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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r 19. 2021

[뚜벅뚜벅, 다시 제주] 예상치 못한 풍경

(첫째 날 #04) 발길이 닿는 대로, 바다로 산으로

본태박물관을 둘러본 뒤 다음 행선지는 산방산 유채꽃밭과 용머리해안이었다.

주 목적지는 용머리해안이지만 근처 산방산에도 유채꽃밭이 있다고 해서 잠깐 들르기로 했다.

만개한 제주 유채꽃밭을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과연 어떨지.

원래 철은 4월이라지만 블로그에서는 지금도 꽤 예쁘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본태박물관에서 산방산을 버스로 가기엔 남은 시간이 촉박해서 택시를 이용했는데 택시 기사님이 이미 졌다고 하셨다.

"유채꽃은 4월이 철 아닌가요?"

어쨌거나 그럴 수도 있다. 내 마지막 목적지는 엄밀히 따지면 용머리 해안이니까.

하지만 혹시나 해서 곧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제주의 물때, 기상에 따라 관람 시간이 유동적이라 확인이 필요하다.)

오늘은 풍랑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입장을 통제했다고 한다.

세상에 이럴 줄 알았으며 본태박물관에서 죽치고 있을 걸.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이미 산방산에 도착했다.




"여기가 유채꽃밭이에요?"

기사님이 맞단다.

"다음에 어디 갈 거예요?"

기사님이 실망할 줄 알았다는 듯 다음 목적지를 물었다. 보아하니 유채꽃밭은 손바닥만 한 데다가 시들시들하고 용머리해안은 개방을 안 한다니 아저씨는 내가 발길을 돌릴 거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몇 군데 머릿속에 생각해봤지만 영 시간이 여의치 않다.

고개를 젓고 근처에 걸어서 갈 만한 곳을 물으니 그냥 용머리해안 쪽으로 걸어가서 그 근처에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아쉽지만 아직은 해가 짧다.


일단 왔으니 사진이라도 찍으러 꽃밭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불러 세운다.

"입장료 천 원이에요"

아무 표지판도 없고 그냥 꽃밭인데 입장료를 받는다고?

"아주머니가 땅 주인이세요?"

 원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묻자 아주머니가 자기가 가꾼 유채꽃밭이라고 한다.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서울 근교에서는 이것보다 몇 배는 큰 해바라기 밭도 공짜로 둘러봤는데 정말 손바닥만 한 유채꽃밭에 천 원을 내고 나니 한숨스러웠다.

너무 서둘렀네. 박물관이나 천천히 더 둘러볼걸.

그래도 천 원을 냈으니 열심히 사진을 찍고 꽃밭에서 나와 용머리 해안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바라본 바다는 짙푸르고 고요하기만 하다.

아쉽다. 오늘 마침 비도 안 오고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거 산이나 올라갈까. 산방산도 예쁘다던데.

하지만 무작정 오르기엔 산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자니 건너편에 절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둘러보니, 산방산에만 [보문사], [산방사], [광명사] 세 개의 절이 있고 산 중턱에는 [산방굴사]가 있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꽤 영험한 산인 걸까.

표지판을 보니 산방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라산에 오른 사냥꾼이 산신의 엉덩이에 화살을 잘못 쏘자 노한 산신이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날아와 생겼다는 산방산.
황금닭이 알을 품은 지형이라 일컫는 명당 ('금계포란' 지세)으로 훌륭한 장수가 태어나거나 큰 부자를 만들게 한다는 곳입니다.

바다가 보이는 제주 은 색다른 멋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제주에서 절을 가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보문사를 둘러보고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산방굴사로 가는 길이 나왔다.

주욱 오르막 길이라 더웠지만 멀리 보이는 바다와 드문드문 핀 동백꽃이 아름다운 산길이었다.

중간에 산방굴사 매표소가 있다.

사람이 있는 건가? 하고 서성이니 안쪽에서 아주머니가 '그냥 가요'하고 손짓했다.




산방굴사에 도착해보니 커다란 굴 안쪽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굴은 너비 10m 높이 5m의 자연굴이며 고려시대 혜일 법사가 불상을 모시고 수도했던 곳이라고 하니 역사가 꽤 깊다.

굴 천정에서는 물방울(약수)이 떨어지는데 이것과 관련한 설화가 있다.

먼 옛날 하늘과 땅의 정기를 이어 줄 듯 영험한 비가 내리던 날 동굴로 급히 몸을 피한 마을 아낙네는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한 여자아기를 만나게 된다. 이 아기가 바로 산의 정기와 정령이 잉태되어 태어난 산방덕이다.
여신 산방덕은 인간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큰 나머지 결국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왔고, 첫눈에 반한 '고승'이란 총각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마을에 새로 부임한 관리가 산방덕의 미모에 반하면서 불행은 시작된다. 관리는 산방덕을 차지할 욕심에 남편 '고승'이 세금으로 낸 쌀에 문제가 생겼다며 멀리 귀향을 보내버린다. 시름에 잠긴 산방덕에게 관리는 수청을 들라며 억지를 부렸지만, 산방덕은 관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결국 산방덕은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으로 되돌아갔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시간이 지나 산방덕의 몸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그녀의 슬픔은 그대로 남아 동굴 속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오랜 세월 후에도 동굴 속에는 맑은 물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사람들은 이것을 여신 산방덕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 설화 속 인물)

부처님 모신 곳에 올라 짧게 기도드리고 약수를 마시고 내려왔다.




산방굴사에서 내려오는 길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종소리를 따라가 보니 산방사의 스님께서 종을 울리고 계셨다.

은은하게 울리는 종소리와 산방사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광명사는 가장 소담한 사찰이었다.

산방산의 다른 사찰과 달리 광명사의 건물은 한옥이 아닌 일반 주택 양식에 가깝게 보였다.

하지만 바로 뒤로 보이는 산방산과 함께 아름다운 절이었다.




산방산 초입으로 되돌아오자 아름드리나무가  그루 너머로 석양이 진다.

노을 지는 풍경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비록 용머리해안은 못 갔지만 우연히 들른 산방산은 아름다운 곳이었지.

혼자 감탄하는 사이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갔다.





갑자기 코스를 바꾸게 되면서 다음 목적지인 저녁 식사 장소까지 갈 버스 편을 미리 확인 안 한 게 문제였다.

하필 타야 할 버스는 방금 지나갔고 그다음 버스는 두세 편 있는데 30분, 한 시간 씩은 기다려야 한다.

다른 식당을 갈까 고민했지만 이미 예약을 했다.

한 번 예약하면 늦더라도 꼭 가야 하는 성격이라 식당 예약 시간을 조금 미룬 채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문제는 그곳 근방에 '산방산' 버스정류장이 아주 가까운 간격으로 세 개 정도 있었다는 점이랄까.

혼자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는데 나처럼 버스를 찾아 헤매는 여행객이 나한테 와서 길을 물었다.

그렇게 길을 모르는 여행객 둘이 서로 다른 버스를 기다리게 됐다.

초면은 아니고 아까 산방굴사에서 본 사람이었다.

산방굴사는 산방사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관리하는 곳인데 어쩐 일인지 그 아저씨가 무진 혼나고 있었다.

"부처님 계신 곳에서 뭐하시는 거예요!"

상황을 보아하니 부처님 모신 단 아래쪽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가까이 올라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는데 그분이 부처님 코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고 있었다.

역시 혼은 아주머니한테 나야 제대로 난다.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나잇살 먹고 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혼날 일이 흔치 않다.

아저씨는 그 뒤로도 계속 혼났고 도망가듯 자리를 피했다.


아저씨도 그곳에서 카메라를 멘 채 흠칫 놀라서 주춤하는 나를 봤나 보다.

"아까 안 혼났어요?"

"아래쪽에서만 찍어서 그런지 뭐라고 안 하시더라고요"

아저씨는 혼자만 혼난 게 억울했는지 손을 꼼지락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중국 사람이에요. 무속인이 되려고 전국에 절이나 그런 곳들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아까 그 산방굴사는 좀 이상한 곳이에요. 저한테 대뜸 시주부터 하라고 했어요.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시주하려고 했는데.

어쨌거나 시주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혼내는 거예요. 제가 돈을 적게 내서 그런 건가요? 얼마 시주했어요?"

"저는 따로 시주 안 했어요"

아저씨는 더더욱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부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이야. 부처님 앞에서"

그 사이 내가 탈 버스가 도착했다.

내가 기다리던 정류장이 아니라 저 건너편에 잠시간 정차한 뒤 떠나갔다.

나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서는 결국 택시를 불렀다.

"죄송해요. 제가 버스를 놓쳐서 택시 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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