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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n 29. 2019

사라져 갈 여름 안의 떨림

습한 공기,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장마에 향기가 앞서 느껴지던 그 해 여름밤. 우리는 땀이 흐르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생긴 것은 합격점이었던 그 남자의 동태를 나는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적막을 깨고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요, 차라리 이 여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이에 나는 왜냐고 물었다. 그에 너는 오히려 여름이 너무 좋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너무 좋아할 때는요, 차라리 시간아 빨리 흘러가 버려라 -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해보곤 해요. 왜냐면,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이제 이 순간들은 추억이 되어서는 모두 다 내 마음 안에서 소유할 수 있으니까요."


당당함이랄 것은 하나도 없는 이런 유약한 남자라니. 나는 왠지 따지듯이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게 그래서 결국 더 좋아요? 좋은 시절 다 지나가게 두고, 지나고 나서야 그게 좋았다고 말하는 게, 실제로 그 시간의 한 가운데에 있는 거보다 났냐고요."


"좋지는 않지만, 더 안전하죠. 나만 떠올리고 나만 추억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너는 오히려 더 침착하고 차분해 보였다. 마음은 그럴지라도 시간은 지나기 전까지는 지나가지 않으리라는 것도 미리 알았던 것처럼.


"그래도 시간을 일부로 빨리 가게 하지는 않아요. 첫째로 그건 불가능하고, 둘째로 나도 좋은 것이 사라지는 것은 슬프니까. 그래서 참아요. 괜찮다 - 다 지나갈 것이다 - 그때까지 견디면 된다 - 이런 생각들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잘 되지는 않아요. 그건 내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거죠. 그래서 이 여름도 좋아서 불안하지만, 그래도 우선 두고 보는 거죠." 


내가 먼저 네게 성급하게 고백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속 터지던 사람. 이 남자와 이렇게 매주 만나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백 잔 정도 마신다고 해도, 이 새끼 나한테 절대로 먼저 고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용감하지는 않았지만, 안전하던 사람. 시간을 빨리 흘러 보내기를 바라면서도, 그냥 그 시간을 유영하듯이 태평하고 멍하게 길을 걷던 사람. 그때 나는 불안감보다는 안정감이 들었다. 너는 결코 내게 먼저 고백하지 않겠지만, 이 순간을 붙잡으려 갖은 애를 쓰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대신에 지난 추억과 먼 미래의 어느 지점 안에서 부유하고 있겠지만, 또 어느 날엔 가는 너만의 안락한 공간 안에서 나를 한 번 더 생각해 주겠구나 - 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그리고 뭔가 절대로 이 새끼의 안락한 추억 안에서 회고되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시작된 우리의 사랑의 역사. 너는 내가 불러내면 결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드러나는 너의 용기와 같은 것들. 내 입술에 네 입술이 닿을 때 느껴지던 떨림. 의외로 촌스러운 그 모습들이 별로 한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네가 멋부리려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떨림은 네 차분함 안에 놓여 있는 깊숙한 불안과 부끄러움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대신해서 내 어깨를 움켜쥐는 손과 어떻게든 차분하게 나를 감싸앉는 가슴과 같은 것들이, 네가 그에 맞서 시도하는 하나의 용기라는 것도 알 것 같았다.


너는 끊임없이 소중한 모든 시간들을 쉽게 보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너는 이 모든 순간들을 어서 빨리 익숙한 것으로, 그래서 불안 없이 한 명의 인간 앞에 친숙한 인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시간이 흘러가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결국 너는 나를 선택했다.


고백은 내가 먼저 했지만, 청혼은 네가 먼저 했다. 속 터지는 답답함에 싸우고, 또 내가 이끄는 곳으로 질질 끌려다니던 너는, 우리 관계의 피곤함보다 익숙함으로 더 사랑했다. 


'앞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그리 말하는 너의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이다. 가늘게 떨리는 그 목소리. 부끄럽고, 자신 없고, 불안하다. 시간은 더 빨리 흘러라 - 그러나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런 소중한 순간. 마침내 안락한 공간 안에서 우리가 함께 지난 사진을 돌아보며 - 그래 그때는 좋았었지 -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아니 오히려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금 이 순간을 누리고 또 진정함으로 보내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저 미래를 위해서, 얼른 빨리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허심탄회하기 그전까지, 너는 수줍음과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네 마음에 일어나던 작은 파도. 네 마음 안에서 무엇이 늘 승리할 것인지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네 말보다는 그 약한 떨림을 믿었고, 그 떨림과 싸워내서 간신히 지금 여기에 버티고자 했던 그 떨림을 믿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너는 이제 아버지가 되었고, 아이들을 재우고는 여기 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잠들어 있다. 너는 내게 익숙해졌고, 이제 그 떨림들은 아주 가끔씩만 약동한다. 아이가 나서는 학예회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 심하게 다투고 내게 먼저 사과할 때. 화해하고 간신히 또 따뜻한 말을 쥐어짜 낼 때. 


그리고 우리는 예견되었던 미래에 앉아서, 안락하고 안전한 우리의 방 안에서, 그때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던 그 여름을 너무나 편안하게 회고한다. 장마의 향기, 아스팔트 냄새, 가로등, 겹쳐지던 우리의 그림자, 풀벌레 소리, 피부에서 느껴지는 약한 끈적임, 우리의 철지난 대화 같은 것들.


그때 그 여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버렸다고 말하면서.


흘러가라 명령하고, 가지 말아라 붙잡아도 어쨌든 흘러버릴 그 시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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