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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엘리 Apr 16. 2024

젤다 공주의 마음을 깨닫다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60)


눈 앞에 보이는 여러 개의 언덕을 넘고 흐르는 강물을 건넜지만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도가 밝혀지지 않은 북쪽으로 무작정 오면 고론족들이 사는 마을이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예측했었는데, 불타고 파괴되어 남은 잔해가 모인 건물을 발견하고 무작정 뛰었더니 하이랄 성의 육중한 모습이 더욱 가까워졌다. 


맵을 켜서 이리저리 조작해 보았다. 지도상으로는 내가 있는 위치가 하이랄 왕국의 중심부 같았다. 그러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지도를 밝힐 수 있는 시커 타워가 보이지 않았다. 이 부근에 분명, 타워가 있어야 할 텐데... 



하이랄 성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서서 시커먼 성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이긴 하지만,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올 수 있는 곳이란 생각에 성 쪽으로는 접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계가 느껴질 땐 내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긴 적도 있었으나, 이전보다 나는 분명히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초조하진 않았다. 


멀리서 보는데도 하이랄 성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보행형 가디언과 비행형 가디언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시커 스톤을 켜서 무기들을 점검했지만, 한번에 여러 대를 상대하긴 쉽지 않다. 일단 가디언을 피해서 헤매다가, 하이랄 성 주변의 바위 언덕 아래에 수상한 가시덤불을 발견했다. 



가시덩쿨은 곧 무너질 것 같은 바위더미를 감싸고 있어서, 나는 불화살을 쏘아 가시덤불을 태웠다. 비가 내리기 전에 얼른 해치워야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활활 타오르는 가시덤불을 바라보며, 시커 스톤을 켜서 리모컨 폭탄을 준비했다. 이내 곧 가시덤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얼른 바위언덕을 올라가 폭탄을 터뜨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언덕 중간에는 커다란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안에 들어갔더니 의외로 사당이 있었다. '니아.네아의 사당'이라고 하는데... 이 곳에는 힘의 시련 초급 미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힘의 시련 초급은 약간 ... 시시하다. 소형 가디언을 처치하여 얻을 수 있는 무기 역시 대단치 않게 느껴지기에.



힘의 시련 초급을 완수하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이었다. 비가 내려 대지가 푹 젖었다. 성 주변의 부서진 마을의 흔적 사이에서 스탈 몬스터들과 대적해야 했다. 미끄러운 경사를 피해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나니 서서히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내 키만큼 자란 수풀을 헤치고, 성의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다 드디어 탑을 발견했다. 이 시커 타워를 기동시키면 이 주변 지도는 모두 얻을 수 있으리란 희망에 서둘러 언덕 아래를 내려갔다. 그러다 나는 뭔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아름드리 나무 뒤에 숨었다. 타워 주변에, 고장나 멈춰 있는 여러 기의 가디언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가디언들의 잔해 중에 아직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다! 가디언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사정거리 밖에서 이동하려고 하는데, 오른편에서 삐삐비빗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볼에 빨간 기운이 느껴졌다. 큰일이다! 움직이는 가디언이 이쪽에도 있구나.... 


일단 둘 중 하나는 파괴를 해야 이동에 제약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탑 주변의 무너진 건물 잔해 위로 올라간 다음 로베리에게서 받은 고대의 화살을 사용하여 가디언을 물리쳤다. 가디언 하나를 파괴함과 동시에 눈앞에 다른 평원에서 이동하는 보행형 가디언이 나를 발견하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가디언이 빔을 발사하는 것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 타워의 벽을 기어올랐다. 타워의 벽에 손을 대자, 시커 스톤에는 '평원의 탑'이라는 지명이 등록되었다.



다행히도, 타워의 벽을 기어오르는 것이 가디언의 공격 사정 범위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였나보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보행형 가디언은 나를 감지하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타워의 벽을 기어오르면서 중간 휴식지대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 주변도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았겠구나 싶은 흔적이 많이 보였다. 저 멀리 쌍둥이 산이 눈에 들어왔다. 카카리코 마을이 있는 쪽도 훤히 보였다.



어느 정도 높이 이상 올라오니 가디언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탑에 올라 가이드 스톤에 시커 스톤을 넣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타워 작동이지만, 타워가 열릴 때의 진동과 에너지는 꽤나 상당하게 느껴진다. 이 모든 시설이, 기억을 잃은 용사를 위한 시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하이랄 왕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시커족들은 대체 어떤 민족인가... 그들 문명의 수준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가늠하기 어렵다.



타워를 작동시킨 후 주변 지도의 데이터를 얻었다. 지도를 밝힌 후에 주변과 비교하며 보니 내 기대보다는 하이랄 왕국 중앙부를 다 밝힌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조금 허탈했다.


그러나 지도를 살펴보다가, 이 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금 특이하게 보이는 시설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하는 제단처럼 생긴 곳 같아서, 뭔가 대단한 아이템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어쩌면 사당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나의 예상은 언제나 늘 빗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원의 탑에서 내려와 지도를 보면서 물로 둘러싸인 제단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보행형 가디언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가디언의 존재가 이 부근에도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맞닥뜨린 적을 피할까 생각했다가도, 내 마음과 달리 몸은 그들의 공격을 막거나 틈을 노리기 위해 반응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행형 가디언이 나를 쫓아오면, 어느새 주변 지형을 살펴 내게 유리한 쪽으로 가디언을 유인했고, 재빠르게 리발의 용맹을 사용하여 공중으로 올라 활을 이용해 공격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전에는 이렇게 해야지 생각하고 움직였는데, 판단이 빨라진 것인지 아니면 가디언의 공격 패턴을 이젠 왠만큼 파악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지는 느낌이 들어 조금 놀랐다.


그렇게 가디언을 세 대 해치우고 나니 꽤 어두워졌다. 다시 하늘에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처참히 부서진 기둥과 낡은 벽돌 바닥은 쉽게 물에 잠겼다. 어두웠지만, 제단처럼 평평하게 닦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는데 - 거기선 기억의 빛이 영롱하게 떠올랐다. 



'아... 여기, 기억의 장소였던가?'



빛이 나는 곳으로 가까이 갔더니, 둥근 바닥 한 가운데에 작은 삼각형이 모여 만들어진 커다란 삼각형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는 하이랄 왕국의 문장이 있고, 그 하이랄 왕국 문장을 중심으로 세 곳은 각각 다른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잘 들여다보니, 조라족 등 다른 민족을 대표하는 문장이 같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커 스톤을 켜서 그림이 들어있는 앨범을 열었다. 성이 바로 정면으로 보이고, 네 기둥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던, 광장같은 그림이 바로 켜졌다. 



그 그림을 보고 고개를 들어 앞의 풍경을 보니, 붉은 기운에 둘러싸인 하이랄 성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리고 부서지긴 했으나 네 개의 기둥이 있는 장소가 똑같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기둥 사이에 내 동료들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미파와... 리발...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나는 기억이 시작될 것 같아 눈을 감았다. 



기억 속의 그 날은 참으로 맑고 청명한 날이었다. 오후의 빛이 따갑게 내리쬐는 하이랄 성 앞의 의식장 옛터였다. 그날은.... 호위 기사 임명식이 있었던 날.... 

'아, 맞다... 여긴 의식장 옛터...!'



그 의식장 가운데에는 젤다 공주가 서 있었고, 공주의 맞은편에는 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공주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는데... 


"... 퇴마의 검에 선택을 받은 하이랄의 용사여,"



젤다 공주의 목소리는 맑게 울려퍼졌지만, 목소리 자체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뭔가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의 등 뒤에는 퇴마의 검이라는 그 칼이 지워져 있었다.



젤다 공주는 오른손을 내리뻗은 채로, 나에게 계속 축복의 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생각났다. 축복의 말이 아니라, 공주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옛 여신이 하이랄의 용사를 임명하는 의식에 사용되는 문구였다.


"그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인 검술을 인정하여...."


그런데, 그 의식을 받는 나를 제외하고 다른 영걸들은 젤다 공주와 나를 바라보면서 뭔가 속닥거리고 있었다. 



젤다 공주는 영걸들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는 듯,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여신 하일리아의 이름으로 축복을 내리노니...."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젤다 공주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어서, 당시에 영걸들이 나와 젤다 공주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기억 속의 영걸 모습들은 각기 제각각이었다. 미파는 매우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슬퍼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건 리발도 마찬가지였다.



젤다 공주가 옮기는 축복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늘을 날고 시간을 넘어 황혼에 물들더라도...."


리발은 아무래도 기사 임명에는 자신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이 영걸은... 아무래도 고론족 같은데, 넷 중 이 영걸의 표정이 제일 심각했다. 무언가 깊이 고민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옆에 서 있는 우르보사 역시도 표정은 어두웠는데, 우르보사의 얼굴에는 뭔가 안쓰럽다는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함께하는 검은 용사의 영혼과 함께하며...."



젤다 공주는 역시 미동없이 여신을 대신하여 그 역할을 이어갔다.

"... 더욱 강한 힘이 그대와 퇴마의 검에 깃들기를......"



그렇게 젤다 공주와 내가 기사 임명식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고론족 영걸이 한 마디 했다.

".. 앞으로가 막막한데 이거..."



그러자 리발의 앙칼진 목소리가 그에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호위 기사 임명을 기념해서 고대 전설을 따라해 보자라며 부추긴 건 너잖아?"

아... 이 의식을 해 보자고 제안한 것이 고론족 영걸이었구나... 



그러더니 리발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나저나 그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저 공주와 나, 마음이 맞을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소리지? 젤다 공주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땠길래....? 



그러자 우르보사가 한숨을 쉬며 리발의 말에 대응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 공주님에게 있어서 저 녀석의 존재는......"



"그래, 콤플렉스의 상징 같은 거니까 말이야."



....! 콤플렉스의 상징이라고? 

기억속의 나는 그저 젤다 공주가 뭐라 하든 그대로 듣고 있었던 모습이었지만... 이어진 기억 속 젤다 공주의 표정은 ... 



영걸들이 지적한 대로, 공주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나를 매우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던 상황.... !


기억이 더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거기까지였다. 젤다 공주가 나를 바라보던, 그 불편한 눈빛이 희미해지며 기억은 사라졌다.



기억이 끝나자마자, 차가운 빗줄기가 투둑투둑 시커 스톤의 위에 떨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내게는 용사 임명 의식을 치르며 나를 쳐다보던 젤다 공주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남았다. 


나는 시커 스톤에 들어 있는 기억의 장소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간 찾았던 기억들을 쭉 돌아보면 우르보사가 했던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의식장 옛터에서의 이 기억은... 내가 젤다 공주의 호위 기사가 된 직후이니... 젤다 공주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순서를 따지자면, 기억의 사진들 중 가장 앞에 있었다. 그러고보니, 젤다 공주에게 처음 인사를 했을 때도 그녀는 나를 본체만체였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나는 공주의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일거라 짐작했을 뿐... 당시엔 젤다 공주가 쌀쌀맞다거나 차갑다거나... 그런 생각은 일절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시커 스톤이 일깨워준 기억을 보니, 영걸들은 그런 나와 젤다 공주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재앙 가논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젤다 공주와 전설 속의 용사라는 내가 호흡이 잘 맞기를 바랐을 터였다. 그래서 고론족 영걸이 옛날 의식을 따라해 보자고 한 것이겠지.


이 기억을 통해 떠올린 옛 전설이 하나 있다. 그건 초대 하일리아 여신과 함께 재앙을 봉인한 기사는 여신과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여신이 하이랄 왕국을 보전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했고, 그래서 사람으로 환생한 첫번째 여신은 운명의 용사를 만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용사가 자신과 가장 친했던 소꿉친구였다는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재앙을 봉인하고 행복하게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전설을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배경이 있기에 고론족 영걸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젤다 공주는 그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 속 분위기로 봐서 그 의식을 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 다음 기억은... 리발 광장에서 리발을 만났던 기억이다. 호위 기사 임명식에서 퇴마의 검 때문에 자신이 선택되지 못했다는 걸 의식한 리발은 나를 엄청 도발했었지. 의식장 옛터에서의 젤다 공주와 내가 했던 의식이 허울 뿐이라 하더라도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니.... 그래서 더 그렇게 비꼬았던 것일까?



그리고 다음 기억은... 코모로 연못 근처... 신수를 조정하러 가는 길에 젤다 공주가 내게 물었었지. 그 퇴마의 검과는 잘 통하고 있냐고. 기억을 떠올렸을 때만 해도 그게 무슨 소린가 의아했었는데... 그 기억을 다시 보고 있자니, 우르보사가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어쩔 수 없지. 우리 공주님에게 있어서 저 녀석의 존재는 콤플렉스의 상징 같은 거니까 말이야..."


'젤다 공주는 내게 어째서 콤플렉스를 느끼는 거지? ....? 하이랄 왕국의 공주인 그녀가 한낱 검사인 내게 왜.... '


뭐, 결국엔 이 나라 제일의 검사로 인정받았고 그래서 퇴마의 검을 지니게 된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공주와 기사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기억을 계속 돌아보던 나는 다섯번째로 찾았던 힘의 샘에서의 기억과 아데야 마을 근처에서의 기억을 찬찬히 곰씹었다. 아데야 마을에서 비를 피하다 자신의 속마음을 내게 전했던 공주는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었고, 힘의 샘에서는 이렇게도 열심히 수행하는데 여신의 힘을 일깨울 수 없다며 답답해했었지....그리고 그 질문을 내게 왜 했는지....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머리 뒤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에 잠시 멍해졌다.



'그래... 왜 그녀가 내게 콤플렉스를 느끼는지 이제야 알겠어... 내가 퇴마의 검을 갖고 있었던 것 때문에, 여신에게서 선택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하이랄 왕가의 공주들이 대대로 물려받는다는 그 신성한 힘을 깨우치지 못해서.....!'


젤다 공주가 나에게 처음엔 왜 그렇게 쌀쌀맞았는지, 고대 돌기둥군에서는 영문도 모르도록 화를 냈는지...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무릎을 꿇었다. 젤다 공주가 내 앞에 서서 기사 임명식을 했을 때의 그 모습처럼...


퇴마의 검.... 아직 찾지 못한 퇴마의 검.... 100년 전, 대체 그 검을 뽑았을 때 나는 어땠었지? 머리를 쥐어뜯어보았지만 검을 뽑았다는 사실만 알 뿐,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지 않았던 기억이 갑자기 툭하고 나올리는 없었다. 임명식 흉내내기에서도 젤다 공주가 말하긴 했다. 퇴마의 검의 선택을 받은 자가 용사라고.... 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렵다. 퇴마의 검은 정말 선택을 받은 자만이 뽑을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건 리발이 말하듯,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 아닐까? 


모두들 내가 검술로써는 천재적 재능을 지녔고, 열심히 훈련했다고 했다. 누구보다 노력했던 기억은 내게도 있기에 그 점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왕가의 피를 타고난 공주가 뭔가 특별할 것 없는, 나 같은 검사에게 콤플렉스를 느꼈었다니.... 이 안타까움은 어찌하면 좋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는 그쳤고, 다시 동이 틀 시간이 왔다. 다시 태양의 빛이 공기를 가르고, 밤새 비를 맞았던 내 머리 위로 따뜻한 햇살이 느껴졌다. 나는 일어서서 자세를 고쳐 의식장 옛터에 스러진 기둥에 기대 앉았다.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정리하고 싶었지만 혼란스러웠다. 젤다 공주의 슬픈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검이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 검을 지님으로써 내가 져야 했던 부담감과 의무감은 꽤나 무거웠기에, 어째서 퇴마의 검을 뽑으려고 했을까 후회한 적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젤다 공주가 나를 보는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여신이 선택한 사람이라면 보이는 재능... 아무리 힘을 일깨우려 해도 방법을 모르는 자신... 그러니 나를 처음 봤을 때는 나를 대하기 껄끄러웠겠지. 


모든 것이 지나 뒤돌아 보게 된 기억들은... 어찌 보면 잔인하게 느껴졌다. 젤다 공주의 모습도 답답하게 보였지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년 전의 나는 잘못해서 일을 그르칠까 걱정 되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주변의 기대가 무겁게 느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뭘 어떻게 생각하든지 무시했던 것 같다. 임무에만 집중하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 어두운 젤다 공주 얼굴 위로 겹쳐 떠올랐다. 


몸을 일으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거대한 하이랄 성의 모습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념의 붉은 기운이 타오르는 성... 저 안에, 그 모든 것을 안고 - 결국엔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 젤다 공주가 버티고 있다... 


젤다 공주는 결국 자신의 힘을 찾았잖아... 그러니 퇴마의 검을 찾던지... 아니면 젤다 공주가 각성하는 그 기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 그 때가 되면 또 다른 진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 마음 어디에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젤다 공주와의 엇나갔던 마음에 안타깝고 답답했던 기분 어딘가로, 푸르름이 넘실대는 평원의 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였다. 원념이 불타오르는 하이랄 성의 암운과는 다르게, 잔인하게도 평원 너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곳곳에는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하늘에는 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다니고... 


나는 다시 시커 스톤을 켜서 지도를 살펴보았다. 아직 밝히지 못한 미지의 땅이 있는 방향이 보였다. 이번엔 그쪽으로 가는 거야! 나는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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