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9
페데리코 세콘도 대학. 1224년 설립된 나폴리를 대표하는 대학이다. 세계 최초의 민간 국립대학이자 유럽 최대 대학 중 하나다. 공화국 이탈리아의 대도시 나폴리의 중심에 위치한 교육기관이 권위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중세 황제의 이름으로 여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황제 페데리코 2세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아우르던 대제국의 통치자, 샤를마뉴와 나폴레옹 사이 천 년간 가장 큰 권력을 소유했다는 평을 받는 존재다.
페데리코는 플레비시토 광장 두 번째 조각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전 유럽을 호령했던 남자였지만, 오늘날 그가 남긴 유산을 감각할 수 있는 곳은 남부 이탈리아뿐이다. 페데리코 세콘도 대학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남자로 성장한 독일 혈통의 황제, ‘풀리아 소년’이라 불리던 그가 이 도시를 각별하게 생각했음을 증거하는 표식과도 같다. 800년 전 설립된 이 학인 양성소를 여전히 도시의 심장에 두고서 이를 설립한 그의 이름을 여전히 즐겨 입에 올리는 나폴리 사람들은 그들 도시를 위한 이 황제의 헌신에 여태 뜨겁게 응답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이름을 말하는 그들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호의의 배경에는 황제 페데리코의 삶의 족적이 있다. 바르바로사와 루제로 2세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그 유산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자신의 손으로 굴복시켜야 했던 그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교황청의 권위를 역사상 최고 정점까지 끌어올린 이노켄티우스 3세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그는 평생 교황청과의 투쟁을 이어가야 했고(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평생을 ‘반역자’로 살아야 했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인물로서 교황의 영향력으로부터 왕국을 지켜내는 데 평생을 바친 황제이기도 했다. 만약 그의 서사가 민주주의 국가 이탈리아의 대도시 나폴리의 오늘과 충돌했다면, 2024년 나폴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지금처럼 거리낌없이 부를 수 없었을 테다.
그는 1194년 12월 26일 예시에서 태어난다. 훗날 그의 제국을 물려받을 아들이 시칠리아에서 태어나기를 바랐던 남편 엔리코의 명에 따라 만삭의 황후 콘스탄체는 팔레르모로 향하던 길이었다. 하지만 시칠리아행 선박이 기다리는 바리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채, 그녀는 아드리아 해를 마주한 항구 안코나 근방의 마을 예시에서 산통을 느낀다. 이곳에서 아이를 출산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도시의 중앙 광장에 대형 텐트를 설치할 것을 명령한다. 신성로마제국 황가와 시칠리아 왕가의 후손이 세상에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약 그의 출생에 관한 의문의 여지가 존재한다면, 훗날 아이의 정적들이 이를 집요하게 파고들 것임을 내다보았다. 당시로는 드물게 마흔의 나이에 초산을 하는 그녀였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함을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예시 사람들 앞에서 몸을 풀기로 결정한다. 마을의 기혼여성 중 다수가 천막 안에서 산통을 겪는 그녀를 직접 볼 수 있었고, 추후 아이가 태어난 후 젖을 물리고 있는 황후의 모습을 앞다투어 살피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이 수많은 목격자들은 페데리코가 ‘제시의 정육점 집 아들’이라는 유언비어를 무력하게 만들 터였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페데리코 루제로 콘스탄틴, 이탈리아 땅에서 이탈리아 남자로 태어났다. 콘스탄체는 그녀의 아들을 독일 이름을 제한 채 ‘콘스탄틴’이라 불렀다.
콘스탄체는 본가 오트빌가와 고향 시칠리아를 향한 강한 애착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여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를 표현하는 데에도 거리낌 없었던 듯하다. 만약 사실이라면 황제 엔리코 6세(영미식으로는 헨리 6세, 독일식으로는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체 사이 남부 이탈리아를 보는 관점의 괴리는 상당했을 것이다.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바르바로사의 아들인 엔리코는 철저한 게르만 남자였다. 혼인을 통해 손에 넣은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엔리코의 태도가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1194년 성 스테파노절, 그녀가 산통에 신음할 무렵, 엔리코는 다른 종류의 비명으로 그녀의 고향을 가득 채울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이 다스리게 될 왕국을 완벽하게 그의 것으로 평정하기 위함이었다. 새 영지 이탈리아를 위한 엔리코의 계획은 단순했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독일화’였다. 바르바로사의 이탈리아를 향한 야욕을 상속받은 엔리코/하인리히였지만, 그는 이탈리아에 대해 그의 아버지보다 더 무지했고, 교황을 불신했듯이 남부 이탈리아의 영주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남부이탈리아로 다수의 독일 출신 인사들을 끌어들였고(그중 다수는 단순 모험가, 건달, 한량에 불과했다), 현지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는 이러한 ‘야만인’들을 이탈리아 남부 요지에 유입시킨 동시에 그의 독일인 측근들을 그곳의 영주로 부임시켰다. 이들을 통해 다가올 반-독일 봉기에 대비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골적인 친-독일 인사정책이 현지 노르만 영주들의 반감을 산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를 상대로 들고일어난 그들의 봉기에 있어서도 엔리코의 노선은 명료했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제껏 시칠리아에서 자행된 적이 없는 무서운 잔인행위로 응수한 것이다.
페데리코가 태어나던 날 엔리코는 시칠리아 국왕으로서 즉위식을 올린다. 그 자리에는 과거 탕크레디(루제로 2세의 아들 루제로 3세의 사생아)를 왕으로 옹립하여 엔리코에게 반기를 들었던 제후들 역시 참석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모두 패배를 시인하고서 새로운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팔레르모로 모인 이들이었다. 그러나 엔리코는 즉위식이 끝나기 무섭게 그런 그들을 모조리 체포해 버린다. 훗날 반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요소를 모조리 몰살해 버린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탕크레디의 국왕 즉위식에 참석했던 수백에 이르는 영주들이 빠짐없이 산채로 불태워졌다. 소년에 불과했던 탕크레디의 아들 윌리엄 3세는 눈을 뽑힌 채 궁형에 처해졌고, 탕크레디와 그의 아들 루제로의 시신이 묘에서 끌려 나와 대중 앞에서 참수됐으며, 화형을 면한 나머지 영주들 모두가 독일로 이송돼 스와비아에 감금된다.
그가 시칠리아를 상대로 저지른 만행은 영주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들의 영지 내 성과 팔레르모의 왕궁을 약탈했고, 그 과정에서 오트빌 왕가의 귀중품 역시 찬탈했다(이렇게 확보한 자금은 독일에서 그의 아들 페데리코를 차기 황제로 선출시키기 위한 뇌물로 활용된다). 새로운 왕으로서 토착민들에 대한 그 어떤 자비도 보여주지 않은 엔리코의 잔인함에 시칠리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갓 태어난 아들을 스폴레토 공작에게 맡기고서 돌아온 콘스탄체 역시 팔레르모에서 저질러진 학살의 참상을 보고서 충격을 받고 말았다(게다가 몰살당한 영주들 중 다수가 그녀의 친척뻘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끔찍한 잔인한 보복에도 ‘독일 황제’를 향한 도전은 잦아들지 않았다. 다음 해인 1195년에는 시칠리아 독립을 표방하는 봉기가 발발했고, 이번에는 그의 아내 콘스탄체 역시 가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동방으로 향하는 십자군을 이끌고 남하하던 엔리코는 이들을 인솔하여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한다(애초 십자군 원정이 남부 이탈리아의 반-황제 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해 엔리코가 교황에게 둘러댄 '핑계'에 불과했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 악명 높은 엔리코의 잔인행위가 반복될 차례였다. 아체라의 리카르도는 말에 묶인 채 카푸아의 거리를 끌려다닌 후,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채로 이틀을 거꾸로 매달린 후에 질식사당했고, 엔리코를 대신해 시칠리아 국왕 자리에 앉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던 지오다노 공작은 붉게 달군 철 옥좌에 앉혀진 채 시뻘겋게 불타는 철 왕관이 머리에 못 박혔다. 봉기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모든 영주들이 콘스탄체와 엔리코 앞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한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이전 봉기에서 체포당하여 독일로 이송된 포로들에게는 모두 눈을 멀게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심지어 콘스탄체 역시 팔레르모 궁전에 감금당하고 말았다. 만약 엔리코가 그녀의 처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그녀의 목숨 역시 위험했을지 모르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1197년 9월, 엔리코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자신의 왕국을 핏빛으로 물들인 끝에 마침내 독일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절대 군주로 군림하게 된 그가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의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탈리아와 제국에 극심한 혼란이 예고되고 있었다. 물론 권력의 성공적인 세습을 꿈꿨던 엔리코는 이미 페데리코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앞날을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그는 페데리코를 차기 황제 자리인 로마인의 왕에 선출시켰고, 동생 필리포를 토스카나 공작에, 그의 최측근 마크바르도 폰 안바일러를 라벤나의 공작으로 임명해 두었다. 독일 출신 측근들을 이탈리아 각지의 영주로 임명함으로써 다가올 이탈리아 측의 도전에 대비하려는 계획이었다. 시칠리아에서는 아내인 콘스탄체를 어린 페데리코의 섭정으로 임명한 동시에 독일 출신 측근 팔리에르의 발터를 중심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어린 페데리코를 보좌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엔리코가 숨을 거두기 무섭게 이탈리아 반도는 마치 ‘관성’을 따르듯 '원상태'로 복귀한다. 각지에서 ‘독일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선 이탈리아인들의 기세는 매서웠다. 엔리코의 동생 필립이 토스카나를 포기한 채 독일로, 마크바르도가 라벤나를 뒤로하고 남부로 귀환해야 했고, 나머지 영주들 또한 그들의 영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조카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한 삼촌 필리프가 조카 페데리코와 조우하여 함께 이탈리아를 탈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로 향했으나, 겨우 사흘 정도의 차이로 그의 앞길은 막혀버리고 만다. 엔리코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전 이탈리아로 확산된 반-제국 봉기가 더 이상의 남진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단 사흘 정도의 차이로 페데리코는 독일이 아닌 시칠리아 소년으로 자라나게 된다. 만약 그가 이 시기에 삼촌을 따라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로 이주했다면, 중세 역사는 달리 쓰였을 테다.
결국 페데리코는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이탈리아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언급한 바처럼 황후 콘스탄체는 시칠리아 출신의 노르만 여성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의 아들 페데리코를 차기 황제로 만들려 했던 엔리코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오직 풍요로운 시칠리아에 남아 그곳의 국왕으로 남길 바랬다. 노르만이 품고 있던 반-독일 감정에 있어서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에, 응당 각 세 살이 된 아들이 ‘야만인’들의 땅인 독일에서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어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져, 훗날 ‘시칠리아 소년’, ‘풀리아 소년’이라 는 별명은 오랜 세월 페데리코를 따라다니게 된다). 엔리코 사망 직후 사별한 남편의 최측근이자 수상겸 보조-섭정 역할을 맡고 있던 발터를 파임시켰을 뿐만 아니라 궁중 내 독일 출신 인사들을 모조리 몰아낸 것 역시 그녀였다.
만약 어머니의 품 안에서 차기 시칠리아 국왕으로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면, 페데리코는 적어도 신변의 안전만은 보장받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 아기 국왕에게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콘스탄체가 곧 위독해진 것이다. 하나 남은 부모로서 사후 페데리코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던 그녀는 로마의 왕, 차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남부이탈리아 국왕의 칭호를 독점하게 된 아이가 수많은 정적들로의 표적이 될 것임을 이해했다. 사후 그를 향한 위협에 대한 조치가 요구되고 있었다. 그녀가 사망 직전 내린 결정은 훗날 페데리코 삶의 이정표를 결정하게 된다.
그녀는 소년의 보호자로 로마 교황을 선택한다. 독일 출신 황제파 영주, 관료들과 교황파 영주, 사제들이 득실거리던 시칠리아에서 어린 아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교황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높은 비용이 예상되는 협상이 뒤따랐다.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소년 페데리코의 보호인이 되어주는 대가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가 제시한 요구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시칠리아가 교황령임을 공식 선언해야 했고, 시칠리아 국왕이 전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주교 임명권 역시 교황청에 양보해야 했으며, 만약 페데리코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청의 통치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해야 했다. 뿐만 아니었다. 교황은 콘스탄체가 해임한 바 있는 팔리에르의 발터를 다시 시칠리아 수상으로 복귀시킬 것을 요구했다. 수상인 동시에 트로이아의 추기경이었던 발터는 교황파 인물이었다. 교황은 그의 사람을 시칠리아 궁정에 심어놓기를 바랐고, 콘스탄체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1198년 콘스탄체 역시 사망한다. 고아가 된 페데리코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가깝게는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발터, 멀게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대표하는 삼촌과 가톨릭의 수장 교황의 보호를 받고 있던 그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조카를 아꼈던 삼촌 필립은 페데리코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교황파를 상대로 결집해야 하는 황제파 영주들은 그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어린 어이가 아닌 강력한 황제임을 설득시켜 그로 하여금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페데리코의 보호자 교황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러한 필립을 견제하여 제국과 시칠리아를 분리시킨 상태로 유지하여, 교황청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하는 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섭정으로서 그를 보좌해야 했던 발터에게 페데리코는 단지 섭정인 그의 지배를 합리화해 줄 정치적인 도구에 불과했다.
유명무실한 소년 국왕의 존재를 망각한 채, 시칠리아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열하여 충돌하고 있었다. 마크바르도로 대표되는 황제파는 그들이 엔리코의 유지를 이어받은 진정한 남이탈리아의 주인이라 주장했고, 팔리에르의 발터가 이끄는 섭정 위원회의 교황파는 소년 황제를 보좌하고 있는 그들에게 통치권이 있음을 주장했다. 황제파는 피사 공화국의, 교황파는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맹렬하게 대립하던 둘 사이 균형이 깨어지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교황의 치명적인 악수였다. 이 일화는 교황이 자신의 피보호자인 소년 페데리코의 안전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신랄한 예시이기도 했다. 바로 프랑스 국왕의 친척이자 유명한 군인인 브리엔의 고티에의 남이탈리아 진출을 교황이 지원한 사건이었다. 야심 많은 군인이었던 고티에는 루제로 2세의 손자 탕크레디의 딸과 혼인한 바 있었고, 그는 오트빌 가문 출신인 아내의 레체(풀리아의 도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남이탈리아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교황은 레체 소유권을 인정하여, 남이탈리아 진출을 부추김으로써 황제파와 교황파가 맞서고 있던 남이탈리아로 제3의 세력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물론 그의 속셈은 고티에를 활용하여 시칠리아 왕국 내 황제파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고티에의 등장에 대한 발터의 반응은 교황의 예상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의 남이탈리아 진출을 허락한 교황의 선택을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페데리코의 섭정으로서 왕국을 직접 통치하는 데에 혈안이 돼 있던 그는 교황이 새로운 세력을 지원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감 속에서 황제파와 손을 잡아버린다. 결국 그는 곧장 마크바르도와 협정을 맺고서 시칠리아를 떠난다. 페데리코를 팔레르모에서 보좌하고 있던 그가 시칠리아를 떠나버린 이 행위는 어린 페데리코를 적의 손에 넘겨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곧장 팔레르모를 점령한 마크바르도는 그의 병사들을 페데리코가 머무르던 카스텔라마레 요새로 파견했다. 황제파에게 있어 이탈리아/교황파 세력의 구심점이자 신성 로마 제국 차기 황제로 선출된 바 있는 페데리코를 손에 넣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요새를 지키던 발터의 형제 마누펠로 역시 일찌감치 요새를 버리고 메시나로 떠나버린 상태였다. 7세 아이에 불과했던 페데리코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모두에 의해 배신당하고 말았다. 출생 이후 페데리코가 유럽역사에 등장하는 첫 순간이었다. 당시 그는 이제 갓 일곱 살이 된 소년이었다.
그를 자신의 손아귀에 두고서 왕국의 내정을 주무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던 발터의 ‘보호’ 아래서 페데리코는 그의 유년기를 보냈다. 황손이라는 직위와 당장 먹을 것조차 부족한 현실적 어려움 사이의 괴리가 그의 유년기를 지배했다. 팔레르모의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배고픔조차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직면한 사정은 어려웠다. 다행히 시민들은 그를 위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는데, 각각의 가정이 일주일씩 그에게 필요한 식사를 대접하는 식으로 그를 돌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에 걸맞은 호사를 누리며 자라지는 못했으나 그를 대하는 시민들의 호의와 예우를 통해 어린아이는 스스로가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인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마크바르도의 군사들이 그를 납치하러 등장했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은 훗날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된다. 그를 사랑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일화는 황제의 피를 타고난 그가 어려서부터 갖추고 있던 높은 긍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그를 보호해야 할 어른들이 모두 그를 배신하고서, 그를 포획하려는 병사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그 순간, 페데리코는 옷을 벗고서 손톱으로 자신의 살을 찢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그의 측근이 당시에 남긴 기록으로는 이는 단순한 어린아이의 발작이 아닌, ‘신성한 몸’에 손을 데려하는 무례한 야만인들을 향해, 무력할지언정 ‘황가의 인물’이었건 그가 행한 격분의 저항이었다는 것이다. 이 순간의 기지로 그는 당장의 위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그에 대한 처우는 잠시 미루어지게 된 듯하다. 어찌 됐든 간에 팔레르모를 장악한 황제파로서는 그들이 페데리코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몇 달 후, 마크바르도가 사망하게 되는데, 이야말로, 페데리코를 지켜준 신의 한 수와 다름없었다. 콘스탄체와 페데리코를 향한 강한 반감을 품고 있던 그가 살아남았다면, 페데리코의 운명은 어찌 됐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사망은 결과적으로 페데리코의 신변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7살부터 12살까지 소년 페데리코는 팔레르모 궁전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부모의 사랑도, 또래 친구의 우정도 찾을 수 없는 커다란 궁전에서 그는 책과 자연 사이를 전전하며, 학문, 무술, 사냥, 탐험으로 가득한 나날들을 보낸 것이다. 다만 그의 고향 팔레르모는 전 유럽에서도 지리, 정치, 문화적으로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그의 외가인 오트빌 가문은 팔레르모의 왕궁을 문화, 학문, 쾌락의 성지로 재구성했고, 그 배경에는 200년간 시칠리아를 다스렸던 이슬람교의 유산이 있었다. 루제로 2세, 구이엘모 1세와 2세 치하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팔레르모의 회교 과학자들이 올린 학문적 성과는 전 유럽으로 보급되고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루제로 2세의 궁전은 환관들이 호위를 서는 하렘, 주랑 내 위치한 내부 정원, 사자 분수를 자랑하는, 흡사 '알람브라 궁전'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페데리코는 겨울이면 루제로가 직접 디자인한 국왕의 방에서 모자이크, 동물, 새들로 가득한 왕궁을 거닐었을 테고, 여름이면 파바라 또는 마레돌체의 여름궁에서 인공 호수, 야자수, 이슬람 음악과 무녀들 사이에서 여름을 보냈을 테다. 시칠리아가 제공하는 모든 사치를 사랑했던 페데리코는 훗날 만약 신이 자신의 고향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팔레스타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부모도, 또래 친구도 없었던 그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그러나 드넓은 궁전과 왕립 공원이 그의 세계였다. 끝없는 수풀들 사이에서 그는 오렌지와 레몬 향을 들이마시며 외로움을 달랬을 테다. 훗날 유명해지는 그의 새와 동물, 드넓은 자연을 향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팔레르모에서 이어지던 페데리코의 소년기가 그 끝을 맞이하게 것은 그가 열네 살이 되던 1208년이다. 페데리코가 스스로 성인이 되었음을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1208년 12월 26일이었다.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조숙했던 그였지만 그것이 다소 이른 '성인 선언'의 연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가 더 이상 그가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알프스 이북 독일에서부터 찾아왔다. 그의 삼촌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필립이 살해당한 것이었다. 11년의 전란 끝에 황제로서 입지를 굳힌 그가 허무하게도, 자신의 딸과 혼인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구혼자의 손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뒤를 이을 차기 황제로는 교황파의 오토 4세가 선출됐다. 이는 황제파의 패배이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패배였다. 게다가 오토는 필리포의 딸 콘스탄체의 남편이기도 했다. 그는 호엔슈타우펜의 상속자를 자청하고 나섰고, 이는 페데리코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선 행위나 다름없었다. 독일 교황파와 교황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오토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상속 재산을 스스로 쟁취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할 뜻을 밝혔다. 성인으로 거듭난 페데리코는 국왕으로서, 동시에 호엔슈타우펜가의 황제로서, 사랑하는 남부 이탈리아와 가문의 유산을 교황파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전쟁에 임해야 했다. 그의 삶을 수놓게 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투쟁 중 첫 번째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