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전쟁의 비극,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해가 바뀌면서 며칠 쉬는 연휴 기간 동안에는 마치 꼭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한편 봐야 새해를 맞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21년을 보내고 2022년을 시작하는 기간 동안 선택한 영화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였다.
킹스맨은 기발한 전개와 잔인한 장면의 성인 오락영화였던 전작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마치 전쟁영화처럼 시작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액션 장면과 악당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원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내가 킹스맨이 흥미로웠던 점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역사를 적당히 섞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낸 것, 그리고 전쟁터의 공포감과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어나간 전쟁이 얼마나 어이없는 정치적 결정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주인공 옥스퍼드 공작(랄프 파인즈)은 전쟁 반대론자이지만 아프리카 식민 전투에서는 부인을,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는 아들이 전사하는 슬픔을 겪는다. 아내의 유언에 따라 아들을 애지중지하며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키우지만 성인이 된 아들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남자로서 국가를 위해 참전해야 한다는 공명심에 참전한다. 그러나 아들이 전선에 투입된 지 몇일만에 허무하게 전사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고통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의외로 이 영화는 잘 묘사해 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주도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포도뮤지엄에서 킹스맨을 보면서 받았던 느낌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독일 표현주의 작가 케테 콜비츠 (Käthe Kollwitz:1867-1945) 전에서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판화 가중 한 명으로 불리는 콜비츠는 19세기 말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나타난 도시빈민층의 삶과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통해 경험한 공포와 아픔을 그녀의 연작을 통해 드러내 준다. 특히 그녀의 삶에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둘째 아들이 며칠 만에 사망한 것은 영화 킹스맨의 옥스퍼드 공작과 오버랩된다.
평상시 일기로 삶의 기록을 남기기 좋아했던 그녀의 1914년 10월 30일 일기에는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라는 한 줄만 있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녀의 데생 능력이 드러나는 <잠자는 아이와 여성 노동자> 같은 석판화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어머니 가슴에 기대어 자고 있고 어머니 역시 삶의 피곤함에 지쳐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또 콜비츠의 대표작 <전쟁> 시리즈를 감상할 수 있는데 공포에 젖어있는 퀭한 눈의 사람들과, 아이들을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어머니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눈망울, 또 자식의 전사 소식에 슬퍼하는 부모의 모습 등 전쟁의 무자비함을 잘 표현해주는 연작이다.
아마도 20세기 말을 대학에서 지냈던 사람들은 이 판화들이 어딘가 눈에 상당히 낯이 익을 텐데 바로 데모나 집회 시 깃발이나 포스터에서 보던 흔히 볼 수 있었던 민중 판화 형태이다. 콜비츠의 이 판화는 중국 소설가 루신에 의해 중국으로 소개되어 큰 영향을 미쳤고, 뒤늦게 80년대 한국 민중미술계에서 유사한 형식의 판화들을 만들어졌다고 한다.
콜비츠전 외에도 포도뮤지엄에서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적대시하게 만드는 혐오와 혐오 표현에 대한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도 같이 열리고 있다. 전시작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 추천할 만 한데 혹시 휴가로 제주를 방문한다면 한 번쯤 이 전시회들을 찾아보길 권유한다.
전시의 시작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소문들로 시작한다. 무언가 얻기 위해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 시작된 의도한 거짓말들. 오늘도 우리가 계속 들었던 그런 말들.
그리고 혐오와 편견에 대한 전시회에서는 그저 인류가 세계 여기저기에서 저질렀던 혐오 범죄의 기록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준다.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대통령 후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같이 보여주며 편견을 강요하고 정책대결 대신 녹취록이나 주고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후진 정치가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킹스맨 영화의 대사와 콜비츠 전시회에서 인상 깊었던 경구들을 소개한다.
Our enemies think we are gentlemen, but reputation is what people think of you. Character is what you are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중 옥스퍼드 경이 아들에게
나이 듦은 청춘의 나머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상태이다.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위대한 상태이다.
내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나이 듦이었다. 영원히 타오르는 촛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케테 콜비츠 1921년 11월 일요일 일기 중
더 이상 20세기의 어리석은 전쟁을 반복하지 않을 것 같았던 2022년 바로 지금. 믿을 수 없게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들이 죽고 어머니들이 울고 있는 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전쟁의 본질이다.
100년 전에는 공명심과 애국심에 현혹되어 자원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젊은이들이 있을 뿐이다.
아들의 전사 소식에 슬픔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픈 이별을 해야 했던 어머니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걱정하고 있을 두 나라의 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Dominick Farinacci의 <Dawn Of Goodbye>를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