그 권리를 포기해 버린 사건은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
그의 유약함이 초래한 폐단 중 가장 뼈아팠던 것은 후계자 코시모 3세의 교육을 아내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의 주도하에 사제들에게 맡겨버린 결정이었다. 오직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를 합병하기 위해 피렌체로 보내진 그의 아내는 피렌체의 수녀원에서 기독교 수도승의 윤리만을 공부하며 자랐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렇게 학습한 편협한 이념의 더더욱 편협적인 해석만을 평생 고수했던 다소 아둔한 여성이었고, 차기 대공인 아들 코시모 3세에게 수사에 어울리는 종교적 교육을 주문할 만큼 독단적이었다. 맹목적인 그녀에 비해 페르디난도 2세는 원하는 바를 고집하기보다는 갈등을 기피하는 쪽을 택하던 남자였다. 결국 코시모 3세는 대공국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승에게나 어울릴만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게 되었다. 이 결정은 이미 시작된 국력의 쇠락을 급속도로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페르디난도의 뒤를 이은 코시모 3세의 치세(1670-1723)는 무려 53년이나 이어진다. 그는 메디치의 그 어떤 지도자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의 치세 53년간 유럽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한다(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1678), 9년 전쟁(1688-1697),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피렌체는 음울한 성격에, 대인기피증 성향이 있고, 종교적 의식과 육체적 쾌락에 지나치게 탐닉하던 코시모 3세를 군주로 맞이하게 된다. 사제들의 세력은 지나치게 성장했고, 그들의 주도하에 모든 과학, 예술적 활동이 극심한 규제를 받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비롯한 이교도에 대한 종교 자유가 박탈됐으며, 종교재판의 형법은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게 집행되었다. 무엇보다 매년 세금이 인상됐고, 어김없이 사제들은 면제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도 코시모 3세는 오로지 그의 식탐과 종교적 취미에만 탐닉했다. 세금 중 상당량이 출처가 불확실한 성유물과 산해진미에 탕진되었다(말년의 그는 매일 대여섯 곳의 교회를 찾아 의식에 참여할 만큼 사후의 영달을 위해 열성을 드렸다). 피렌체의 산업은 황폐해져 갔고, 전통 산업인 양모업 역시 기존 규모의 절반에조차 이르지 못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인구 역시 5만을 밑도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비대해진 몸으로 여든 하나의 나이까지 장수를 누리고서 1723년 사망한 코시모 3세의 뒤를 이어 메디치가의 마지막 대공이 된 이는 차남 지안(지오반니) 가스토네(통치 기간: 1723-1737)였다. 아버지의 단점을 모조리 물려받은 그는 작센라우엔부르크의 공작 가문의 딸 아나 마리아 프란치스카와 이루어진 정략결혼의 결과로 그가 끔찍하게 혐오했던 보헤미아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 아버지 코시모 3세가 피렌체로 귀환을 허락해주지 않는 바람에, 그는 혐오하는 시골 마을 속 성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청년기를 보냈다(산골 사냥꾼을 연상시키는 성품을 가진 여성이었던 그의 아내는 그를 성에 두고서는 매일같이 사냥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1723년, 코시모 3세의 뒤를 이어 대공의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임기 초반에는 지나치게 높은 세금과 가혹한 형법을 폐기하고, 예술과 과학의 탄압을 금지하는 등 의욕적으로 국가쇄신에 힘을 쏟는 모습을 보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국정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곧 유치한 향락에 탐닉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피티 궁전에서 루스판티라 불리던 젊은 미소년들과 소란스럽게 유희를 즐기는 데 탐닉하며, 비대해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침기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의 몰골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서 후계자를 기대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었는데, 가문의 마지막 남아였던 그의 치세에 계보의 끝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 데 메디치>
피렌체의 국제적 입지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페르디난도 2세가 집권한 1620년부터 급격한 국력의 쇠락을 경험한 피렌체는 진 가스토네의 대에 이르러 국가의 운명을 열강의 칼날에 맡기게 될 처지에 놓였다.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는 지안 가스토네를 초대하지도, 그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1736년, 지안 카스토네의 사망 시 오스트리아(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토스카나 대공으로 삼기로 합의한다. 스페인군과 오스트리아군은 피렌체에 군대를 출동시켜 서로를 향해(피렌체 대공의 의사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무력시위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가스토네와 그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는 강대국의 횡포에 분개하면서도 스스로의 무력함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안 카스토네는 1737년 숨을 거두었다. 이제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는 그의 동생 아나 마리아(1667-1743)였다. 스물넷의 나이에 팔츠 선제후와 혼인했으나 그의 사망 후 과부로서 피렌체로 귀환하여 피티 궁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일찍이 말년의 코시모 3세는 그녀의 남다른 기지를 알아보고서 그녀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가스토네의 사망 시 후계자 자리를 안나 마리아에게 위임하고자 하였다. 물론 열강은 그의 유지를 묵살했다. 가스토네의 사망과 함께 그녀는 응당 그녀에게 왔어야 할 피렌체의 통치권을 두고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가 연이어 전투를 벌이고, 그녀의 소유여야 할 피티 궁전이 천박한 취향의 외국 총독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목격함과 동시에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로서 긴 역사의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만 하는 얄궂은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는 그녀가 느꼈던 환멸을 그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가 피렌체에 도착하기까지 임시 군주로서의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그 치욕적인 제의를 거절했고, 검은 차양과 은으로 장식한 방에서 조용히 칩거하면서, 피티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을 채우게 될 미술품을 수집하고, 메디치 성묘 공사 완성에 모든 힘을 집중하며 말년을 보냈다.
남다른 역량의 소유자였던 그녀와 함께 메디치 가문은 기품 있는 모습으로 위대했던 계보의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마지막 기지는 가문의 모든 재산과 예술품과 건축물을 토스카나 정부, 즉 오스트리아 대공의 소유로 위탁하는 대신, 그중 한 점도 영원히 피렌체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어둔 것이었다. 그녀가 피렌체에 남긴 메디치 가문 사유재산의 양은 막대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피치, 바르젤로 미술관, 피티 궁전, 메디치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막대한 양의 미술품들과 사치품들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타도시의 미술품들처럼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일신과 주변인들의 안위가 아닌, 메디치 역사의 무대가 되어준 피렌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 마지막 제스처보다 더 귀족적인 것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그들의 도시 피렌체를 진정으로 아꼈던 가문이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묘비에는 ‘메디치의 마지막’인물이라는 비명이 적혔다) 수차례의 수난에도 끝끝내 피렌체와 그 운명을 함께 했던 메디치 가문은 이제 완벽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메디치의 몰락과 함께 독립 국가 피렌체의 명맥 역시 그 종말을 맞이했다. 1737년, 합스부르크가 의 프랑수아 2세가 피렌체의 대공으로 즉위했다. 메디치 가문의 문양이 도시의 건축물들에서 제거됐고, 그들이 지정한 축제가 폐지됐으며, 행정부의 모든 관리가 로렌 사람들로 채워졌다. 몸가짐이 천박한 대공의 대리인이 금세 피티 궁전 내부를 천박하게 꾸며 놓았으며, 메디치 가문의 어마어마한 양의 옷가지와 장신구들이 무참하게 팔려나갔다. 박물관에 기증돼 마땅한 아름다운 옷가지와 장신구들이 소재와 종류에 따라 조각조각 분해되어 팔려 나가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향유했던 우아함의 수준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 몰상식한 ‘돈벌이’가 무려 10년간 계속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