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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23. 2019

들풀 같던 네 마음의 계획

2호선을 타고 퇴근하는 길. 나는 술에 취해서 지하철 문에 기대 잠에 들었다. 나는 늘 이지경에 이르면 참을 수없이 피곤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합정역을 지나자 나는 억지로 눈을 비비고 창밖을 바라본다. 출근하고 퇴근할 때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주는 풍경. 늘 한강을 지날 때에 나는 창밖을 보려 애쓴다. 그 덕에 좀처럼 앉아서 가야 한다는 욕심을 내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밖에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고, 한강에는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내게 또 지난날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헐레벌떡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지하철 안은 한산 했고, 모든 것이 여유로웠던 초 여름의 화창한 날이었다. 우리가 보기로 했던 영화는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던 감독의 신작이었다. 나는 너를 위해 영화를 예매했고, 바보처럼 무얼 입고 가야 할지를 고민하다 늦어 버렸다. 나는 전정긍긍이었지만, 너는 늘 그랬듯이 차분한 얼굴로 여유로웠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등줄기에 흐르는 땀도 잊고 핸드폰으로 시계만을 바라봤다. 그날따라 유난히 지하철은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때문에 늦은 것이기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궁시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네가 무심하게 말했다.


"일부러 천천히 가는 거야."


너는 종종 모두가 호들갑을 떨 때 예언자처럼 한 마디씩 툭툭 내뱉곤 했다.


"일부러 천천히 가는 거라고. 저기 밖에 한강 좀 감상하라고 천천히 운전하는 거라니까."


나는 그제야 우리가 한강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들 같으면 서울 사는데 그깟 한강이 뭐 어쨌느냐며 무시했겠지만, 나는 네가 종종 그렇게 하는 말들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늘 현실에 전전긍긍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는 어딘가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좋았다.


"봐. 저기 배도 지나가잖아."


화창한 날에 적란운은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고, 강에는 햇볕 부스러기들이 자잘하게 일렁여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햇살을 가르며 유람선이 선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때 그 풍경이 아니라 너를 보고 있었다.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골똘히 무언가를 관찰한다. 그러나 네가 보는 것은 그 풍경이 아니라, 강물과 강바닥과 지각과 멘틀을 지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다른 편의 바다조차 지나 더 먼 곳에 있는 우주의 어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영원에 가까운 거리를 내다보는 너의 콧등과 속눈썹과 입술과 잔털이 송송 나 있는 볼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그래서 결국 네가 가리키는 풍경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지나서 놓여 있는 저 먼 무엇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늘 시간에 쫓겨 살았고, 수학과 물리학과 공학의 세계에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나였기에 네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너였기에 늘 체크무늬 남방과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던 나의 이 겉가죽을 신경 쓰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해할 수는 없어도 네가 말하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거 같았다. '의미 있음을 믿는다'는 말은 아마도 '좋아한다'는 말일 것이다. 들풀이 왜 자랐는지는 알지 못해도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오히려 의미가 없을 리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네가 하는 말들과 네 시야를 그런 들풀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는 새 너는 문이 열리자 그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여기서 내리면 안 된다고 소리치며 너를 따라갔지만, 너는 영화 같은 거 오늘 안 봐도 되니까, 맥주나 사서 한강으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내 세계에 짜인 모든 치밀한 계획들을 너는 그렇게 종종 엉그러 뜨리곤 했다. 너는 어두운 스크린 앞에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원래 날씨가 싫었다.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짠다고 해도 날씨는 늘 내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풍 계획을 짜고 또 다른 것들을 점검하고 난 뒤에도, 나는 일기예보를 보고 난 뒤에도, 그 날 비가 오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며 잠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이렇게 내 계획을 뒤 흔들어 놓았다. 나는 어쩌면 너를 탓하고 싶지 않아서 날씨를 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너를 따라나선다. 그 들풀 같은 묘한 설득력으로 나는 내 머릿속의 스케줄을 재 조정했고, 나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이 강변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너는 내게 플로티누스를 아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플라톤 같은 거냐고 되물었다. 그때 너는 전공 공부 따위는 하지 않았고, 여기저기 모든 교양을 들쑤시고 다니곤 했다. 그리고는 늘 내게 이상한 겁을 줬다. 어느 날에는 쇼펜하우어가 자살하려거든 굶어죽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한 사실을 들먹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쇼펜하우어라는 놈에게 심취해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게 겁을 줬다. 결국 너는 배가 고프다며 나를 한밤중에 불러내 족발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때에도 나는 해야 할 과제를 덮고 나가야 했고, 그것은 그것대로 또 신기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 누구도 나의 시간을 침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강을 바라보며 너는 말했다.


"일자가 유출된데. 아무 짓도 안 하지만 거기서 막 세계가 유출된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빅뱅 같은 건가?"


"아니, 그건 네가 하는 과학이고, 이건 철학이야. 세상에는 모든 것을 야기하는 '일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대단해서 아무 짓도 안 하는데, 이미 대단해서 저절로 세계가 흘러넘쳐 유출된 거라고 플로티누스가 말했대. 그러니까 이 풍경도, 너도, 나도 그 일자에서 유출 된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무엇에서 유출되면 결국 걔는 뭔가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저 태양을 봐. 쟤는 나를 위해서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데도 저렇게 따뜻하잖아. 일자 유출이라는 것은 그런 거야."


"그래도 결국 그 열이 여기까지 전달되는 거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럴 때에는 또다시 내가 멍청한 사람이 된 거 같다. 내가 건물을 설계하고, 또 그것의 하중을 적절하게 계산하는 방법을 완벽히 익힐 수 있다고 해도,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나 앞에서, 네가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자존심이 상했고 무력감이 몰려왔다.


너는 다 마신 캔을 구겨 버리고 또 먼 곳을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그런 거 있잖아. 어떤 사람은 절대로 나를 위해서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닌데, 나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은데, 그런데 그게 너무나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워서, 그냥 바라만 보게 되는 거. 그 사람은 말이야 나를 위해서 살아오지도, 또 앞으로 나를 위해서 살아주지도 않을 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아프게 하고, 또 나를 기쁘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야. 그것은 그 사람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흘러나오는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야."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것을 보았다. 나는 네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일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유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이해했다. 태양이 나를 위해 타오르는 것이 아니듯이, 네가 지금 짓는 미소도 나를 위해 짓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은 종종 빛나지만 그것이 나를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니듯, 하지만 그 빛이 유출되어 내 온몸을 아프게 하듯이, 바로 그런 빛을 내며 너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나와 지금의 내 모든 기분과 내 세계를 형성해 내었다. 모든 것들이 지금 너로부터 흘러나와 탄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날씨보다 더 지독하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예매할 수도 있고, 늘 누구보다 먼저 시험공부를 시작해 수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네가 한 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뒤져가며 그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었고, 아프면 병원에 들러 약을 사 먹었다. 그러나 태양이 빛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듯이, 나는 네 존재하는 방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이해했던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서 빛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그때 그 서글픈 마음과 또 너무나 태평한 날씨. 그리고 적절하게 차가워 내 목으로 넘어가는 캔 맥주와, 그것이 찌그러지는 느낌 같은 것들. 바람이 너무 행복하게 불어와 잔디가 스스스 눕고 서는 소리까지 아름답게 들렸다. 그 모든 풍경들이 아파서,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을 짜고 또 짰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간절하게 원하고 모든 계산을 다 한다고 해도, 결국 내일 비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소풍은 취소할 수밖에는 없었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이다. 그리고 또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이다.


그냥 그때 그 마음들이 생각나서는, 지금도 이렇게 합정역을 지나갈 때면 창 밖을 바라본다. 벌써 그게 언제였던가.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또 유연해졌던 것 같다. 그때가 그립다기보다는, 그때 나를 떠올리며 지금 잘 나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나는 여전히 편집증 적이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늘 내가 원하는 자리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너무 두려운 것이었지만, 또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 이후로 누군가 제멋대로 군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네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오늘 같은 날이면, 슈퍼에 들러 계란빵과 그때 그 캔맥주를 사서 집에 들어가서는, 늘 술에 취해 네게 고맙다고 말했다. 너는 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그런 삶을 너와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행복한 말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그 사실이 더 무섭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고, 나는 그 변경된 계획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재밌는 거라고들 하지만. 글쎄. 늘 똑같은 레퍼토리에 너는 그만 좀 하라고 내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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