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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pr 22. 2019

서브플롯의 사랑

영화관에 왔다. 심야영화다. 


오로지 홀로 나만을 위해서 가지는 시간. 가끔은 모든 일을 마치고 혼자서 늦은 시간에 들러 보곤 하는 것이다.  시시콜콜한 로맨틱 코미디다. 내가 결코 좋아해 본 적 없었던 걸 이제야 보고 있다. 대단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영원한 사랑,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랑, 한 번의 다짐으로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는 그런 약속 같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너무나 아프게 단절되는 관계는 더 최악이다. 끝이면 끝이랍시고 따라붙을 그리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모두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발생하는 하나의 질병이다. 사람들은 멋대로 기대하고 제 멋대로 상처받는다. 나는 그런 모습들이 싫었다. 그 어떤 그럴듯함으로 그 잘난 사랑이라는 것을 꾸민다 한들, 여전히 관계의 결말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앤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에도 그 둘은  갑작스런 불화로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들딸 잘 낳고 나서도 황혼기에 불어닥치는 늦바람에 이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대단할 것도 아닌 평범한 그 가능성을 무시한 채로 쉽게 눈물을 자아내도록 하는 그 짜증 나는 클리셰들. 


아빠가 두 집 살림을 하고, 엄마도 맞바람을 피웠다. 그런 집에서 자라서는 차라리 맞지 않는 인간들은 따로 살 때에야 차라리 그게 더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자랐다. 그놈의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로맨스든 불륜이든, 각자 그리는 그 대단한 모습 때문에 철저히 파괴되는 꼴을 너무 오랫동안 관찰했다. 그 안에 휘말려든 나의 방치된 삶 속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부모가 다시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내가 스스로 돈을 벌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돌보기를 바랐다. 그저 내가 다치지 않을 때까지, 내가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폭발하지 않기를 바랐다. 오직 그것 하나. 그러나 각자의 사랑에 미친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대로 살고자 나아갔고, 나는 그때부터 먼저 어른이 되기 위해서 늘 더 앞서 늙어야 했다.


"그럴 때는 서브플롯을 한번 살펴봐요. 주인공 말고" 


그때 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대단한 사랑이 짜증 날 때에는, 그 주위에 잉여 커플들이 있을 거예요. 그냥 그 대단한 사랑이라는 것을 포장해주는 사람들. 사소한 갈등과 해소의 과정을 겪고 마냥 행복하고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이야기에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사실은 주인공에 대한 메인 플롯을 짜는 것보다 이 서브플롯을 잘 배치하는 게 더 어려워요. 왜냐면 이들은 너무 지루해서도 안 되고, 너무 비극적이어서도 안 되고, 너무 특별하고 아름다워서도 안되거든요." 


우리는 작은 사교 파티에서 만났다. 인맥을 넓히는 것아니면, 짝짓기를 하려고 모인 것만 같은 이런 모임에 간신히 끼어들어 한 잔만 마시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 찰나에 네가 말을 걸어왔었다. 키 173의 평균 키. 못생긴 것도, 개성 있는 것도 아닌 그런 흔한 얼굴. 어딘가 조금 더 손을 본다면 더 나을 것 같은 그런 외모였지만, 사실 어디부터 어떻게 할 필요도 없이 그 평범함은 얼굴 전체를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눈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을 그런 자신감으로 가득했고, 그게 조금은 내 흥미를 끌었다. 그래 그 잘난 서브플롯의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 


"누구나 다 이야기를 쓸 때는 대단하고 멋진 이야기에 대한 계획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이복동생이랑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은 상대가 시한부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도 사랑을 시작하죠.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고,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고, 그래서 슬퍼지기도 하죠. 그러면 마치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보일듯한데, 그게 쓰다 보면 후져요. 왜냐면, 그 주변의 인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작가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극작가 지망생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 천사는 홀로 사는 노인의 마당 앞에 추락했다. 그리고 그 노인과 유대감을 키워갔다. 그러나 노인은 그 소년이 천사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노인은 그가 정신병자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냥 늙어버린 자신 대신에 장작을 패주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러나 몸을 다 회복한 소년은 노인의 쇠약한 몸을 다시 건강하게 되돌려 놓고 하늘로 돌아갔다고 한다. 


- 나는 별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생각할 때는 하나의 세계가 그려져야 하는데, 종종 그 인물들 이외에 놓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잊게 돼요. 가끔 이야기를 쓰다 보면 극작의 천재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죠. 그들은 마치 정말로 하나의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각자의 모습들로 자신의 개성이 담긴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또 사랑하죠.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나 그게 중심된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내 사랑에 대한 지론을 들은 너는 이어서 내게 그래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사랑에 대한 허들이 너무 높은 거죠. 사랑을 생각하다가 상처받고, 치졸한 모습을 보여서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다시 또 다 잊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보다 더 높고 단단한 그런 허들을 가진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 누구도 그 기준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지 않아요. 그 누구도 춘향이와 이몽룡 같은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요. 이몽룡처럼 먼 길을 떠나는 것도, 또 춘향이처럼 정절을 지키려고 변 사또 같은 놈한테 온갖 수치를 당하며 견디고 싶지도 않아요. 그들은 그냥 향단이와 방자 같은 잉여의 사랑을 하기를 바라죠.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냥 주변에 대단하고 불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저런 사랑하지 말자. 우리는 저런 힘겨운 길을 가지 말자. 우리는 그냥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저 천천히 사소한 노력들을 기울여 가자. 가끔은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을 만들어 가면서, 대단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기도 하고 또 대단한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타산지석으로 삼기도 하면서." 


너는 처음에는 나를 꼬시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흥분해서는 차라리 논쟁에서 이기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종종 당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는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가 이미 오래전에 네 평균 신장과 평범한 외모를 진즉에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사실로도 괜찮다.>


너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 우리는 늘 현실의 진단에서는 같았다. 단지 나는 그런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고, 심지어 그런 사실을 거부하고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 비극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도움이 돼요?" 


너는 내게 그렇게 물었지. 


"들어봐요.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때마침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쪽을 설득하려고 하죠. 그러면서 나는 구애하는 거예요. 사랑은 그렇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글 쓰는 것을 조금 공부해봐서 아는데, 지금 이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어쩌면 서브플롯이 아니라 메인 플롯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정말로 대단한 사랑이 싫으면, 간단한 사랑부터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잖아요?" 


그때 우리는 거대한 술 집의 한구석에서 한 잔 두 잔 술을 쌓아가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한 명씩 부르고 싶은 곡을 신청하고 무대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환호와 박수 소리. 나와 너는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런 외딴 공간 안에서 미지근한 보드카에 식어버린 토닉 워터를 섞어버리고 있었다. 쓴맛과 시금 털털해진 청량감이 목으로 넘어왔고, 우리는 그 공간 안에서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구석에 내 몰린 조촐함이 어떤 은밀함을 형성했고,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나쁘지 않다- 라.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그날 나쁘지 않았던 것은 너였고, 네 이야기도 생각보다 재미있었으니까.


그 이후로 우리가 했던 것은 어쩌면 서브플롯의 사랑. 우리는 결코 특별하지 않았어. 그저 봄에는 피어나고 또 흩날리는 꽃을 보러 거리를 나가고, 우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둘이었지. 우리는 함께 만나서 주변 사람들의 연애를 염탐했고, 어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과 불륜을 저질렀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오랜 친구의 연인을 좋아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고로 연인을 잃기도 했어. 그런 뒤에도 그들은 자신의 그 가지지 못하는 것들을 놓지 않은 채로 괴로워했고 또 그리워했고, 그러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을 기꺼이 쟁취하기도 했지. 우리는 그들을 험담하고, 그들에게 조언하고,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우리의 평범하고 순탄한 연애에 감사했다.


그리고 너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극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했고, 그 때문에 아파했고 그 짜증을 내게 전가했지. 나는 네가 종종 만나는 여자들에 질투했고, 그 짜증을 수동적으로 드러내고 결국에는 이래저래 크게 싸워가며, 나조차 하지 않는 연락보다 그에 무감해 보이는 네게 더 깊은 불안을 느껴갔고, 우리는 모두 조금씩 지쳐갔던 거야. 나는 대단한 것조차 아닌 이런 사소한 것들에 괴로워하는 모든 것들에 지리멸렬을 느꼈고, 부담 없이 시작하도록 만든 그 평범성이 결국 이 모든 것을 끝내게 될 이유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그렇게 우리가 그 평범함 속에서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와 수많은 사진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역사를 기꺼이 방생하기로 결심하던 날,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영화는 끝이 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영화배우를 사랑한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 여자는 고백한다. 나는 대단한 스타가 아니라, 당신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한 명의 소녀일 뿐이라고.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넘어서 진실된 그 마음을 다해 그녀를 붙잡으러 달려갔다.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쟁취했다. 그런 이야기 뒤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서브플롯이 있다. 그 남자의 푼수 같은 여동생과, 그 남자의 절친인 멍청하지만 착한 그런 남자. 그 둘의 사랑 이야기. 쉽게 시작해서 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그런 서브플롯 하나. 


그러나 그러한 평범성을 가진 사랑조차도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대단한 사랑도 쉬운 사랑도, 모두 쉬운 것이 아니고 또 모두 저절로 영원할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밤공기를 거치며 걸어간다. 고작 서브플롯의 사랑일 뿐이라고 믿었는데, 나는 왜 몇 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 울었던 것일까. 방안에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시나리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너의 흔적이 가득했다. 내가 그저 귀엽다고 말했던 못생긴 인형이 책상 위에 아직도 놓여 있었다. 나는 네게 말했다. "귀엽다 말했다는 사실이 내가 저것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 라고. 너는 미안해하면서도 씩 웃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래도 내가 그걸 기억해서 사줬다는 것도 귀엽지 않아? 물론 그게 네가 좋아한다는 사실은 아니지만" -이라고. 


결코 특별하지 않았는데 말야.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를 만나 기대고 싶다가도, 왜 나는 이런 기억 앞에서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를 망설이는 걸까. 한 명의 비련한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아 울고 싶어지는 걸까. 그래. 어쩌면 네 말대로, 나의 모든 사랑에 대한 그 회의적인 태도와, 그 마음을 뒤엎으려는 '서브플롯'의 전략은, 그리고 그에 뒤이어진 우리의 이야기는 어쩌면 하나의 좋은 시나리오였는지도 몰라. 우리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 각각의 이야기들인 한한, 한 번도 서브플롯인 적이 없었는지도 몰라.


이제 그 이야기는 끝이 났고,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지낸 오랜 친구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면서 평범한 그들의 연애를 시작하고서는, 우리처럼 되지 말자고 그렇게 말하며, 자신들의 평범한 순간들을 다시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겠지. 우리가 그랬듯이. 


가끔은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을 상상해. 그때 너는 네게 뭐라고 말할까. 너는 지금 방황하는 이 마음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너는 아직도 글을 쓰고 있을까. 나는 이제 어떠한 논거로 위태로운 이 순간에 대한 반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잘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홀로 밤길을 걷다가. 잘 끝난 이야기에 사족을 덧붙이는 것 같아서. 후진 시나리오 같아서. 문득 그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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