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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Nov 24. 2020

기묘한 밤의 술자리와 불쌍해서 좋아하는 사람

실컷 떠들고 웃다가 술집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내게 흘러들었다. 즐거운 것은 좋지만, 역시 조금 지치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쉴 요량으로 천천히 술집 뒤를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담배 피우니?"


나는 화들짝 놀라 어두운 골목 안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붉은 담뱃불이 희미하게 보이고, 또 그것을 그녀가 내뱉은 담배 연기에 그 불빛이 희미해지고 또 뭉개지는 것을 발견한다.


"아뇨?"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묻는다.


"그런데 왜 나왔어."


"조금 지쳐서 잠시 쉬려고요."


나는 시끌벅적한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되물었다.


"왜? 재미없니?"


"아뇨 재미있는데, 잠시 숨 좀 돌리려고요. 재미있다고 정신없이 보내면 오늘이 좀 아깝잖아요."


나는 내가 무슨 말도 하는지 모르고 그리 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대뜸 말했다.


"속지 마."


"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결국 바보처럼 되물었다.


"속지 말라고. 저 안에 저 남자한테 말야."


"형이요?"


"그래. 네 친형이니?"


"아뇨, 그냥 안지 얼마 안 됐는데, 제가 동생 뻘이라 그냥 형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뭘 속지 말라는 거예요?"


"저 사람 말야. 평생 저렇게 놀면서 세상 즐거운 것처럼 행동하는 거 말야. 결국 아침에 술 깨면 아무것도 아닌 건데, 저렇게 또 취해서는 언제나 축제가 계속될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켜 놓잖아. 지금 너처럼 말야."


나는 이 대목에서 약간 기분 나빠졌다.


"아니, 저는 형이 저한테 뭐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저도 형한테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그냥 노는 게 뭐 어때서요?"


그러자 그녀는 담배를 다시 또 한 모금 빨고 또 뱉어내더니,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짧은 머리에 키는 170cm 정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가 냉랭한 것과는 다르게, 눈매는 부드러웠다. 그런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도 벌써 좋아하게 되어 버려구나. 저 사람 말야."


"네. 좋아해요. 재밌잖아요."


"재밌어서 좋은 거니?"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또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왠지 이 여자 앞에서는 바보처럼 대답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말을 잘 해요. 그럴듯하게. 그래서 재밌잖아요 사람이. 이상한 말도 그럴듯하게 하고."


그리고 그제야 그녀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나도 그래서 좋아해. 저 사람. 그런데, 그게 지긋지긋해. 평생 즐거울 것처럼 웃으면서 사람들한테 좋은 소리나 하고 말야. 자기 속은 하나도 모르면서..."


"형은 그러면 싫은데도 매번 이 짓을 한다는 거예요?"


"아니, 그도 즐거워. 즐거우니까 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즐겁게 자고 또 취해서 자고 일어나면 또 괴로워. 그래서 다시 또 매일 취하는 거지."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래. 다들 그렇게 살지. 그런데 저 사람은 그걸 가끔 잊어버리게 만들어. 함께 있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지. 결국 끝까지 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말야."


"저는 형이 저한테 책임이고 뭐고 하나도 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속아버린 뒤에는 네가 스스로 그게 뭔지 알게 될 거야. 괴로워서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고장 난 장난감한테 스스로 일어나라고 말하는 그런 어린애와는 다른 뭔가를 느낄 테지. 저 사람도 무너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도 덜컥 겁을 먹고서는 그제야 삶이라는 게 아주 끔찍한 것이라는 것에 무서워질 테지. 그리고 그러한 두려운 기색은 다시 그 사람을 괴롭게 만들 거고, 또 그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비틀비틀 걸어와서는, 연료를 마시듯이 취해서는 다시 또 억지로 소리를 지르겠지. 하지만 또 진심으로 즐거워하면서 말야."


내가 아직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형과 또 처음 보는 나에 대해서 그녀가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짜증 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또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보구나. 미안해. 그러나 얘야, 인생은 원래 권태롭고 끔찍한 거란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렴. 다치지 말라고 해주는 말이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되묻거나 고까운 티를 내면 대화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 길로 다시 들어왔다. 들어오니 맥주 눌어붙은 퀴퀴한 냄새와 안주가 지글거리는 냄새들이 한 번에 다시 또 훅하고 들어왔다. 저 너머에 테이블에서 형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은 처음 본 사람과 어떤 논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을 보니 서로 불쾌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러니까 기축통화를 없애는 게 좋다고?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데?"


형은 그렇게 되물었다. 경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기축통화는 그걸 찍어내는 국가에만 이득이야. 아예 화폐 자체를 없애는 게 맞아."


나는 묻는 형의 얼굴을 한번 보고, 또 그에 반론하는 남자의 얼굴도 한번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데 현실적으로 물물교환할 수도 없는 거고, 다 사람들 사정이 있지 않겠어?"


형이 속 편하게 말하자, 남자는 다시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아니 내 이야기는..."


하지만, 형은 그의 말을 끊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됐어 그래 너도 네 전공분야니까, 다 뜻이 있겠지?"


그렇게 말을 얼무어 버리고는 하하 웃었다. 그리고서는, 나를 바라본다.


"야! 어디 갔었어. 엄청 찾았잖아."


그러면서 형은 내 옆으로 오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내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이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다가와서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잠깐 정신없어서 쉬러 나갔어요. 그런데..."


나는 술집 뒤에서 한 이야기를 형에게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데?"


형이 되물었다.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음흉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말해봐 얼른."


그렇게 다시 또 보채는 형을 보면서, 나는 계속 우물쭈물했다.


"너 누구 만났구나?"


나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몰랐지. 지금 너 놀라서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말하는 거 보고 이제는 확실히 알겠네."


형은 내 표정을 과장되게 따라 했다.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다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좋아하는 사람이요?"


"왜 그렇게 놀라? 그 사람이 내 욕했구나?"


"네. 약간 그랬어요."


나는 어차피 에둘러 말해봤자 다 알아챌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형은 말하면서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형은 매번 이렇게 살잖아요."


"무슨 소리야. 매일은 아니야."


"매일은 아니라는 말이 매번 이렇게 산다는 말이에요."


"어쭈. 이 새끼가."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그런데, 형 매번 이렇게 살아도, 그분은 형보고 뭐라고 안 해요?"


"너 정말 밖에서 무슨 소리 제대로 듣고 왔나 보구나?"


형은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괜찮을 거야. 저 여자도 나 이렇게 살다가 만난 사람이니까. 그냥 내가 매번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서 털썩 쓰러져 자고, 또 일어나는 모습만 보다 보니까 지긋지긋해진 거겠지."


"저보고 형한테 속지 말랬어요."


"그런 말도 했구나."


형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되묻는다.


"재미있니?"


"뭐가요?"


"여기서 이렇게 나랑 대화하는 거 말야."


"네 재밌으니까 오죠."


"그래 그러면 된 거지. 필요할 때만 가끔 오고, 그렇게 즐거우면 되는 거야."


"그럼요"


그런데 너무 자주 와서는 안 돼."


"왜요?"


"여긴 인생의 대안이 아니거든. 잠시 쉬러 오는 곳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형은 그 여자가 한 말과 비슷하게 말했다.


"인생은 원래 끔찍하고 권태롭고 지긋지긋하고 지루하니까."


늘 철딱서니 없는 말만 하고 하하 웃어도, 가끔은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실 즐거워서가 아니라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러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이랑 비슷한 말 그분도 말했어요."


"그래. 그리고 이제 속는다는 말도 뭔지 알겠네?"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속을 법한 것도 형이 지금 다 말했잖아요."


"그래. 바보야. 원래 그게 사기꾼들의 수법인 거야. 상대방이 속을 수도 있으니 주의까지 주고, 결국 자기 안으로 회유하는 거지. 인생 원래 다 그런 거라고 말하면서, 다시 또 즐거운 방식으로 내 가게 매출이나 올리도록 하는 거고 말이야."


나는 이렇게 있는 거 없는 거를 다 말하는 형의 진심이 결국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 나는 이렇게 계속 생각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그냥 이런 게 다 지긋지긋한 거지.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고 말야. 그러다 보면 생각이 복잡해지는 거야.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런데 말야, 이런 생각 계속 굴리다 보면 결국 다 무의미해져. 그냥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즐거우면 되는 거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말야."


"그러면요, 형."


나는 말한다.


"응, 말해봐."


"이런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형이 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다 말하고, 또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또 이 짓을 어떻게 안 할 수 있는지 너는 아니?"


"음..."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야 결국.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속이는지 아닌지도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여자도 그래서 계속 내 옆에 있는 거지."


"중요한 게 뭔데요? 그리고 그분은 뭘 알아요?"


"그 여자는, 내가 불쌍한 걸 알아."


"형이 왜요?"


"그래 그러니까 말야. 네가 모르는 걸 그 사람은 안다는 거지. 내가 매일 이 짓을 하고 털썩 쓰러져 잘 때, 내가 불쌍하게 산다는 걸 알아."


자기를 불쌍하게 여겨서 좋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걸까? 나는 그를 생각해 봤다. 어쩌면 그럴 것도 같았다. 여기 이 가득 찬 공간에서 형을 불쌍하게 여길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그분을 특별하게 만들어서, 형도 그분을 좋아하는 거예요?"


"멍청아, 그래서 누굴 좋아하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누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걸 제일 싫어해."


나는 이 사람이 또 자기 생각을 알 수 없도록 장난치고 있다는 것만 같았다.


"그럼 형은 그분을 왜 좋아해요?"


"너 방금 밖에서 그 여자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런데요?"


"멍청아 예쁘잖아."


형은 하나도 진실되지 않게 그렇게 툭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손도 대지 않은 잔에 제 잔을 대더니 술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를 누가 불쌍하게 여기는 거, 하나도 안 특별해. 나랑 조금만 더 있다보면 누구나 다 알아."


그렇게 말하는 형을 보면서, 나는 아주 조금은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왜 형을 좋아하는지도. 그것도 형이 불쌍해서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 여자가 왜 내게 그렇게 이야기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형이 사람들을 책임질 수 없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형을 책임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는 형에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형은 나를 흘끔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시 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무의미한 이야기, 잊어질 이야기, 다시 또 지긋지긋한 삶과 권태로운 삶으로 다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 다들 시끄럽게 떠들고 또 웃어버렸다.


기묘한 밤의 술자리였다.


-타인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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