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소녀> 속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by ghu


집단주의 사회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상호조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의 집단주의는 자신과 삶의 궤적이 겹치지 않는 이들까지 보듬어 줄 만큼 자비롭지 않다. 우리의 너그러움은 내집단, 흔히 가족 공동체에 한정된다. 한국 고유의 가족이기주의 혹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종종 타자를 배척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무사유로 일관한다. 경희의 수화에 박수치는 학생들처럼.


상호조화와 관계성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오히려 타자와의 연대가 부족하다는 점은 다수의 개인이 구성하는 '집단'의 속성과 개개인의 사고의식이 병행하지 않음을, 다시말해 주입되어온 관념과 개인들의 실제 행동이 불일치함을 드러낸다.


최소한 사회에 있어야 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들의 합의와 통찰이 부재한 집단주의. 이것이 우리사회의 집단주의가 갖는 이면인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다보면 집단주의로 범주화되는 우리나라가 공동체의 결속이 매우 약한 것.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의 존재가 거의 없다는 것, 분노범죄와 참혹한 범죄행각들 역시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것 역시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이러한 병리적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사회가 집단주의 안에서 종종 더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집단주의는 관념상의 사변적 심리구조이며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이 지배적이다.



“우리 사회는 사실은 제대로 된 이념이 부재한 곳인데도 이념 코스프레 중인 상황은 아닐까. 이념이란 신념의 체계이기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현 한국사회를 잠식한 다양한 문제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회적 문제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이 불안한 사회를 힘들게 받치고 있는 한 개인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갈등과 증오의 감정 밑에는 사회구조적 차원의 다양한 억압적 요소와 원인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바닥에는 응당 있어야 할 사고와 반성이 없다.



장의존적인 집단주의적 사회에서 개인은 자의와 상관없이 장(field) 안에 발을 딛고 자신과 타인 혹은 집단 간의 불확실한 경계 언저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원인들을 ‘쉽게’ 타인에게로 전가시키려는 단초가 된다. 같은 장에 있기에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오만 속에서 이뤄지는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재빠른 책임 전이와 투사에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책임의 면피가 숨어있다.


모종의 사회현상과 사건에 대한 인과관계의 파악은 그 사회가 그러한 일들을 이해하는 방식과 밀접하다. 프랭크 푸레디(F. Furedi)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귀속시키는 방법에 관한 사회적 합의의 부재가 결국 불신과 두려움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경민의 죽음이 그렇다. 영화 속 경민의 죽음은 분명 누군가의 죄가 되어야 하는 불행인데도 죄'인'을 찾지 못했기에 불안감을 번식시키는 모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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