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비가 내리는 날 저녁. 일기예보도 예측하지 못했던 그런 비가 내리는 날 저녁. 너는 내게 전화를 했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차였다는 말과 함께 혀가 꼬부라져서는 우산 좀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지. 나도 밖인데 우산이 어디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어.
개찰구 앞에는 어김없이 우산을 파는 아저씨. 나는 우산을 하나 샀어.
혹시 너는 궁금해한 적 있니?
일기예보도 맞추지 못했던 그 비를 그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그들은 어째서 비보다 더 먼저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달리기. 나는 달리기를 좋아했어. 그때는 그 누구도 나를 따라잡지 못했지. 남자아이들조차도 나를 놀리고 도망칠 때면, 결국 내게 따라 잡혀 등짝을 얻어맞곤 했으니까. 공부는 지루했고, 운동회를 기다렸지. 아직도 기억나. 파란 하늘. 시끄러운 나팔소리. 시큰한 공기에 낮게 나는 고추잠자리. 출발선에서의 긴장감. 긴장감보다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어떤 떨림. 화약총소리가 들렸고, 나는 결코 그 화약 냄새를 맡지 못했지. 빨리 달린다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근육의 역동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어. 나, 잘 했거든. 하지만 그 느낌은 결코 가볍고 산뜻하지는 않았어. 힘겹게 발을 구르고, 누구보다 잘 달렸지만 모두가 다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는 와중에는 결코 방심할 수 없었지. 그리고 그들을 제치던 순간에, 응원소리보다 귀 뒤의 맥박 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고, 그러다가, 내 앞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어. 세상이 내 앞으로 쏟아졌지. 나는 바람이 되었던 거야.
그래. 나는 달리기를 좋아했고, 파란 하늘을 좋아했고, 아빠는 우산장수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에는 할 일이 없던 그런 우산장수. 아빠는 늘 호우보다 먼저 나가서, 호우보다 나중에 들어왔었지. 나는 그게 싫었어. 나는 달리는 게 좋았으니까. 운동회 날. 내가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그런 날. 나는 남몰래 아빠가 출근하지는 않을지 불안해했던 거야. 그리고 또 그런 내가 싫어서. 아빠가 일을 나가는 것보다 맑은 날 하나를 바라는 게 싫어서. 그래도 달리고 싶어서. 눈치를 살피는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6학년 가을. 운동회 날.
그날은 그래서 비가 내렸고, 운동회는 취소되었지. 운동장에는 움푹 팬 곳 사이사이로 물이 흘러들었고, 아이들은 장화를 첨벙첨벙 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어. 엄마들은 우산을 들고 애들을 학교 앞까지 마중 나왔지. 나는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람들 사이로 아빠가 보였어. 파란 바스켓에 일회용 우산을 잔뜩 담에서는 그걸 수레에 끌고 나를 마중 온 아빠. 나는 엉엉 울었고, 아빠는 당황했지. 아빠는 달래려는 듯 붉은색 땡땡이 우산을 내 손이 쥐여줬어. 그냥 그때는 그게 더 싫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닌데. 그 안에서 가장 예쁜 그 빨간 땡땡이가 더 미워 보여서. 더 펑펑 울었고, 아빠는 나를 들어서는 수레에 태웠지.
그때 아빠는 말했어.
"딸, 우산 장수들이 어떻게 비가 내리기 전에 미리 아는지 알고 있니?"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우리들은 말이야. 사실은 신선이야. 살 곳을 잃어버린 신선. 우리는 하늘의 이치를 날 때부터 알고, 또 그것을 수련하며 살아왔단다. 그때 우리는 가뭄에는 비 내리게 하고, 또 너무 많이 내릴 때에는 그를 그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었어. 아주 먼 옛날, 그때에는 그래도 되었단다. 그때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일들을 하며 먹고살았으니까. 따뜻한 날에는 심고, 차가워지는 날에는 수확을 했으니까. 사람들은 다 함께 비를 기다렸고, 다 함께 비를 피했단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다양한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우리 딸. 달리기 해야 하는데, 오늘도 맑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모두가 맑은 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고, 또 언제나 맑은 날만 기다리는 것도 아니란다. 세상이 변해버린 거지.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날씨를 바라는 것은 매우 거대한 소원이 되었단다. 내일의 날씨가 맑기를 바란다는 것은, 적어도 서울 시 근방의 날씨가 맑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서울 시 근방의 날씨가 맑기를 바란다는 것은 육백 제곱 킬로미터의 공간 모두가 맑기를 바란다는 거야. 그리고 그 안에는 구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각자만의 계획과 꿈과,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어. 그 안에서 사람들은 비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언젠가는 비가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다만, 그날을 언제로 할당해야 하는지를 합의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단다. 각자의 소원과 꿈과 미래가 너무나 많아져 버렸거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날씨를 조정하는 것을 금지당했고, 더 이상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되었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이제 그 누구도 천기를 다스리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지.
그래서 우리들 각자는 흩어져서 기상 캐스터가 되거나 우산장수가 되었단다. 더는 날씨를 바꾸지 못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을 누설하는 공식적인 방법을 알아낸 거지. 그리고 또 나머지의 사람들은, 모두가 바라는 날씨를 선사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우산이라도 쥐여주는 일이라도 하고 있는 거란다."
이게 우산장수들이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한 이유였던 거야. 믿을 수 있니? 그때는 그냥 그 이야기가 재미있어. 우산장수라고 하면 촌스러워 보이는데, 신선이라고 하니까 그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아빠는 그러면서 말했어.
"그런데 말야. 날씨를 바란다는 것은 이기적인 소원일까? 날씨를 바란다는 것은 육백 제곱킬로미터 규모에 달하는 소원이지만, 어차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날씨를 바꿀 수 없거든. 그러니까 아빠는 괜찮단다.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나쁜 게 아니야. 날씨를 어떻게 바라건, 날씨는 늘 섭리대로 된단다. 그 섭리가 섭리인 이상, 내일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자연스러운 바람이야. 이제 우리는 그 섭리 안에서, 그저 사람들이 비 맞고 다니지 않도록 도울 뿐인 거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야. 나는 우리 딸이 언제나 즐겁게 달리기를 하기를 바란단다. 그저 이런 날에 비가 온다면, 우산을 들고 나와 씌워주면 그만인 거고.
그렇지 않니?"
내일 날씨를 바란다는 건 이기적인 소원일까? 육백 제곱킬로미터 규모의 소원을 바란다는 것은 이기적인 소원일까? 그것이 어쨌건 그날 이후로 날씨를 비는 일은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지.
그리고 다시 또, 비 내리는 날.
습한 공기가 찬 기운을 머금고 내 코에 닿던 그런 날. 너는 일 평방미터쯤 되어 보이는 대리석 타일 위에 주저앉아 있었지.
우리가 만약 더 이상 날씨를 바랄 수 없다고 한다면 말이야. 그 소원이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라면 말야. 일 평방미터 타일만큼의 소원은 어떨까. 그날 무너진 너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육백 제곱킬로미터의 소원이 아니라, 이 서울시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관여하는 그런 소원이 아니라, 이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그런 블록버스터 급의 소원이 아니라, 그저 그 타일 하나를 점유하고 있는 공간 안에서 울고 있는 인간에 대한 소원은 어떨까. 그런 인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떨까. 오직 그 정도 규모의 소원을 바란다는 것은 어떨까. 그리 바라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더는 이기적인 소원은 아닌 걸까?
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호우처럼. 네게 걸려온 전화도 예측할 수 없었고, 풀 죽은 네 마음 또한 예측할 수 없었지. 그런 너의 마음은 하나의 날씨처럼. 내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그런 날씨처럼. 모든 것은 그저 불가해한 섭리처럼. 그 평방미터 하나의 사람에 대한 소원은 여전히 덧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고, 더는 이기적일 필요가 없는 그런 소원 앞에서조차 나는 무력하게 서 있었지.
그리고 알았어. 이기적인 소원이라는 것은 그 정도 규모의 인간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규모의 인간이 나를 바라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것. 네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란다는 것.
그러나 그것에조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서. 그저 날씨 같던 너의 마음이 맑게 개기만을 바랐던 거야.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우산을 하나 사 씌워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아빠는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집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