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03) 서우봉 일제진지동굴을 둘러보다 길을 잃는다면
제주에서 3박 4일 머무는 동안 첫날은 영하의 날씨였고 그 뒤에는 흐렸다가 개이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 가장 화창한 하늘을 볼 수 있었는데 곳곳에 비와 햇살을 흠뻑 맞고 핀 생생한 꽃과 푸른 밭작물들이 있었다.
아, 정말 봄이구나.
길을 가다 보면 심심치 않게 귤 농장도 있다.
제주는 예로부터 바람이 많이 불고 돌이 많아 척박한 땅이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곳곳에 묻어나는 푸르름에 생명력이 넘치는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집집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거나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져 있다.
일, 이층짜리 예쁜 집과 담벼락에 놓인 돌탑들에 마을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느껴졌다.
북촌 포구에 도착하니 정자가 하나 있다.
함덕해수욕장만큼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 덕분에 혼자 조용히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이 작고 아름다운 해변 마을에서 예전 사람들은 밭작물을 기르고 약간의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순간에 학살당하다니.
한참 동안 파도를 바라보다 저 멀리 보이는 곶으로 가기로 했다. 저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또 다를 것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보이던 게 서우봉 해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일제 진지동굴과 몬주기알이 있는 곳이었다.
제주 4.3길 책자를 보니 이곳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다.
진지동굴(등록문화재 제309호)
서우봉 해안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20여 개의 진지동굴이 있다. 이곳에서 가장 가가운 진지동굴은 입구가 3개인데 내부가 연결된 '王'자형으로 마을 사람들은 '삼형제굴'이라고도 한다. 18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진입로가 있으며, 진입로에서 30m 정도 들어가면 진지동굴들을 볼 수 있다.
몬주기알
서우봉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해안절벽을 말한다. 절벽 아래에는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비교적 넓은 천연동굴이 있어, 4.3 당시 북촌주민들 뿐만 아니라 함덕주민들도 숨었던 장소이다. 썰물일 때 해안가로 접근이 가능하다.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1948년 12월 26일경 4~5명의 여성들이 절벽 위에서 총살당하는 등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내륙 쪽 동굴 입구와 해안가 동굴 입구 갈림길이 있다.
내륙 쪽을 다 보면 해안가 동굴 입구가 나올 거라 생각해서 내륙 쪽으로 향했다.
내륙 쪽 동굴 입구 길은 나무가 울창하지만 길이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다.
4.3길 상징 띠가 나뭇가지 중간중간 메어 있어 헤매지 않고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일제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절벽을 파고 바위를 부숴 동굴을 만들고 잠수정 같은 무기를 보관했다고 한다.
내륙 진지동굴을 모두 보면 어느새 해안가에 닿는다.
해안가에는 낚시꾼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파도를 보다 아저씨와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묻길,
"너는 여기 어떻게 왔니?"
"저쪽 포구에서 보다 궁금해서 오게 됐어요."
"무섭지도 않아?"
"날이 화창해서 무섭지는 않더라고요."
이틀 연달아 어떻게 왔냐는 질문을 듣다니, 하긴 어제는 비가 많이 오는 숲 속이었고 오늘은 해안 절벽을 타고 내려온 셈이구나.
짤막한 대화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해안가 동굴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오면 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까 표지판이 초입에 있었으니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해안가를 따라 걸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척 보기에 쉽지 않다.
애초에 길도 아니고 돌무더기와 각종 해양 쓰레기를 넘어서 가야 한다.
그래도 전체를 다 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끝까지 가야 한다.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면 긴가민가할 때쯤 하나씩 동굴이 나온다.
보일 듯 말듯한 위치에 교묘한 위치에 숨겨져 있다.
나중에는 내 키보다 더 큰 바위를 암벽 등반하듯이 건너가 무성한 풀숲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야 동굴이 나온다.
체감상 아직 스무 개의 동굴을 다 본 것 같지는 않은데 더 가면 더 있기는 할까?
오늘은 파도가 잔잔해서 다행이지 파도가 거센 날이었으면 완전히 미친 짓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다시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 것도 같았는데 그 길로 가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아가다 보니 왼쪽으로는 짙푸른 바다, 오른쪽으로는 가시덤불, 앞에는 북촌 포구로 가는 해안가, 뒤로는 내가 걸어온 몬주기알
이제는 낚시꾼 아저씨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왔고 북촌 포구까지 걸어가자니 바위가 점점 커져서 이제는 내 키보다 높다.
사면초가도 이런 사면초가가 없다. 너무 대책 없이 깊숙이 들어왔구나.
다행히 저 앞쪽에 높다란 바위 무더기가 있는 곳이 보였다.
바위를 두세 개 정도 타고 올라 그 위에 1~2미터 정도 산등성이를 기어 올라가면 아까 걸었던 서우봉길 초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바위는 현무암이라 그럭저럭 발을 디딜 곳이 있어 보였다.
저기까지만 가자.
목에서 달랑거리는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비장하게 다짐했다.
목적한 곳에서 다행히 네 발로 긴 덕분에 해안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해안가를 바라보니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족보행보다 사족보행이 야생에서는 월등히 유리하다는 엉뚱한 생각을 잠깐 동안 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한 번 온 것만으로도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험지를 수없이 오가며 흙을 파고 바위를 나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all photos taken with the X100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