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ro Apr 03. 2023

비행하는 아이 (1)

나의 비행은 열네 살에 시작되었다. 나는 비행 청소년 하면 단순하게도, 꼭 비행기가 떠올랐다. 그 뜻이 그 뜻이 아닌 걸 알지만 그래서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면으로부터 떨어진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다만 어떤 비행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목적이 있고 어떤 비행은 오로지 현재 지점을 벗어나야 한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나는 후자의 비행자였다.


귀밑 3센티미터, 흰 양말을 두 번 접고 검은색 단화를 신어야 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배지를 단 선도부 선배들과 짧은 당구채를 든 학주가 서있는 교문을 매일 아침 통과했다. 열외 없는 규칙의 세계.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똑같은 요구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공평성도, 성실하게만 해내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희망도 좋았다. 그래서 처음엔 꽤 잘 해냈다. 나는 가장 올바른 형식으로, 누구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새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했더니 첫 시험에서 전교 4등을 했다. 나조차 얼떨떨한 결과였다. 그런데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네가 3학년 승민이 동생이구나? 언니 닮아 공부 잘하는구나, 하고 아는 척을 했다. 나는 약간 공부할 맛이 떨어졌다. 내 생애 최고의 성적을 따냈는데 왜 내 이름은 묻지 않는가. 집안에서도 내 성취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언니의 성적은 그보다 늘 더 좋았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다소 익숙한 표정이었다. 그 당시 언니는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엄마는 새벽마다 도시락 세 개를 싸며 그를 지원했다. 또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문제였다. 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뭘 해도 내가 관심을 독차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잘 해내고 싶은 새 마음까지도 점점 헐거워졌다. 

     

긴 비행은 즐거이 지켜내던 규칙을 조금씩 어기는데서 시작되었다. 살벌한 교문을 통과하고 나면 접은 양말을 펴고 교복 치마를 접어 올리고 머리에 핀을 꼽고 스프레이를 뿌렸다. 하나를 하고 별일이 없어서 다음 하나를 했다. 위반은 또 다른 시도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올바른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나에게 목적을 위한 수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열네 살의 봄에는 두 아이가 있었다.      

한 아이의 이름은 네 글자였다. 키가 몹시 크고 몸이 말랐다. 교복 바지가 헐렁해 걸을 때 꼭 바람인형처럼 휘청대는 것 같았다. 노란색과 보라색이 들어간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녔다. 성적도 별로인 데다 장난기도 많아서 학생 주임이던 담임에게 툭하면 쥐어 박혔다.      

그 애는 언젠가부터 틈만 나면 나를 귀찮게 했다. 머리를 잡아당기고 슬그머니 발을 걸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내 앞으로 교실 문을 홱 닫아버리고 신발을 갈아 신으려고 하면 한쪽을 집어가 멀리 던졌다. 다들 국민학교 때 다 하고 넘어간 장난질을 아직도 신난다고 해대는 그 애가 참 어이없고 못나서 나는 상대도 잘 안 했다.  

    

그런 유치한 애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내가 마음을 쏟고 있는 애는 따로 있었다. 우리 반 반장이었다. 그 애는 밤톨같이 동글한 뒤통수를 가졌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눈동자도 까맸다. 유독 느린 말투여서 조회시간에 그 애가 차아려엇… 하고 말하면 다들 키득거렸다. 나는 그 애가 귀여워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좋아했지만 좋아한다는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소리 내었을 때 꼭 형태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이 물성으로 다시 생겨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직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그때가 나에게 적당했다.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절되고 무시된다고 해도 괜찮을지 몰랐다. 아무도 볼 수 없으므로 숨길 필요도 변명할 일도 없었다.     

반장은 사실 반 애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도 좋아하는 애였다.  공부도 잘하고 친절하고 인기 많은 그 애에 비해 나는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몇몇의 친구들하고만 친했고 사소한 비행들을 바탕이 조용하고 겁이 많았다. 이미 사춘기의 창의적인 비행을 시작한 아이들이 있었으므로 나의 소심한 비행들도 평범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존재감으로 치자면 맨 뒷 그룹에 서게 될 아이가 나였으므로, 그 애가 만약 나를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수풀처럼 많은 얼굴을 헤집어야 했을 것이다.      


여름이 될 무렵 우리 반 최초의 열애설이 터졌다. 반장과 반장에 버금가게 인기 많은 같은 반 여자애였다. 그 애는 희고 예쁘고 공부도 잘했다. 말도 조곤조곤하고 걸음도 살금살금 걸었다. 짓궂은 남자애들도 그 애한테만은 조심하는 것 같았다. 체육시간에 체육복을 걷어올리자 드러난 그 애의 팔과 종아리를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보다 깨끗하고 반짝이는 살결을 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똑같은 열네 살인데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함이 그 애한테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내게 당도한 소문을 나는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낌새가 전혀 없었으니 그것은 헛소문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소문은 사그라들지 않고 점점 무성해졌다. 진실을 알 수 없는 목격담들도 등장했다. 매일 아침 등교하는 일이 겁났다. 또 어떤 증거들이 그 열애를 증명할 것인가. 나는 숨죽이는 것도 모자라 짐짓 멀쩡한 얼굴을 지어내며 비수 같은 말들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애들은 반장과 그 애를, 대조적인 피부색 때문에 바둑이라고 놀렸다. 둘은 무성해져 가는 열애설에 대해 아무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별다르게 가까이 지내지 않았지만 모두에게 그들의 열애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열애가 사실이라면 그들은 대체 어디서 만나는 거야? 그것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된 나는 정말로 그러고 싶었지만 차마 미행은 할 수 없어 상상을 했다. 내 머릿속에서 둘은 길을 걷고 떡볶이도 먹고 손도 잡고 놀이 공원도 갔다. 한걸음보다도 가까운 둘 사이에 느리게 다정한 말들을 오갔다. 종일, 그들을 그려보다가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그것은 최초의 실연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실연은 분명히 존재했다. 형태와 이름은 없었으나 무참히 바스러진 마음은 오직 내게만은 실제 했기 때문에, 나는 매일 같이 나를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뛰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었다.     


한동안 매일매일 두 사람을 관찰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눈에는 둘 사이의 시그널이 보였다. 멀리서 힐끔, 또 한 번 힐끔. 반장이 여자애를 수시로 보면 한 번쯤은 그 애도 반장을 바라보았다. 그 한 번의 눈 맞춤을 위해 반장은 거의 학생의 본분을 잊은 것처럼 종일 그 애만 힐끔거렸다. 본분을 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반장의 얼굴을 하루 종일 보았다. 거기서 옅게 번졌다 사라지고 물들었다 가려지는, 수많은 희로애락을 읽었다. 그것은 더할 수 없이 피곤하고 슬픈 관찰이었지만 멈추지 못했다. 내가 말도 못 하게 갖고 싶은 것이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갖고 싶은 마음은 뭐든 비슷했다. 늘 언니의 새 옷 언니의 새 필통을 나는 미치게 가지고 싶었다. 그게 어떤 것이었든 상관없었다. 이미 내 것일 수 없다고 판명되는 순간, 내 안에서는 단념이 아니라 욕망이 솟구쳤다. 그 욕망은 너무 크고 단단하고 뜨거워서, 나는 늘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그러니까 이후에도 쭉, 나는 가슴이 아파오면 그게 좋아하는 마음인지 갖고 싶은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게는 소유욕과 구분 지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뚜막 고양이(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