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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y 24. 2020

무너지는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

그의 세계가 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고궁처럼 웅장한 크기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것에 천천히 다가간다. 가까이에서 보니 알 수 있었다. 그 외벽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벽에 외벽을 덧대어 쌓아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벽의 높이는 대략 30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맨 위에 있던 일꾼이 도르래에 연결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며 그와 아주 똑같이 생긴 다른 일꾼들에게 소리쳤다.


“벽이 얇아지고 있어요. 오늘 중으로 일 미터 이상의 두께를 덧대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쾌활하고 빛이 났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아주 큰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소개했다.


“저희는 이 벽을 계속해서 덧대서 두께를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었다.


“왜 이 일을 하는 거죠?”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저 벽 뒤편에서 ‘쾅’하는 굉음이 들렸다. 벽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벽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일꾼들은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이 균형을 잡았다.


“놀라셨죠? 저 안에서는 끊임없이 침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 때문에 우리가 이 밖에서 매달려 벽을 유지 보수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이 건물은 붕괴되어 버릴 거예요. 저 안에서 부수는 만큼 밖에서는 쌓아야 합니다.”


“그만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모든 것은 무너져버리겠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왜요? 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죠? 들어가면 안 되나요?”


“아뇨. 들어가는 것은 자유입니다. 오히려 손님분을 위해서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만, 볼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별게 없나요?”


“별게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은 텅 비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무엇을 감싸고 있는 거죠? 그의 자아는 어디에 있는 거죠?”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이 공간 전체가 그의 자아입니다. 우리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러자 다시 또 반대편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이번에는 맨 위에서 일하던 사람이 추락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래에는 3미터 두께의 완충 장치가 있었고, 그는 다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늘 있는 일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오히려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우리가 쌓는 것은 새로운 일들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성장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결코 지치지 않거든요.”


그때 위에서 또 누군가 소리쳤다.


“반대편에서 침식이 중단되었습니다! 수면에 들어갑니다!”


그 소리와 함께 징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나와 함께 있던 남자의 표정이 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랄까, 입맛을 다시던 그는 무언가 아쉬워하는 듯했다.


“잘 됐군요. 덕분에 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쾌활하게 말하는 그는, 단순히 유지 보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일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여하간 사람들은 한 데 모여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술을 가져왔다. 그제야 나는 일을 하는 이들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모두 이 영토의 주인과 같은 얼굴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느낌은 달랐다. 모두 다 그의 일거수와 일투족을 파편화하여 나눠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풍경은 이상하게 너무나 기이하고 쓸쓸했다. 산과 나무 하나 없는 토지 위에, 흰 벽으로 둘러싸인, 어찌 보면 콜로세움처럼 생긴 공간. 그것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노을과 똑같이 생긴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곧 해가 질 겁니다. 우리는 이때 술을 마시죠.”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둘러앉는다. 그러며 그들은 잔을 돌리며 주전자를 가지고서 그를 채웠다. 나는 물었다.


“왜 벽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마시는 건가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 안에는 어차피 아무것도 없다고요.”


“그런데 왜 볼 것도 없는데 열심히 벽을 쌓는 거죠?”


“꼭 이유가 필요 없는 일도 있는 거랍니다.”


“이유가 없는데 이 일을 왜 하는 건데요?”


“정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강박증 같은 겁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공간은 사라져 버릴 겁니다. 저 안이 텅 비어 있다고 해도, 그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 구분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게 되고 말아요.”


“그렇게 안과 밖의 구분이 중요하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우리는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저 안에는 우리의 근원적인 두려움이 놓여 있거든요.”


“근원적인 두려움이요?”


“벽 밖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밝고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살도록 만드는 사람들이지, 한 사람을 파괴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짭니다. 무엇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새로운 일들은 또 다른 일을 낳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죠.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아뇨 그게 뭐든 저는 전혀 모릅니다. 뭐죠?”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 빠르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괴시키기도 한답니다. 사람이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가끔은 굵은 나무도 스스로 부러지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저 벽 뒤에는 우리가 힘차게 만들어 놓은 세계를 파괴하고 갉아먹는 우리 이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본질적으로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 이면의 세계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쾌활한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건배를 외쳤다. 모든 이들이 따라서 함께 건배하였고, 모두 술을 들이켰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그런 그를 올려보다가, 다시 또 그를 보챘다.


“저 너머의 세계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니요?”


“태초에 이 세계에는 벽도 우리도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직 나눠지지 않은 무언가가 존재했지요. 그는 이 바닥에 있는 흙을 모아서 작은 산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든 것에 점점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만드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지루해져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그는 혼자였고, 이 일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권태였습니다. 그때 그는 일어나서 발등으로 그가 이룩한 것을 툭 하고 쳐 봤던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것은 폭삭 무너져 버렸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첫 번째 파괴였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감탄에 비할 바 없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스스로 파괴할 수 있다는 것에 그는 놀라고 말았고, 이내 자기가 스스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상처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불안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자신의 창조적 충동과 파괴적 충동 그리고 불안과 권태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름달이 뜬 날 저녁, 자기 자신을 스스로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밝고 아름다운 것, 그리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바깥에, 그리고 어둡고 불안하며 권태로운 것 그래서 스스로를 파괴시켜 버릴 수 있는 것은 안으로 집어넣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분화된 자아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파괴하는 그것은 저 안에 홀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왜 너는 스스로를 파괴하는가. 왜 너는 파괴를 견디지 못하는가. 왜 너는 스스로를 벌을 주는가. 왜 너는 저 나락까지 떨어지고야 마는가. 왜 추락하는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그러는 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파티는 시작되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농담을 하고 얼싸안았다. 오늘의 성취를 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밤의 어둠으로부터 도피하려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취해서는 한 명씩 픽픽 쓰러져 잠에 들었다. 그 모습들은 하나같이 순진하고 즐거우며 또한 외로워 보였다. 저 너머의 불안을 간신히 견뎌내려는 것처럼.


나는 취해 잠에 든 그들을 등지고 벽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문 하나가 있을 뿐이었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희미한 월광이 하늘에서 내리치고 있었고, 때문에 모든 것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사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 너머에 벽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한 사람의 실루엣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머리 맡에는 곡괭이 하나가 그저 놓여 있었을 뿐,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지만, 그보다도 두려움이 더 컸다.


그래서 나는 몰래몰래 천천히 벽을 따라 걷는다. 이 벽 안쪽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한 바퀴를 다 돌기 위해서는 40분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벽을 만지며 걸었다. 걸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벽 주변에는 부서진 석재의 잔해물들이 가득했고, 단지 벽 주변만이 아니라 온통 그 잔해투성이로 가득했다. 이 벽은 아주 오래전부터 안에서부터 부서져왔고 밖에서는 끊임없이 쌓아가는 과정을 거쳐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곳에 왔을 무렵, 나는 이 벽에 또 다른 구멍을 발견했다. 이 구멍은 입구에 뚫려 있던 가지런한 문과는 달랐다. 그것은 울퉁불퉁했고, 그 구멍 뒤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 어둠이 밤의 어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들여다보다가 그 구멍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했다.


“그만두는 게 좋을걸요? 그쪽으로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옵니다.”


나는 그만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그였다. 그가 그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낮에 보았든 그의 얼굴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 피곤함 때문인지 그 눈빛은 불안하다기보다도 차라리 다부져 보이기까지 했다.


“이곳으로 나가면 벽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요?”


“어떤 의미에서는 벽 바깥으로 나가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들어온 곳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들어온 곳은 밖으로 나가는 “입구”이지만, 이 구멍은 “출구”입니다.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아니 바꿔 말하면, 다시는 돌아오기 싫은 사람들만이 이 구멍을 통해서 나가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구멍을 그대로 두는 이유는 뭔가요? 누가 나가기 위해서 이 구멍을 만든 건가요?”


“아뇨. 아주 오래전에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제가 이 구멍을 뚫는 것을 막지 못했어요.”


“그들이라뇨?”


“저기서 계속해서 벽을 쌓는 사람들이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봤다. 그는 비웃고 있었다.


“왜 이 구멍을 뚫은 거죠? 아니 애초에 왜 벽을 부수고 있는 거죠?”


“이 구멍은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떠난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 안에서 완전히 떠나기를 간절히 소망했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또 무언가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온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었나요?”


“그럼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한번 저 구멍을 뚫어버린 이후로, 모두 다 저 문을 통해서 들어와서 이 구멍을 통해서 나갔습니다.”


“그들이 떠나면 어떻게 되나요?”


“아프겠죠.”


“당신이요?”


“우리는 무엇을 아프다 아니다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픈 것이 있다면 이 세계 전체겠지요.”


“세계와 당신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거죠? 그의 아픔과 당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나요?”


“저는 파괴할 뿐입니다. 세계의 아픔을 막는 것은 저 밖에서 이 벽을 쌓는 인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구멍은 왜 메워지지 않는 거죠?”


“저들이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쾌활한 척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실패한 것 따위는 다시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인 거죠. 자신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서 애처롭게.”


그는 비웃었지만 악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 벽을 부수고 이 세계에 흠집을 내는 거죠? 부수지 않으면 저 밖에서 사람들이 힘겹게 벽을 쌓을 필요도 없잖아요.”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던가요?”


그가 이렇게 묻자, 나는 내가 확실히 들어 아는 것만을 말한 건지를 고민했다.


“됐습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하지만 이건 확실합니다. 저들은 제가 얼른 이 벽들을 부숴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부수기 때문에 쌓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제가 부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들이 하는 것은 두껍게 쌓는 게 아니라 벽의 두께를 유지하는 것이고, 제가 무언가를 파괴해대지 않으면 그들의 존재가치는 더 이상 없어지고 말 테니까요.”


“그런데 그러면 왜 부수는 일은 혼자 하는 거죠? 벽 밖의 사람들은 여럿이서 일하던걸요?”


“쌓는 것은 어렵고, 부수는 것은 언제나 쉽습니다. 공든 탑도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제가 하는 것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지도록 하는 거죠.”


“즐겁나요?”


나는 순전히 궁금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도 특별히 동요하지는 않았다.


“파괴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때도 있는 법이지요. 모든 새로운 것들은 과거를 배신함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하는 거고요. 그걸 알고 있으니 저들도 저를 그대로 두는 겁니다. 물론 한번 구멍이라도 나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서는 그 상처의 근처로도 오지도 않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는 구태의연해 보였다. 파괴는 침착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에 벌벌 떠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파괴를 등진 저 너머의 사람들. 그들은 불안을 이기고, 상처를 잊기 위해서 아이들처럼 열심이다.


나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다시 입구가 있는 벽 쪽으로 돌아온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곡괭이를 쥐고, 다부진 팔로 벽을 내려쳤다. 그가 한번 내려치자마자 벽은 마치 껍질을 벗어내듯, 제 표피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벽 반대편에서 징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일을 시작한다.


그의 세계가 아파하고 있었다.


“또 봅시다. 당신이 출구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확답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확실히 대답해 주는 게 좋을 겁니다. 그들은 나와는 달리 겁쟁이니까요.”


그말을 들으며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들이쳤다. 아침이었다.


내 옆에서 네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 같았다.


즐거워서 마시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너는 자기를 파괴한다. 내가 떠난다면, 너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스스로를 다잡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너는 많이 아프고 괴롭겠지. 그게 지겹다. 그게 지겨운데, 나는 네 안에 뻥 뚫린 구멍 같은 것이 무엇인 줄 알 것 같아서. 그걸 오로지 나만이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는 어쩌면 무서우니까. 늘 새로운 것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게 언젠가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아서.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서. 그게 쓸쓸해보여. 그리고서 술에 취해 잠든 이 모습을 보면, 그냥 네가 너무 애쓰는 것 같아서 안쓰러우니까. 나는 기름져 헝클어진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 네 볼을 만진다.


오해하지 마. 너를 위해서 남아 있는 건 아니야.


다만 아직은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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