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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ug 01. 2024

황제 페데리코 세콘도 4

나폴리 12

즉위식(1220년 11월 22일)을 마친 페데리코는 로마를 뒤로하고서 남부 이탈리아로 출발한다. 그의 삶을 다루는 전기들은 모두 그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신속히 움직였음을 증언한다. 오랜 세월 벼르던 귀향길이었다. 그는 분명 남다른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순식간에 남부에 도달한 그는 단 3일 만에 캄파니아 내 도시 카푸아에 입성했다. 


남부로 향하는 그는 더 이상 호엔슈타우펜이 아니었다. 독일과 시칠리아의 분리를 유지할 것임을 교황에게 약속한 이상 그의 귀향은 황제로서가 아닌 시칠리아 국왕으로서의 그것이었다. 선출 권력인 신성로마제국황제 자리를 제후들에 의해 위임받고서 그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오토를 물리치는 것이 소년 페데리코가 독일에서 이루고자 했던 바였다면, 이제 그는 루제로 2세의 외손자로서 상속받은 시칠리아 국왕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 길을 떠난 순간부터 시칠리아와 독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 차이는 도드라졌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시칠리아 왕국 내 특권을 약속하지 않았다. 8년 전 독일로 향하며 미래의 영지/재산을 담보로 제후들에게 지지를 요청하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남부이탈리아에서 그를 기다리는 영주들의 절대다수는 페데리코를 저버리고 오토를 지지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초조하게 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궁금증이 해결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 있어서도 페데리코는 참을성이 없었다. 그는 왕국에서 가장 먼저 입성한 도시 카푸아에서 지체 없이 새로운 국가의 청사진을 공개한다. 바로 카푸아 헌장이다. 


카푸아 헌장은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하고 있었다. 알타빌라(오트빌) 가문의 상속인인 페데리코는 마지막 정식 노르만 국왕 구이엘모 2세 체제로의 귀환을 선언했다. 왕권이 실추된 사이 영주들이 임의로 왕실 소유 성과 영지를 사유화하고, 봉토를 마음대로 남용하던 지난 30년(엔리코 6세가 주도한 전란, 페데리코의 유년기, 마지막으로 그의 공백기)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 노르만 법전의 조항들을 소환했다. 


왕국을 이전 노르만 체제로 귀환시키기 위한 이 개혁의 초점은 제후들의 권한을 제한하여 국왕을 절대자로 군림하게 하는 것이었다. 시칠리아 왕국 내 모든 사법권이 왕권이 임명한 판사들의 권한으로 제한되었고 도시 행정 역시 자체적으로 선출한 시장과 행정관이 아닌 국왕이 파견한 관료들에게 일임되었으며, 영주들은 더 이상 성을 건설, 점령, 수비할 권리를 잃었다. 무엇보다 제후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법령은 바로 지난 30년간 하사된 영지와 특권을 직접 신고하여 그 정당성을 1221년 부활절까지 직접 증명받아야 한다는 조항이었다(de resignandis privilegis). 만약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 영지는 국가에 반납되어야 했다. 왕실의 소유권을 무단으로 찬탈한 과거 제후들의 횡포를 바로잡기 위함이었는데, 페데리코는 이를 통해 영주들의 영토를 정확히 파악하여, 필요하다면 이를 회수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봉토를 소유한 영주라면 결혼과 상속에 있어서도 국왕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는 추후에도 영지를 얼마든지 빼앗아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모든 심사는 왕실의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사실상 페데리코에게 필요하다면, 그 타당성을 막론하고 토지는 국가로 복속되었다. 같은 시기(구이엘모 2세 사망 이후 30년) 건설된 영주 소유 성채들 역시 파괴되거나 국왕 소유로 반환되었다, 

서기 1200년 이탈리아 지도 (출처: https://eastkingdomgazette.org/medieval-italy-map/)


힘의 논리가 아닌 단 몇 가지 조항을 앞세워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한 페데리코의 시도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반이 될 지배 이념으로 ‘법치주의’를 앞세운 것이다. 개혁의 타당성에 대한 논거를 명확하게 일거 하여 공표하는 전략 또한 그가 일관되게 고수했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과거 노르만족은 법령에 앞서 방대한 영지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최강자로서 제후들 위에 군림했던 왕가였다. 8년 전 모든 영주들에게 배신당할 만큼 시칠리아 왕국 내 입지를 잃었던 페데리코의 상황은 달랐다. 심지어 그는 독일로부터 그 어떤 군사도 이탈리아행에 동반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칠리아 영주들의 군사로 시칠리아 영주들을 퇴치하여 왕국 전체를 통합할 심산이었다. 이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쟁취했던 페데리코였다. 군사도 재산도 없는 팔레르모의 고아 소년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기적을 일구어낸 이후 그는 스스로가 신이 점지한 인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즉위식에 시칠리아 영주 모두를 초청했다. 제국과 교황청이라는 권위 앞에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거의 모든 제후가 로마의 즉위식에 참석했고, 예상대로 교황과 황제 사이 거행된 즉위식의 장엄함 앞에서 기꺼이 페데리코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왕국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제후들의 세는 여전히 강력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몰리세 공작은 무려 1400의 기사단을 동원할 만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들이 충성을 맹세했다 한들 그것이 오랜 세월 누려온 특권을 전부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페데리코의 계획은 카푸아 헌장 공표를 통해 우군과 적군을 명확히 가린 후, 우군을 동원하여 반대 세력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가장 강한 적수부터 먼저 겨냥했다. 바로 토마소 첼라노, 몰리세 공작이었다. 사실상 그는 로마에서부터 그를 표적으로 상정해 두었다. 모두가 참석한 즉위식에 몰리세 공작만이 직접 참석하는 대신 아들을 로마로 보냈고, 이것이 페데리코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그는 공작의 행동을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교황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페데리코는 남부로 진입하기 무섭게 그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다. 


모든 일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로마에서 즉위식에 참관한 대다수 영주들은 페데리코의 편에 섰다. 2년에 걸친 전쟁 끝에 패배한 몰리세 공작은 로마로의 망명길에 올랐고, 그의 재산은 결국 전부 왕국 소유로 편입되었다. 처음부터 제후들의 세력을 깔끔하게 청소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꿈꾸던 페데리코는 가장 큰 영주를 몰아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몰리세 공작 다음 차례는 그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주들이었다. 그들의 공은 자명했으나 페데리코는 만약 이 시점에 그들에게 의지한다면,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할 것임을 내다보았다. 결국 그는 그들의 영지와 성채 역시 다수 국가에 반환시켰고, 징세권과 병력 역시 몰수했다. 1222년 페데리코는 사라센(이슬람)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이 중 제대로 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았다는 빌미로 추가적으로 영주들을 축출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들 영토가 페데리코의 소유가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이탈리아 해상 공국들 (출처: Wikipedia)


이처럼 시칠리아 왕국 내에서 왕권은 절대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 어떤 이도 왕실을 위해 그 유용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배격당할 뿐이었다. 같은 원칙이 상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페데리코의 생명을 지켜주었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한 제노바 공국의 기벨린(황제파) 가문들은 황제로 즉위한 페데리코에게서 그에 상당하는 보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의 의지와 어긋나는 그 어떤 특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페데리코의 원칙은 무섭게 일관되었다. 시칠리아 왕국 내에서 제노바 상인들에게 할당된 권한은 피사에게 허락된 그것과 다를 것 없었다. 제노바 상인들은 분개했으나, 이미 유럽 최강자로 떠오른 페데리코를 상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독일에서는 그 누구보다 관대하게 재산을 나누어주던 페데리코였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국가 재산 단 한 푼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한때 무역의 요지로서 호황을 경험했던 시칠리아 왕국은 지난 30년간 재정난 끝에 파산 직전 상황을 맞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피사와 제노바의 상인들에 의한 지중해 무역의 독점이었다. 여전히 무역이 국고 수입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노바와 피사 상인들은 왕국 최대 항구 중 하나인 시라쿠사를 차지하고선 이곳의 무역을 통제하고 있었고, 왕국을 재건하려 하는 페데리코에게 있어 이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왕국 해군을 육성하고, 시라쿠사를 탈환하여 시칠리아 상인들의 무역 활동을 장려하였다. 동시에 오랜 노르만 법률을 부활시켜, 영주들에게 해군 육성의 책임을 묻고, 필요할 때 이를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빠른 해군 육성을 위해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의 배를 종종 포획하여 그의 해군으로 편입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어린 시절 토착 영주들의 손에 경험한 수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페데리코가 택한 해법은 바로 중앙 집권제였다. 잘게 나뉜 봉토를 영주들이 임의로 다스리는 봉건제가 아닌, 중앙 정부가 파견한 관료들이 왕실의 지령에 따라 일관되게 왕국을 통치하는 국가의 건설이었다. 이에 따라 필요해진 것이 관료를 육성할 교육기관이었다. 

 페데리코 세콘도 대학


이를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나폴리 대학, 오늘날의 페데리코 세콘도 대학이다. 1224년 봄, 페데리코는 세계 최초 왕립 대학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다. 유럽 최초로, 학생 조합, 교회가 아닌 국가 주도하에, 국가에 봉사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국고의 지원으로 탄생한 대학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최초의 세속인 관료를 길러내기 위한, 세속인 교수진이 이끄는, 세속 기관으로서의 대학이었다. 


로마법을 주 과목으로 채택하여 법학 학습을 통해 국가 운영을 이끌 관료를 양성할 뿐 아니라, 아랍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 역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 마지막으로 중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학까지, 전반적인 인문학 교육을 제공하는 학문소가 탄생한 것이다. 국가를 위한 기관인 만큼 유럽 최초로 장학금 제도와 학자 대출 제도 또한 마련되었고, 졸업생에겐 왕국 관료로서의 일자리도 제공되었다. 이는 이전까지 상류층 자제들로 국한되었던 대학진학의 기회가 중산층 청년들에게도 허락되었음을 의미했고, 학자 계층에 대한 사제 계급의 독점의 혁파였으며, 페데리코의 지지 기반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페데리코는 일찍부터 나폴리 대학에 대한 구상을 마쳐두었던 듯하다. 그는 즉위식을 위해 독일에서 로마를 향해 남하하며 볼로냐를 방문한 바 있었다. 예측건대 유럽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을 살펴보기 위함이었을 테다. 나폴리 대학은 탄생부터 교회가 후원하며, 신학과 교회법을 학습하는, 교황청의 관리를 양성하는 학문소, 볼로냐 대학의 대항마로서 설립되었다. 유럽 최고 명성을 자랑하는 볼로냐 대학에 맞서 세속의 지배자인 황제가 후원하며, 세속인 관리를 배출하고, 세속적 세계관을 연구하는 왕립 대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폴리 대학의 성공은 교황청의 권위를 상대로 평생을 맞서 싸우게 될 페데리코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는 왕국 시민이 다른 대학에 입학하는 일을 금지했다. 유능한 인력이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고, 사제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서였으며, 법치주의라는 그의 새 이념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직접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강하기까지 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는 이 새로운 대학이 팔레르모가 아닌 나폴리에 위치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탈리아인 페데리코에게 제국의 황제로서의 타이틀은 중요했다. 독일을 직접 통치하는 데에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그였으나, 유럽을 아우르는 황제로서 군림하고자 하는 의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고향 팔레르모가 아닌 반도 남중부에 자리한 나폴리를 제국의 수도로 낙점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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