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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엘리 Apr 11. 2024

다시 찾은 다섯번째 기억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59)


고론족들이 사는 곳은 어디일까, 생각하면서 추낙 지방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풀숲에서 보코블린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나를 보고 공격해왔다. 멀리서 보니 녀석들의 체력 정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 그렇지.... 나, 영걸의 옷을 입고 있었구나...

 


전에 임파가 이 옷을 내게 건네주었을 때가 생각났다.  임파는 내게 옷을 주면서 영걸의 옷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걸의 옷을 입고 있으면 눈 앞에 바로 보이지 않는 적의 위치도 알 수 있고, 몬스터들의 체력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해당 몬스터들과 바로 싸워야 하는지 아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때는 비교적 약한 보코블린들이 공격해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말을 타고 달리는 녀석들은 활로 쏘아 맞춰 말에서 떨어뜨린 후에 공격했다. 쉽게 전투가 끝나고, 나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곤충들을 잡고 풀도 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끝없이 초원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평원에 급격하게 땅이 꺼져 있는 작은 분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지 아래쪽에는 물이 고여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운데 부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패러세일을 펼쳐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시커 스톤의 알림이 울렸다.

'힘의 샘'

힘의 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어디에서 들었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땅에 착지해 보니 힘의 샘 주변은 신전 분위기가 가득한 고대의 돌기둥과 건축물로 둘러싸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샘으로 보이는 곳의 한켠에는 하일리아 여신상이 서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육각형의 돌바닥이 있었다. 나는 그 육각 돌바닥에 착지하여 주변을 더 살폈다. 본래는 이 돌바닥 위에 지붕이 있었겠지만.... 이끼가 잔뜩 껴 있는 유적의 잔해는 이미 무너진지가 꽤 되어 보였다. 그런데... 이곳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니 이곳의 풍경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여신상이 가운데 서 있고, 양쪽에는 아주 굵은 나무가 우뚝 서 있는.... 어디서 봤더라? 곰곰 생각하다가 시커 스톤의 앨범이 생각났다. 거기에 이 비슷한 사진이 있었던 것 같다!



시커 스톤의 앨범을 열었더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정말 똑같이 남겨져 있는 그림이 있었다. 이때는 밤이었던 것 같은데.... 앨범을 들여다보다가 하일리아 여신상을 바라보았더니, 젤다 공주의 뒷모습이 슬쩍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여기에도 잊혀졌던 기억이 있구나... 나는 시커 스톤을 든 채로 눈을 감았다. 어른거리는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면서, 달밤의 샘 표면에 반짝거리던 빛과, 크게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가 짙게 누워있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달빛의 끝에, 젤다 공주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달빛을 오롯이 받으며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이었다.. 다른 샘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기도를 올렸지만, 그날은 그 기도가 더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샘의 입구에 서 있었지...



그런데 젤다 공주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뜨고는 모았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그녀는 많이 지쳐보였지만, 슬퍼보이기도 했다. 하루종일 말없이 기도만 드리던 그녀가 갑자기 말을 시작했는데, 그 목소리가 조용한 샘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시작해서, 조금 놀랐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젤다 공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왕가의 공주가 대대로 계승한다는 재앙을 봉인하는 힘......"



젤다 공주는 하일리아 여신상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건 기도에 의해 눈을 뜨게 되는 성스러운 것......"



"늘 그렇게 들으며 자랐어요...."



젤다 공주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저 이야기는 나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여신님께 드리는 기도일까?



젤다 공주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다시 목소리를 냈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던 몸을 가득 채워 주는 영력도... 할머님께서 들으셨다는 정령의 목소리도..."



"그 무엇 하나.... 저는 느껴지지 않아요...."

젤다 공주의 목소리에 점점 기운이 없어졌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루 종일 이렇게 기도하는데.. 아니, 그 전에도.. 여러 번 샘에 수행을 왔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그녀의 답답함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젤다 공주는 다시 두 손을 모은 채 말을 이어갔다.

"아버님에겐 몇 번이나 꾸중을 들었죠. [ 그건 네가 학자 흉내나 내고 다니니까 그런 것이다 ] 라고..."



그러나 젤다 공주는 갑자기 힘을 내서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해도....!!!"

모았던 손은 스스로 뿌리쳐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채로.... 젤다 공주의 슬픔은 이제 분노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고대의 신과 관련된 이 땅에서조차... 성스러운 힘이 저에게 깃들진 않는군요...."



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다시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 가르쳐주세요..."



나는 그 말에 놀라 젤다 공주를 쳐다보았다. 저 말은.... 하일리아 여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내게 던지는 질문인 거였구나.... !



젤다 공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내게 물었다.

"저에겐... 무엇이 부족한 거죠.....?"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려 젤다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절규가 너무도 가슴아팠다. 젤다 공주가 어릴 때부터 노력해 왔다는 건 들었지만... 내가 지켜본 수행만으로도 노력은 충분하다 할 수 있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젤다 공주에게 뭐라고 말을 했을까.... 대답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아닌가? 감히 내가 뭐라 할 수는 있는 건가? 젤다 공주에게.... 하일리아 여신의 피를 물려받았을 그녀에게...



손에 들고 있었던 시커 스톤의 사진을 바라보다 시커 스톤을 제자리에 넣었다.

처음엔 하일리아 여신에게 올리는 기도라고 생각했지만, 내게 묻는 질문이었다는 걸 알고 당황했던 기억...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코모로 주둔지 근처 연못에서, 젤다 공주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마스터 소드와 잘 통하고 있느냐고 물었었지. 그때도 그녀는 우울한 표정이긴 했지만, 힘의 샘에서 젤다 공주는 그때와는 달랐다... 괴롭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내게 모두 보인 셈이 되었다.


내가 마스터 소드를 뽑은 것을 두고, 젤다 공주는 내게 어떤 특별한 힘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그런 건 없다. 그저... 나는 마스터 소드를 뽑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검에게서 특별한 기운을 느껴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의 기억으론 그렇다. 언젠가 검을 다시 찾는다면, 젤다 공주가 말한, 검과 무언가 소통했을지 모르는 그 기억도 찾을 수 있을까?


만약, 마스터 소드를 뽑았을 때의 기억이 나면... 지금 끊어진 이 기억 뒤에 내가 공주에게 뭐라 대답했을지 알게 될까?



나 역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기억은 부족하다.... 안타깝고 안쓰러운 젤다 공주의 모습... 그리고 그런 공주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을 것 같은 나.... 100년전 나는 젤다 공주에게, 뭔가를 해주긴 했을까? 그녀를 지키는 것 외에.... 그녀에게 힘이 되는 말을 전해주기는 했을까?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건 공주의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의 노력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고... 결국 당신은, 그 힘을 어떻게 쓰는지 깨달아 지금 이렇게 재앙 가논을 누르는 희생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당시엔 나조차도 모르는 미래다. 비록 말재주는 없는 나이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답답해하고 힘들어하는 젤다 공주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그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기를....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앞에서 빛을 내고 있는 하일리아의 여신상에 다가갔다. 극복의 증표를 가지고 기도를 하면 내게 생명력을 주는 하일리아의 여신...


힘의 샘에서의 기억대로라면, 젤다 공주는 그렇게 각지의 샘에서 기도를 드렸지만,  이 여신상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젤다 공주가 말한 '선택된 자'로서의 나는... 100년전에도 여신상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내가 여신상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그녀에게 ... 어떤 말을 해줬을까....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도 나는 분명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100년전에는 나 역시, 하일리아 여신상에게 말을 걸어도 아무 것도 느끼거나 듣지 못했을 거다. 마스터 소드를 뽑을 수 있었던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고, 나는 가디언과 신수의 도움을 받아야 재앙 가논을 무찌를 수 있었을 거다.


프루아가 했던 말처럼, 재앙 가논이 깨어나고 나서야 시커 스톤이 빛을 발해 나를 인도했으니 그 전의 나 역시, 젤다 공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녀의 마음에 더 공감이 갔겠지. 가녀린 어깨를 떨며 슬퍼하던 젤다의 뒷모습.... 안쓰러웠던, 그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하일리아 여신상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여신상에 눈부신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여신상에서 우아하고 평화로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샘까지 잘 오셨습니다... "



나는 내 기억에 대한 걸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하일리아 여신은 내게 다른 길을 열겠다는 말을 했다.


"이 힘의 샘에 붉은 정령 올드래곤의 비늘을 바치세요....저, 여신 하일리아가 당신을 인도하겠습니다."


올드래곤의 비늘? 붉은 정령? 그럼 간혹 하이랄 여기 저기서 보이던 용들도 일종의 정령이라는 말인가? 또 다른 의문을 떠올리던 순간 하일리아 여신의 목소리는 그 이상의 답을 내게 주지 않고, 메아리만 남은 채 목소리를 거두었다.


"저, 여신 하일리아가 당신을... 인도하겠습니다...."




여신은 지금 내가 할 일은 오직, 신수를 탈환하여 공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길을 인도할테니 그 길을 따라... 공주를 구하라는.... 말을 내게 전하는 것 같았다.


힘의 샘 안을 한바퀴 돌다가 샘의 입구로 나왔다. 언덕을 올라 풀이 가슴께까지 넘실넘실 자란 들판으로 올라오니 지평선 너머에 붉은 달이 떴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 후드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신수가 있는 마을을 찾으러 서두르자는 마음에, 나는 풀이 길게 자란 평원을 헤치며 붉은 달을 향해 뛰었다.


젤다, 당신의 질문에 이제서야 대답할 수 있어 미안해요... 당신은 절대로 헛된 일을 하던 것이 아니었어요. 지금 당장은 당신이 있는 하이랄 성에 갈 수 없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결국 나는 당신에게 가게 되어 있다는 걸 이제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 같아요.


붉은 달은 붉게 타올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가라앉았던 원념들이 들고 일어나 사라졌던 몬스터들이 다시 일어나고, 스탈 몬스터들도 눈을 떴다. 매캐한 기운이 내 주변을 감싸고 도는 것 같았으나, 나는 이제 그런 정도는 개의치 않게 되었다. 점점... 젤다와의 기억을 찾을수록, 나는 몰랐던 감정을 깨달아간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땅으로 뛰고 또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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