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하 Nov 24. 2020

기묘한 밤의 술자리와 불쌍해서 좋아하는 사람

실컷 떠들고 웃다가 술집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내게 흘러들었다. 즐거운 것은 좋지만, 역시 조금 지치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쉴 요량으로 천천히 술집 뒤를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담배 피우니?"


나는 화들짝 놀라 어두운 골목 안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붉은 담뱃불이 희미하게 보이고, 또 그것을 그녀가 내뱉은 담배 연기에 그 불빛이 희미해지고 또 뭉개지는 것을 발견한다.


"아뇨?"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묻는다.


"그런데 왜 나왔어."


"조금 지쳐서 잠시 쉬려고요."


나는 시끌벅적한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되물었다.


"왜? 재미없니?"


"아뇨 재미있는데, 잠시 숨 좀 돌리려고요. 재미있다고 정신없이 보내면 오늘이 좀 아깝잖아요."


나는 내가 무슨 말도 하는지 모르고 그리 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대뜸 말했다.


"속지 마."


"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결국 바보처럼 되물었다.


"속지 말라고. 저 안에 저 남자한테 말야."


"형이요?"


"그래. 네 친형이니?"


"아뇨, 그냥 안지 얼마 안 됐는데, 제가 동생 뻘이라 그냥 형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뭘 속지 말라는 거예요?"


"저 사람 말야. 평생 저렇게 놀면서 세상 즐거운 것처럼 행동하는 거 말야. 결국 아침에 술 깨면 아무것도 아닌 건데, 저렇게 또 취해서는 언제나 축제가 계속될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켜 놓잖아. 지금 너처럼 말야."


나는 이 대목에서 약간 기분 나빠졌다.


"아니, 저는 형이 저한테 뭐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저도 형한테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그냥 노는 게 뭐 어때서요?"


그러자 그녀는 담배를 다시 또 한 모금 빨고 또 뱉어내더니,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짧은 머리에 키는 170cm 정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가 냉랭한 것과는 다르게, 눈매는 부드러웠다. 그런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도 벌써 좋아하게 되어 버려구나. 저 사람 말야."


"네. 좋아해요. 재밌잖아요."


"재밌어서 좋은 거니?"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또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왠지 이 여자 앞에서는 바보처럼 대답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말을 잘 해요. 그럴듯하게. 그래서 재밌잖아요 사람이. 이상한 말도 그럴듯하게 하고."


그리고 그제야 그녀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나도 그래서 좋아해. 저 사람. 그런데, 그게 지긋지긋해. 평생 즐거울 것처럼 웃으면서 사람들한테 좋은 소리나 하고 말야. 자기 속은 하나도 모르면서..."


"형은 그러면 싫은데도 매번 이 짓을 한다는 거예요?"


"아니, 그도 즐거워. 즐거우니까 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즐겁게 자고 또 취해서 자고 일어나면 또 괴로워. 그래서 다시 또 매일 취하는 거지."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래. 다들 그렇게 살지. 그런데 저 사람은 그걸 가끔 잊어버리게 만들어. 함께 있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지. 결국 끝까지 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말야."


"저는 형이 저한테 책임이고 뭐고 하나도 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속아버린 뒤에는 네가 스스로 그게 뭔지 알게 될 거야. 괴로워서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고장 난 장난감한테 스스로 일어나라고 말하는 그런 어린애와는 다른 뭔가를 느낄 테지. 저 사람도 무너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도 덜컥 겁을 먹고서는 그제야 삶이라는 게 아주 끔찍한 것이라는 것에 무서워질 테지. 그리고 그러한 두려운 기색은 다시 그 사람을 괴롭게 만들 거고, 또 그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비틀비틀 걸어와서는, 연료를 마시듯이 취해서는 다시 또 억지로 소리를 지르겠지. 하지만 또 진심으로 즐거워하면서 말야."


내가 아직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형과 또 처음 보는 나에 대해서 그녀가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짜증 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또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보구나. 미안해. 그러나 얘야, 인생은 원래 권태롭고 끔찍한 거란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렴. 다치지 말라고 해주는 말이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되묻거나 고까운 티를 내면 대화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 길로 다시 들어왔다. 들어오니 맥주 눌어붙은 퀴퀴한 냄새와 안주가 지글거리는 냄새들이 한 번에 다시 또 훅하고 들어왔다. 저 너머에 테이블에서 형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은 처음 본 사람과 어떤 논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을 보니 서로 불쾌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러니까 기축통화를 없애는 게 좋다고?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데?"


형은 그렇게 되물었다. 경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기축통화는 그걸 찍어내는 국가에만 이득이야. 아예 화폐 자체를 없애는 게 맞아."


나는 묻는 형의 얼굴을 한번 보고, 또 그에 반론하는 남자의 얼굴도 한번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데 현실적으로 물물교환할 수도 없는 거고, 다 사람들 사정이 있지 않겠어?"


형이 속 편하게 말하자, 남자는 다시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아니 내 이야기는..."


하지만, 형은 그의 말을 끊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됐어 그래 너도 네 전공분야니까, 다 뜻이 있겠지?"


그렇게 말을 얼무어 버리고는 하하 웃었다. 그리고서는, 나를 바라본다.


"야! 어디 갔었어. 엄청 찾았잖아."


그러면서 형은 내 옆으로 오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내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이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다가와서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잠깐 정신없어서 쉬러 나갔어요. 그런데..."


나는 술집 뒤에서 한 이야기를 형에게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데?"


형이 되물었다.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음흉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말해봐 얼른."


그렇게 다시 또 보채는 형을 보면서, 나는 계속 우물쭈물했다.


"너 누구 만났구나?"


나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몰랐지. 지금 너 놀라서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말하는 거 보고 이제는 확실히 알겠네."


형은 내 표정을 과장되게 따라 했다.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다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좋아하는 사람이요?"


"왜 그렇게 놀라? 그 사람이 내 욕했구나?"


"네. 약간 그랬어요."


나는 어차피 에둘러 말해봤자 다 알아챌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형은 말하면서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형은 매번 이렇게 살잖아요."


"무슨 소리야. 매일은 아니야."


"매일은 아니라는 말이 매번 이렇게 산다는 말이에요."


"어쭈. 이 새끼가."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그런데, 형 매번 이렇게 살아도, 그분은 형보고 뭐라고 안 해요?"


"너 정말 밖에서 무슨 소리 제대로 듣고 왔나 보구나?"


형은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괜찮을 거야. 저 여자도 나 이렇게 살다가 만난 사람이니까. 그냥 내가 매번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서 털썩 쓰러져 자고, 또 일어나는 모습만 보다 보니까 지긋지긋해진 거겠지."


"저보고 형한테 속지 말랬어요."


"그런 말도 했구나."


형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되묻는다.


"재미있니?"


"뭐가요?"


"여기서 이렇게 나랑 대화하는 거 말야."


"네 재밌으니까 오죠."


"그래 그러면 된 거지. 필요할 때만 가끔 오고, 그렇게 즐거우면 되는 거야."


"그럼요"


그런데 너무 자주 와서는 안 돼."


"왜요?"


"여긴 인생의 대안이 아니거든. 잠시 쉬러 오는 곳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형은 그 여자가 한 말과 비슷하게 말했다.


"인생은 원래 끔찍하고 권태롭고 지긋지긋하고 지루하니까."


늘 철딱서니 없는 말만 하고 하하 웃어도, 가끔은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실 즐거워서가 아니라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러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이랑 비슷한 말 그분도 말했어요."


"그래. 그리고 이제 속는다는 말도 뭔지 알겠네?"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속을 법한 것도 형이 지금 다 말했잖아요."


"그래. 바보야. 원래 그게 사기꾼들의 수법인 거야. 상대방이 속을 수도 있으니 주의까지 주고, 결국 자기 안으로 회유하는 거지. 인생 원래 다 그런 거라고 말하면서, 다시 또 즐거운 방식으로 내 가게 매출이나 올리도록 하는 거고 말이야."


나는 이렇게 있는 거 없는 거를 다 말하는 형의 진심이 결국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 나는 이렇게 계속 생각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그냥 이런 게 다 지긋지긋한 거지.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고 말야. 그러다 보면 생각이 복잡해지는 거야.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런데 말야, 이런 생각 계속 굴리다 보면 결국 다 무의미해져. 그냥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즐거우면 되는 거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말야."


"그러면요, 형."


나는 말한다.


"응, 말해봐."


"이런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형이 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다 말하고, 또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이 또 이 짓을 어떻게 안 할 수 있는지 너는 아니?"


"음..."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야 결국.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속이는지 아닌지도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여자도 그래서 계속 내 옆에 있는 거지."


"중요한 게 뭔데요? 그리고 그분은 뭘 알아요?"


"그 여자는, 내가 불쌍한 걸 알아."


"형이 왜요?"


"그래 그러니까 말야. 네가 모르는 걸 그 사람은 안다는 거지. 내가 매일 이 짓을 하고 털썩 쓰러져 잘 때, 내가 불쌍하게 산다는 걸 알아."


자기를 불쌍하게 여겨서 좋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걸까? 나는 그를 생각해 봤다. 어쩌면 그럴 것도 같았다. 여기 이 가득 찬 공간에서 형을 불쌍하게 여길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그분을 특별하게 만들어서, 형도 그분을 좋아하는 거예요?"


"멍청아, 그래서 누굴 좋아하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누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걸 제일 싫어해."


나는 이 사람이 또 자기 생각을 알 수 없도록 장난치고 있다는 것만 같았다.


"그럼 형은 그분을 왜 좋아해요?"


"너 방금 밖에서 그 여자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런데요?"


"멍청아 예쁘잖아."


형은 하나도 진실되지 않게 그렇게 툭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손도 대지 않은 잔에 제 잔을 대더니 술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를 누가 불쌍하게 여기는 거, 하나도 안 특별해. 나랑 조금만 더 있다보면 누구나 다 알아."


그렇게 말하는 형을 보면서, 나는 아주 조금은 그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왜 형을 좋아하는지도. 그것도 형이 불쌍해서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 여자가 왜 내게 그렇게 이야기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형이 사람들을 책임질 수 없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형을 책임질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여자는 형에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형은 나를 흘끔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시 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무의미한 이야기, 잊어질 이야기, 다시 또 지긋지긋한 삶과 권태로운 삶으로 다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 다들 시끄럽게 떠들고 또 웃어버렸다.


기묘한 밤의 술자리였다.


-타인의 일기-




https://brunch.co.kr/@1khhan/148


매거진의 이전글 겁과 교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