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슬픔보다는 이제 평안 가운데 쉬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선생과의 대담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어제 서점을 찾았다.
서점에 들리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인지의 왜곡을 경험한다.
차량통제용 볼라드 기둥의 그림자가 이상하게도 기둥모양과 전혀 다른 길고 들쭉날쭉한 모양으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보인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정신 차리고 다시 보니 우연히 신호등의 그림자 끝이 기둥의 아랫부분과 딱 만나면서 마치 볼라드의 그림자처럼 착각을 한 것이다.
인간의 감각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서점에 들어가 보니 추모인지 마케팅인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진 채 선생의 책들이 한 곳에 모여있었다. 덕분에 내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아들에게 줬던 "생각 깨우기"라는 시리즈를 구입 가능하다. 초등생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어떤 책들이 있나 살펴보는데 내가 평소 이분의 글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실제 읽어본 책은 몇 권이 안 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과 실제 경험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다른 것인가?
20대에 친구가 나에게 너는 어떤 기타리스트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당시 떠오른 곡은 Still got the blues와 Parisienne Walkways여서 게리 무어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집에 놀러 와서 내 방을 둘러보면서 "너는 게리 무어를 좋아한다더니 이 많은 CD 중에 한 장밖에 없네?"라고 물었을 때 잠시 내가 그다지 안 좋아 한 건가 하고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여전히 절절함을 들려주는 게리 무어가 좋아하는 연주자 중 한 명이란 것은 진실이다.
사실 이어령 선생이 이 대담집을 내기까지는 인터뷰어인 김지수 기자의 능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조선비즈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 소개된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자살을 생각했던 청소년에게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나도 김지수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생각을 이끌어내고 전달하는 그녀의 능력과 글솜씨에 감탄하곤 했다.
이 책 역시 서점에서 돌아와 새벽까지 한달음에 끝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좋은 내용을 담고 있고 또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김지수 기자의 능력이 돋보인다. 그녀는 이 대담이야말로 인터뷰어로서 꿀 수 있었던 가장 달콤한 꿈이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마지막에 만난 마지막 제자와 기자로서 살아온 삶의 후반부에 운명처럼 만난 스승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담담하게 대화한 내용을 정리한 이 책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이 주는 힘은 무척 다르다.
신앙과 영성, 삶과 죽음, 서양과 동양의 철학, 과학과 현대사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김지수 기자는 넌지시 던지고 이어령 선생은 특유의 진지함과 위트로 답을 한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설명해 내는 이어령 선생의 마법 같은 화술은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아마도 평생 고민하고 답을 알려고 노력해왔던 결과일 것이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신앙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라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어령 선생은 파리의 지하철에서 느꼈던 경험과 당신이 신이 만나는 과정을 통해 설명해준다. 신앙은 선거철에 성경책을 들고 대형 교회에 카메라 기자를 동반해 예배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성이지만 과학과 최신 문화,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통찰 역시 뛰어난 분인데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 아무래도 혼탁한 선거의 계절이라서 그런지 현대 사회의 극단적 이분화와 가짜 뉴스에 대한 일갈이 눈에 들어온다.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뭐가 더 문제인지를 알 수 있지만 프레임에 갇혀서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듣자마자 거짓말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호통을 치신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영성에 대한 것이다. 이어령 선생이 당신의 삶을 정리하던 마지막 2년이 코로나로 인류가 죽음을 경험하고 있던 시기였다는 것이 이 책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고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란 선생의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받는 것"이다.
여전히 인간의 지식이라는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영성에 다다른 선생이 무척 부러웠고 언젠가 선생이 봤던 그 빛 속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