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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Nov 17. 2020

나 하고 싶은 말

"그런데 말야, 왜 '타인의 일기'야?"


"말 그대로 내 일기가 아니니까."


"근데 네가 쓴 건 맞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도 내 이야기는 아냐."


"네 이야기가 아니라면, 허구라는 이야기인가?"


"허구지. 내 실물된 기억들을 가져다 쓴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 안에 네가 없을 리는 없잖아."


"없을 리는 없지. 적어도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도둑질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야."


"확실해? 정말로 하나도 가져다 쓰지 않았다는 거 말야."


"모르지. 그건. 또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도 알 수 없고 말야."


"그러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적어도, 내가 아는 한한, 나는 기억을 팔아먹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라는 거야."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일기'라고 명명한 건 왜 때문인데?"


"그건 아마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수줍은 사람이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이야기에 나도 등장시킨거야?"


"글쎄, 네가 나를 등장시킨건지, 내가 너를 등장시킨건지는 알 수 없지. 오히려 원칙대로만 말하자면, 우리 둘 다 그저 등장 되었을 뿐이야. 나는 너이고, 너는 나야. 우리는 파편화된 화자들일 뿐인 것이고, 그래서 너와 나는 사실상 어디에도 없어."


"내 생각에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도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내 목적은 나를 이해시키는 데에 있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너는 지금 네가 글을 쓰는 게 너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정말로 그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충분히 있지. 그저 지식의 전달을 목적으로 쓸 수도 있고 말야."


"이 글은 그런 글일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적어도 야심은 있어. 나는 슬픈 것들을 좋은 것들로 만들어서 서술하고 싶어."


"슬픈 것이 어떻게 좋은 게 되는 건데?"


"슬픈 것들이 의미가 되는 순간에는 그리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의미?"


"그래 의미. 무엇이든 의미로만 만들 수 있다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없어.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도 무언가를 배운 거니까."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떤 슬픔이든 괜찮다고?"


"그건 아니겠지. 견딜 수 없는 슬픔은 배울 수 없는 슬픔일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말 거야. 그러나 적어도 그런 슬픔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마음을 의미로 만들어서, 나아갈 수는 있는 거잖아."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로 끝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거야?"


"아니,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싶었답니다 - 라는 마음을 쓰고 싶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어도 하나 이상 있다고 말야."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잘 모르겠어. 그냥 자기만족이지. 누군가를 짝사랑하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누군가를 잃어버린 날에도, 그저 그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고 싶은 거지." 


"너는 그걸로 만족해?"


"만족하건 만족하지 않건, 그런 것을 바랄 수 있는 거잖아. 그렇다면 나는 그 마음을 따다 글로 적어 보는 거고 말야."


"그러니까 너는 만족하냐는 말이야. 그저 그 마음이 그곳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만족할 수 있어?"


"만족할 수 없지. 그러나 만족하고 싶었어." 


"그건 위선이야."


"야.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아냐. 그렇지도 않아. 내 생각에 여기서 내 역할은 네가 잘난 듯이 떠드는 말에 힘을 빼기 위한 역할로 등장한 거 같거든. 내가 있어야 너도 네 말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하기엔 네 말대로 이미 위선적인걸."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아냐. 정말로 그래."


"그런데,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만족하지 못한 마음은 어디에 쓰이는 거야?"


"어떤 점에서는 만족하지 못한 마음도 함께 드러나게 될 거야. 단지 그걸로도 다시 또 괜찮다고 말해보는 거지."


"그러니까.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냐고 내가 묻는 거잖아."


"괜찮지 그럼."


"괜찮지 않아."


"너는 그렇게 말해야지. 그게 여기서 네 역할이니까."


"아무리 우리가 하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시도로서 분리되어 있다고 해도, 결국 너도 그렇게 구성된 한 명의 사람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네게서도 정말로 여남은 감정 같은 것은 없는지를 나는 묻고 있는 거야." 


"있겠지. 그렇지만, 여전히 그걸 말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여전히 문제는 남아. 왜냐하면 그런 네게서 숨은 것들을 들춰내는 것은 나의 역할이거든."


"좋아 그럼. 나를 한번 설득해봐." 


"자. 네가 서술하는 것. 아니, 우리가 함께 지금 대화하는 이 내용들은 모두 '타인의 일기'야."


"원칙적으로는 그렇지?"


"그리고 너는 천성적으로 수줍은 사람인 거고." 


"그럼. 그래서 나는 이런 방식으로밖에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그런데, 도대체 이 안에서도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을, 설령 슬프고 아픈 것에서조차도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그 자체로 아프고 슬픈 것들은 언제 글로 드러낼 수 있어? 네 욕심과 같은 것들도 말야. 그게 들어갈 자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야."


"그런 게 들어갈 자리는 없지. 그리고 그게 핵심인 거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서술하는 거야말로 중요한 거 아닐까? 글이라는 것은 실제로 드러내기 어려운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허구를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야." 


"실제로 드러내기 어려운 것들을 나는 실제로 서술하려 하는 거야. 감춰진 의미와 같은 것들 말야. 사람들은 종종 그저 살아가면서도 제 안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니까 말야. 나는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거야." 


"근데, 다른 사람들, 혹은 적어도 나한테는 감춰져 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적어도 네게는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게 더 '쉬운 것'아냐? 오히려 그렇게 감추고자 애쓰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야말로 네게서 더 많이 어려운 거잖아."


"..."


"어려운 것들을 어려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글이라는 것이 허구라는 핑계로 나타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 맞아. 그래서 내가 천성적으로 수줍은 사람이라는 거야."


"그럼 뭐야? 네가 정말로 하지 못한 말 말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누구한테 중요한 걸 말하는 건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틀려."


"아니, 하나도 틀리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내 감정에 관심이 없고,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어."


"그게 사실인지는 몰라도 솔직한 대답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거짓은 아니니까"


"괜찮지 않아. 적어도 너 자신에게 있어서는 하나도 괜찮지 않아."


"그래도 말하고 나면 후회할 거야."


"너는 지금 네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어. 여기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이 바보야."


"아무거나 쓸 수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쓸 수도 없지."


"당연한 소리를 반론이랍시고 사용해서는 안 돼. 그래서 다시 한번 묻는 거야. 너는 정말 괜찮아?"


"괜찮지 않아. 하지만 괜찮다고 써 볼 수는 있는 거잖아."


"무얼 위해서?"


"벌서 같은 말을 뱅뱅 돌고 있잖아. 그런 의미가 있고, 나는 그게 살아가기 위한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어."


"너는 그게 도움이 돼? 그래서 정말로 괜찮아? 만족하냐는 말이야."


"..."


"너는 괜찮지 않고, 또 하나도 괜찮지 않아. 괜찮다고 서술하면서 괜찮아지고 있을 뿐이야. 네 글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을 쓰는 게 아니고, 그것을 사실이라 쓰면서 너는 그저 여가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너는 위로받고 있는 거라고. 결국 그건 하나도 사람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결국 너는 너 자신이 위로받고 싶을 뿐이야."


"그래 그 말도 사실이야. 그래서 그렇게 나를 몰아붙이는 역할을 네가 하고 있는 거고. 그런데, 궁극적으로 너의 목적은 어떻게 하든 성취될 수 없어. 왜냐하면, 결국 너는 나고 나는 너니까. 우리는 그저 글로써 서술되고 있을 뿐이니까. 그래서 내가 정녕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걱정 없이 토해낸다 하더라고, 이 역시도 그저 하나의 글이 될 뿐이며 또 허구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나는 나의 역할을 어쨌건 다 하고 있는 거야. 괜찮다 말하면서, 천천히 웃으면서 그렇게 길을 걸어간다는 그 이미지 아래에서 드글 드글 끓고 있는 그 감정에 대해서 나는 묻고 있는 거야. 네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억눌러둔 그 분노와 서러움 같은 것들 말야. 그것은 누가 뭐래도 네 안에 있어."


"있지."


"그래. 있고, 너는 하나도 괜찮지 않고, 멍청이 위선자에, 겁쟁이 새끼에 불과하니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 내가 이렇게 말해버린 이상, 나는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어. 탈고 후에도 나의 이 말들은 변함없을 거야. 그러니까 말해."


"무서워."


"말하라고. 괜찮다고."


"무서웠어. 내가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까 봐 무서웠어."


"그 감정이라는 게 뭔데."


"원망. 나를 떠나간 것들에 대한 원망. 두려움. 내가 떠나간 것들에 대한 두려움. 나는 말야 복수하고 싶지 않았어. 내게 복수할 능력이 없기를 바랐어. 내가 복수할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기를 바랐어."


"아직 아니야. 계속해."


"사랑했어. 그래서 미워했고, 그래서 죽어버리고 싶었어. 더는 살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말한다면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파하고,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파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어. 그래서 괜찮다, 괜찮다 - 그리 말하면서 견뎌야 했어."


"사랑했어. 천천히 바라보기를 원했어. 그렇게 행복하기만 하다면, 내 행복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것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괜찮다고,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러나, 괜찮지 않았어."


"그래 괜찮지 않았어. 나는 가지고 싶었어.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찬 바람 부는 날에, 마음이 참을 수없이 쓸쓸해져서는 그렇게 문득 생각했고, 그래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 죽어버릴까.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거야."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죽지 않아."


"그래. 죽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해버리고도 다시 또 내 말들에 숨어버리는 거야."


"왜냐하면 그건 안락하니까."


"하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고, 남몰래 해보던 짝사랑이라는 것에도, 등져서 되돌아 걷던 그 길에도, 온통 감정들로 범벅 져 있어서는, 그렇게 털썩 쓰러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리 잠들어버리면 좋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벌벌 떨며 잠들던 그 밤에. 그리 생각했었지."


"그래. 그리 생각했었지."


"-라고 쓰고, 이제 다시 또 여기에 '타인의 일기'라는 타이틀을 붙여버리는 거야."


"그래. 그래서 우리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할 것이고, 또 그래서 우리글의 목적만이 달성되는 거야."


"그래. 그렇게 되겠지. 이제 우리의 글 밖에서는 다시 삶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여전히 마음이 있어."


"그래 마음이 있어. 이제 너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글쎄. 우리의 이 알쏭달쏭을 넘어서서. 다시 또 살아가야만 하겠지."


"괜찮니?"


"괜찮지 않아. 아파."


"중간부터 나는 이제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아."


"우리는 그저 하나의 장기말에 불과하니까. 모두 의도된 거니까."


"힘내 지지마."


"그럼. 당연하지."


"너는, 미친놈이야."


"그럼.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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