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늦을 거라고 말하던 너는 그냥 나더러 아예 극장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기다리지 마."
그렇게 말하던 네게 나는 답장했다.
"안 기다릴 거야."
바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밖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입장을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린다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일이야. 너는 알고 있니.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꽤 많은 힘을 주거든. 늦은 사람은 채무자가 되고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사람은 채권자가 되는 것이니까. 그러려면 물론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염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겠지. 배 째라며 나타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다림도 무엇도 필요 없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사실 두 가지의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다. 하나는 나는 가지 않을 테니, 너도 나타나지 말라는 그런 말. 다른 하나는 나는 곧 뒤따라 갈 테니 너는 먼저 가 있으라는 말. 하지만 기다리지 말라는 그 다른 두 의미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사람의 행동은 한결같다.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그 안에서 내가 하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네가 곧 나를 따라 잡을 것이라는 사실.
나는 우르르 입장하는 사람들의 물살을 거슬러 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온다. 기다리지 말라 했으니,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림은 만남의 순간 직전까지 그 길고 긴 시간을 지루하게 견딤으로써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루함이다. 지루함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리가 저려올 때,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기다림이 기다림인 줄을 안다. 먼저 들어가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은 그래서 기다림이 아니고, 그것은 그냥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림이 정말로 기다림이라면 기다림은 본질적으로 지루한 것이고, 본질적으로 힘든 것이다. 힘들지 않은 기다림은, 만남이 오기 전까지 그저 다른 소일거리들로 구성지게 채워 넣은 것이며, 그래서 기다림이 아니다.
바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래서 기다림을 기다림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것. 기다림의 지루한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채워 넣고 나의 일을 하고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의 그 시간들을 버거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기다리지 말라는 너의 말에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먼저 가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나는 극장 앞에 있는 서점에 들어간다.
그거 아니? 나는 아주 어렸을 적, 생일이 다가오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내가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생각하느라 너무나 설렜거든. 하지만 한 달 동안 설렌다는 것은 한 달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 한 달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기도 해. 오직 저 뒤에 찾아 올 것만을 기다리다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잊어 버리게 만들거든.
엄마에게 벌써부터 생일 선물을 보채는 내게, 아버지는 책을 한 권 주셨어. 하루에 한 장씩만 읽으라고. 서른 장이 넘어갔을 때 내 앞에는 생일 선물이 있을 것이라고, 당신은 내게 말했지. 그리고 내가 그 짓을 하지 않으면 생일선물은 커녕 국물도 없으리라는 으름장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그럴듯하려면 어떤 결말이 좋았을까. 아마도 뒤의 내용이 궁금해서는 채 생일이 오기도 전에 그 책을 다 읽어 버렸다는 것이면 좋았을거 같은데 말야. 하지만 그때 나는 그냥 읽는 시늉만 하고 말았어.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기다리는 법을 몰랐거든.
그러나 여전히 교훈은 분명했어. 그 한 달간 내가 제대로 거들떠도 보지 못한 그런 책 한 권. 그것이 우리의 기다림이라는 거야. 기다림은 우리를 지루하게 하고, 쉬이 시간을 때울 것을 찾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런 기다림.
내가 너를 기다리는 삼십분은 그때 내가 잃어버린 한 달의 일부이고, 나는 이제 너를 기다릴 때면 서점에 들어가보곤 하는 거야. 그때 아버지가 내게 주었던 책은 황지우의 시집이었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 시에는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전형들을 보여주고 있어.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내가 해야 할 것에는 도통 집중도 하지 못하는 채, 나를 상실하고 있는 그런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는 아직 오려면 한참 멀었고. 그러나
<너였다가>
나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너였다가, 너 일 것이었다가>
나는 고개를 쳐들어 혹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그 순간에
<다시 문이 닫힌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나를 상실하고 나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나는 나의 기다림에 의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나의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릴 것만 같다. 그러며 여전히,
<너를 가디라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다림을 생각하는 거야. 오래전에 천방지축으로 흘려 버린 싯구절을 되읽으면서. 그래서 나의 시간을 채워주는 이 기다림에 대한 생각은, 기다림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든 메우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뒤에 흘려보내는 거야.
그리고 나서도 여전한 기다림. 기다리는 그 시간조차 나로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그 시간이 지루함으로, 또 그 지루함에서 짜증으로, 그 짜증에서 원망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 그저 무의미한 시간에 내던져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너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하나의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 그 안에서 나는 무의미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있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기다림.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너의 삶으로 바쁜 네가 다행히도 나를 찾아온다면, 그래서 미안한 기색으로 표정 짓는다면,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되려 미안함에 퉁명스럽게 말하려거든, 나는 말할거야. 나는 너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나는 그저 책을 한 권 꺼내 읽었다고. 나는 그저 책을 한 권 뽑아들어 무언가 읽어 버리고서는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고. 그리고 이 생각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네가 마법처럼 너무나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고.
그래서 이제는 아마도 네가 조금 기다릴 차례라고. 내가 지금 읽는 이 구절을 마저 읽어야만 하겠다고.
그렇게 웃으며 복수할래.