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이상하게 정신없이 지낸 한 주였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난 주말에는 심야 영화라도 한 편 봐줘야 되는데 말이죠, 요새 심야시간에는 상영을 안하더군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상영시간이 줄어든게 괴로운 일이지만 아이러니칼 하게도 COVID-19로 텅 빈 CGV극장에서 오드리햅번의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넓은 상영관에 3-5명 정도가 영화를 보는, 여느때 같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이게 저같이 나이가 좀 있어서 (아...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옛날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6-70년 전 흑백영화를 상영관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거든요.
햅번이 주연한 5개의 작품이 상영중이지만 그 중에서도 극장에서 처음 보게 된 <로마의 휴일 (1953년)> 얘기를 안 할 수 가 없습니다.
공주가 등장하고, 틀에 짜여있고 답답한 황실 생활에서 도망쳐 세상에 나왔다가 일반인 남자(라고는 하나 당연히 키코고 잘생긴 그레고리 펙 정도는 되어야 -.-)를 만나고, 평범한 삶을 잠시 즐기다가 어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아주 익숙한 클리셰지요?
이런 뻔~한 스토리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감독의 능력과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아마도 로맨틱 코미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햅번이 자신만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전형적인 스타일을 창조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내용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더 말 할 필요도 없어서 영화와 관련되서 생각나는 이야기를 한번 써 볼까 합니다.
영화를 보면 그레고리 펙이 잘 생기기는 했지만 워낙 청순한 햅번에 비하면 좀 나이가 많아 보입니다. 당시 영화들이 유명배우들을 그냥 썼기 때문에 이런 캐스팅이 된 것 같은데 로마의 휴일에 이어 찍은 <사브리나 (1954년)>에서는 험프리 보가트(1899년생)가 상대역으로 나오는데 20대 중반의 햅번은 아버지뻘하고 연애를 하는 셈입니다. 이 당시만 해도 인기있는 배우 몇명으로, 특히 남자 주인공의 경우는 거의 독식을 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만에서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를" 라는 대사를 날리던 <카사블랑카>에서 훨씬 멋있었지요.
영화의 첫 부분에 모든 장면을 로마에서 찍었다라고 안내가 나오는 걸 보면서 당시에도 로마는 꼭 한번 여행을 해보고 싶은 그런 곳이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로 로마가 더 유명해진 면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진실의 입>입니다. 특히 일본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해서 진실의 입 앞에 서있는 긴 줄에 상당수가 일본인이라고 합니다.
혹시 영화에 나오는 로마의 여러 장소들 중에서 지금은 볼 수는 없는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조는 밤 늦게 집에 가는 도중 길거리 벤치에 누워있는 앤 공주를 발견합니다. 이 장면을 찍은 길은 콜로세움 옆 포로 로마노인데 이 영화를 찍은 것은 1953년 이후 포로 로마노는 계속 발굴되었고 지금은 스크린에서 보이던 풍경과 달라졌습니다. 영화에 등장한 길은 기둥만 남아있는 사루투느스 신전과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사이에 있던 자동차길인데 이후 발굴이 진행되면서 이 길이 사라지고 밑으로 파 내려가 포로 로마노 내 관람로가 되어 있지요. 지금은 휠씬 뒤쪽 캄피돌리오 광장쪽으로 길이 옮겨져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이름처럼 코믹한 요소가 빠질 수가 없고 이런 영화에서는 잊지 못할 장면들이 하나씩 있기 마련입니다.
로마에 휴일에서는 조가 수면제에 취한 앤공주를 방으로 데려가려고 나선형 이층계단으로 손을 잡고 데려가는데 조는 이층으로 앤 공주는 계단옆 일층으로 그냥 지나쳐 가자 마치 춤을 추듯이 앤공주의 손을 잡아끌어 돌아서게 한 뒤 계단으로 인도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 이층에 올라와 옆집 문을 두드리려는 앤을 겨우 붙잡는데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같지만 웃음이 절로 나오는 부분이죠.
로마시내를 스크터를 타고 헤집고 다니거나 선상의 댄스파티에서 벌어지는 대환장 싸움도 그런 장면이구요.
그러나 가장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장면은 역시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입니다. 공주라는 신분으로 다시 돌아가 기자회견장에서 조를 만나 서로 모르는 척하며 질문과 답을 하고나서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선물로 주는 장면이죠. 서로의 신분 차이와 상황을 받아들이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헤어지는데 아쉽긴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휴일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영화와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바로 20세기 로맨틱 코미디의 최고 작품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노팅힐>입니다. 공주와 기자 대신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연기한 유명 영화배우와 서점 주인으로 바뀌었지만 아주 유명한 여자와 평범한 남자 사이에 벌어지는 로맨스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또 여 주인공이 남자의 집에 우연히 방문하게 되고, 특히 마지막 장면인 기자회견장에서 서로 모른척 하며 대화하는 것까지도 비슷합니다.
아래 링크의 영상은 한 네티즌이 노팅힐의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 오디오를 로마의 휴일 마지막 장면 영상에 섞어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 섞은 것이라는 걸 모르고 보다가 엥...로마의 휴일에서 내가 놓친 장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 만큼 깜박 속았습니다. 이거 만든 사람은 천재인듯.
물론 두 영화의 결정적 차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느냐 아니냐입니다. 뭐 노팅힐에서는 애도 낳고 잘 살았다는....
이런 이유로 노팅힐은 로마의 휴일의 오마쥬 영화가 아니냐는 평이 많았는데 각본가에 따르면 그렇지는 않다는군요.
각본을 쓴 리차드 커티스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We had a meeting with Julia and her agent when she first agreed to do the part,” Curtis recalled. “As they were leaving, her agent said it’s such a beautiful tribute to ‘Roman Holiday.’ I hadn’t seen ‘Roman Holiday.’ Thank god I hadn’t because I might have been self-conscious. I am very glad I didn’t know.“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만한 노팅힐 스토리지만 사실 리차트 커티스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타임> 등 로맨틱 코미디의 기념비적 작품들의 각본을 쓴 사람이라 일단 저 기사를 믿어봐야겠습니다.
노팅힐에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여러개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휴 그랜트가 노팅힐 시작을 걸어가는 롱 테이크에서 계절이 바뀌는 장면은 팽당한 남자의 쓸쓸함과 시간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멋진 시퀀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휴 그랜트의 집안이 흥미로웠는데 그림을 통해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벽에 걸린 Chargall의 신부(La Mariée)와 Huan Gris의 Guitar and glass, 그리고 속옷만 걸친 친구가 계단을 내려올 때 옆에 걸려있는 Kandinsky 작품이 눈에 띄더군요.
여배우와 연애를 하고 싶은 총각들은 집안에 명화 프린트를 좀 사다 걸어놓는 것을 추천합니다. ^^ 저도 프라도 미술관에서 사온 프린트를 액자로 만들려고 작정한게 벌써 시간이 일년이 더 지나버렸네요.
가장 여행하기 좋은 계절에 COVID-19로 집안에 있다보니 로마와 여러 미술관들이 더 가고 싶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말한대로 멀리 가는 것은 실제 그 과정이 귀찮기만 하고 집안에서 상상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에 동의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