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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l 04. 2023

지상 낙원 캄파니아

나폴리 2

온화한 기온, 광활한 지중해, 비옥한 화산 토양이 공존하는 캄파니아 주는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다. 잔잔한 바다, 천연 온천, 광활한 평야를 품은 땅에서 다양한 곡물과, 최상급 올리브, 토마토를 비롯한 과일과 채소가 경작되며,  맛 좋은 와인, 수많은 종류의 꽃에서 증류된 향수, 이스키아의 흙으로 제작되는 식기와 같은 다양한 특산품이 넘치던 이 고장을 로마인들은 캄파니아 펠릭스(Campania felix- 행복한 캄파니아)라 불렀다.

고대 캄파니아의 지도

(캄파니아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지만, 이 지방 토착민을 일컫는 '캄파니'족의 이름을 따서 '캄파니족의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반면 '캄파니'는 나폴리 북쪽에 위치한 도시, 카푸아의 토착민, 즉 '카푸아 사람들'을 가리킨다.)


지상낙원의 수도를 그들의 것으로 점지받은 나폴리인들은 신에게 감사를 올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선 탄생신화의 주인공 파르테노페를 위한 축제가 있었다. 그녀는 나폴리인들의 수호성인으로서 그 의식에는 음악, 연극, 동물 희생제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성대한 축제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추수의 여신 데메터,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위해서도 반복되곤 했다. 특히 나폴리와 격앙의 신 디오니소스의 사이는 각별했다. 나폴리인들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광란에 그들 고장의 특산물인 와인, 바다, 여인들의 매혹을 더하곤 했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종교적 행사에 와인, 만찬의 향락이 더해졌다.  모두 와인의 열기에 휩싸이면 밤의 어둠이 모든 정숙함을 소멸시켰고, 남녀노소가 뒤엉켜 모든 종류의 육욕의 향연에 탐닉했다. 누구도 빠짐없이 그들이 가장 갈구하는 쾌락을 그곳(네아폴리스/나폴리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충족시킬 수 있었다. (리비)  


훗날 로마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나폴리의 탐락을 경계해야 한다고 거듭 상기하면서도(세네카), 그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는데(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 훗날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도 나폴리의 디오니소스 숭배 풍습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벽화. 디오니소스를 중심으로 아프로디테와 아폴로가 양옆에 자리한다.



지난 포스트에서 전술했듯이 나폴리는 쿠마의 항구로서 탄생했다. 언덕 위 성벽 사이 세워진 도시 쿠마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퇴치하기 위해 드넓은 해안에 그들의 전진기지, 네아폴리스를 건설했다(나폴리 사람들은 해안선의 모양새를 따서 그들의 도시를 Il Cratere – 큰 사발이라 부른다). 하지만 후발주자 네아폴리스는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기원전 5세기 중반, 이미 쿠마를 제치고 캄파니아 최대 도시로 부상한다. 방대한 물자가 인구 3만에 이르는 지중해의 중요 항구 나폴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장에 기여한 것은 지중해를 완벽하게 그들의 바다로 만들려 한 아테네와의 활발한 교류였는데, 마그나 그레키아의 또 다른 항구, 시라쿠사(시칠리아에 위치)의 몰락 이후 나폴리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아테네의 모든 문화적 성취가 나폴리를 통해 남부 이탈리아로 전파되었고, 그리스의 연극, 철학, 음악 외에도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와의 지적교류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그나 그레키아 시절 나폴리는 현재 첸트로 스토리코(구시가 중심)에 해당한다. 사진은 네아폴리스의 아고라가 위치했던 산 로렌초 마지오레 교회 앞 광장.


이런 나폴리를 반도의 새로운 강자, 로마가 탐낸 것은 당연했다. 기원전 4세기, 공화정 로마는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여태까지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샘나이족(오스칸 언어를 사용하는 반도의 토착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캄파니아 주의 카푸아, 놀라, 네아폴리스 등지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던 샘나이 족의 '예속' 행위를 규탄하며 전쟁을 위협한 것이다. 샘나이족 역시 그들의 영역을 넘보는 로마에게 리리스 강 이하를 넘보지 말 것을 경고하며 맞섰고, 이는 결국 기원전 343-290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지속된 샘나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맞선 둘 사이에서 네아폴리스/나폴리가 취한 자세는 모호했다. 328년에는 로마를 상대로 샘나이족과 연합하여 투쟁하기도 했던 나폴리였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샘나이족으로 이루어진 카푸아, 놀라, 폼페이 등과 달리 나폴리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도시였다. 과두정의 지배 세력 상당수 역시 그리스 귀족이었고, 이들은 분명 토속 캄파니인들에 비해 로마에 더 호의적이었다. 나폴리의 지도부가 샘나이 전쟁 내내 친 샘나이 세력과 친 로마 세력으로 첨여하게 분열했던 사실에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326년, 결국 최종 승자 로마와 네아폴리스 사이 Foedus Neapolitanum- 협정이 이루어진다. 나폴리는 정치적 독립을 보장받는 대가로 나폴리 항구의 이용을 로마에 허락하기로 합의한다. 동맹 도시국가로서 나폴리는 로마와 동등한 입지를 약속받았고, 나폴리의 중요한 입지를 잘 알고 있던 로마는 통상적으로 동맹국에 요구하던 군사 동원마저도 강요하지 않았다.


이후, 지중해의 지배자를 꿈꾸는 로마를 위해 나폴리는 든든한 동맹국 역할을 행세한다. 카르타고를 상대로 치러낸 1차 포에니 전쟁 중 나폴리는 로마와 시칠리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를 연결하는 군사용 항구 역할을 톡톡하게 해냈고,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로마를 위해 배와 선원을 제공하여, 로마가 시칠리아를 손에 넣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이탈리아 반도를 파죽지세로 가로지른 한니발과의 포에니 2차 전쟁 (218–201 BCE)은 나폴리가 결정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 낸 전쟁이었다. 캄파니아로 직접 진군해 온 한니발의 군대 앞에서 이제까지 로마의 식량고를 담당하고 있던 카푸아와 놀라가 로마와의 동맹 관계를 파기하고 한니발의 편을 드는 위기가 찾아왔다(기원전 216-211). 반면 코앞까지 찾아온 한니발의 위협 앞에서도 나폴리는 로마와의 의리를 지키며, 도시 내 물자를 총동원하여 로마군의 군량미를 책임졌다. 로마를 위한 나폴리의 이러한 결정적인 공헌은 이후 나폴리가 캄파니아와 지중해 농산물 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 후 확립된 로마 중심의 세계에서 나폴리는 이제 자연스레 로마의 도시로 편입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폴리가 팔레스트리나, 티볼리와 함께 로마 공화정의 정식 피난처로, 즉 사형 선고를 받은 로마인들이 처벌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락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도시로 지정됐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이러한 제도는 갑작스러운 정치적 박해의 위협을 받고 있던 지배층을 위한 것이었고, 예사치 못하게 역적으로 지목되는 비일비재했던 당시 로마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원로원이 합의하에 안전을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해 둔 것이다. 그들은 로마에서의 치열한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 아름다운 나폴리에서 호화로운 빌라를 짓고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선택의 배경에는로마 지도세력의 아름다운 땅 캄파니아에 대한 선망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완벽하게 로마 체제로 편입된 나폴리의 이야기를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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